<담양인물지도>108. 담양군 공예명인 도예가 송정기씨
<담양인물지도>108. 담양군 공예명인 도예가 송정기씨
  • 설재록 작가
  • 승인 2017.09.29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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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면 쉬는 것 같고 쉬면 아픕니다”

 

도예가 송정기(56)씨를 만나기 위해 대덕면 운산리 송산골을 찾았다. 운산리 안쪽 산과 맞닿아 있는 일대를 송산골이라고 한다.


40년 가까이 도자기를 빚으면서 살아온 송씨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보내는데 문득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각난다. 영리한 사람은 맨손으로 산을 옮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리석게 왜 그런 일을 하는가? 그리고 애초에 그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한 삽 두 삽 옮기다 보면 산은 결국 없어지고 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세월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 일에 달려든다. 대개의 사람들 눈에는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로 보일 것이다.


아주 먼 옛날 ‘우공’이라는 노인이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집 앞의 산을 옮기겠다고 했다. 모든 사람들은 이 황당한 일에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노인은 남이야 비웃든 말든 그 일을 시작했고 끝내는 그 산은 없어졌다. 이 이야기는 우직한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든 꿋꿋이 내 길을 가겠다는 것이 우공이산의 정신이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문득 도자기를 만드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도예과에 진학을 했습니다. 가족은 물론 주위에서도 탐탁찮게 생각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걸로 밥벌어먹고 살기가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도 그런 생각은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 마음먹은 일이라 끝까지 가보자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 박종훈 교수님이었습니다.”


송씨가 대학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도자기를 빚기 시작한 것은 1981년부터다. 그러니까 올해로 36년이 된다.


처음에는 건설현장의 총무 일을 보면서 퇴근 후 밤에 도자기를 빚었다. 그러다가 1996년 우연히 대덕면 운산리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날 이곳에 자리를 잡겠다는 결정을 했다.


“지인들과 식사를 한 뒤 잠시 주변을 거닐었는데 들꽃 향기가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바로 이곳이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운산리는 제가 태어난 대덕 용대리와 지척이어서 더욱 정감이 들었습니다.”


곧바로 땅을 매입하고 집과 가마를 지었다. 그런데 가마터 부근에 ’송산(松山)‘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큰 바위가 하나 있었다.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측되는 바위였다. 송씨는 그 바위를 집 앞에 옮겨 놓았다. 지인들이 송씨에게 ‘송산(松山)’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그리고 송씨는 가마의 이름을 ‘송산요(松山窯)’라 명명했다.


송산은 소나무가 푸르게 잘 자라는 등성이, 곧 솔동산이다. 이 송산이라는 지명은 전국 여러 곳에 있다. 제주시 서귀포 간선도로 주변을 송산이라 부른다. 이곳의 소나무들은 흑송(黑松)으로 유명하다. 경기도 화성에도 송산면이 있다. 아산만 삽교호를 건너면 충남 당진시인데 당진에도 송산면이 있다. 모두가 소나무 숲이 울창한 곳이다. 그리고 대덕면 운산리 안쪽 산과 맞닿은 곳을 ‘송산골’이라고 부른다. 이 송산골에 송산 송정기씨의 도자기 굽는 가마 송산요가 있다.


“조선시대 때는 좋은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곳을 송산이라고 명명했다고 합니다. 송산이라고 명명된 곳의 소나무들은 관의 허가를 받아야지 함부로 반출을 못했다고 합니다. 제 집 앞에 세워져 있는 표석은 송산골 일대가 예전에는 좋은 소나무가 많이 자랐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송씨는 이곳 송산골에다 장작가마를 지었다. 땔감은 소나무를 쓸 생각이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소나무를 구하기가 어려워 편백나무를 쓰고 있다.


“도자기가 탄생되려면 흙과 유약과 가마가 있어야 합니다. 이 가운데 하나라도 없으면 그냥 흙일 뿐 도자기는 탄생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가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송씨가 손수 지은 가마는 ‘오름가마’다. 가마의 앞쪽을 낮게 하고 뒤쪽을 높게 하여 지은 것인데 거대한 파충류가 꿈틀거리며 위로 올라가는 형상이다. 오름가마는 아궁이칸 1칸과 번조실 5개로 되어 있다. 아궁이칸은 불통이라고도 하고 봉통이라고도 한다. 이런 형태의 가마를 전라도에서는 ‘뺄불통가마’라고 한다. 이 가마는 국제적으로 ‘통가마(tong-gama)’라는 명칭으로 통용되고 있다.


물질문명이 발달하기 전 옛날에는 그릇을 굽는 가마는 당연히 장작가마였다. 그런데 현대 이르러 석유가마, 가스가마, 전기가마 등 가마의 형태도 다양해졌다. 이런 현대의 가마들은 장작가마보다 일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그런데 송씨는 죽는 날까지 장작가마와 함께 하겠다고 말한다.


봉통(아궁이칸)에 불을 댕기고 나서 거의 하루 가까이 불을 때야 한다.


“도자기 일을 하고 있는 어느 선배님이 불 빛깔 때문에 장작가마를 그만 둘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 역시 그 말씀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창살로 너울거리는 불길을 보고 있노라면 예쁘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그 오묘하고 아름다운 불길을 어떤 색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듯 오묘한 불길 속에서 나온 그릇은 ‘분청사기’다. 분청사기는 분장과 무늬를 나타내는 기법에 따라 상감기법, 인화기법(印畵技法), 박지기법(剝地技法), 조화기법(造花技法), 철화기법(鐵畵技法), 귀얄기법, 덤벙기법으로 분류된다. 송씨는 이 가운데서 무늬를 도장으로 찍고 백토분장(白土粉粧)을 한 후에 닦아내서 찍힌 무늬가 희게 나타나는 인화기법(印畵技法)과 백토물에 담가서 분장하는 덤벙기법을 쓰고 있다.


송씨는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물레를 돌린다. 물레를 돌리는 시간은 하루 평균 열시간이다. 이렇게 해서 막사발 500개를 빚어낸다. 중간에 실수를 하면 500개를 채워야 하기 때문에 일하는 시간은 더 길어진다. 이렇게 하다 보면 손바닥이 닳아 피가 날 때도 있다. 그렇다고 일하던 것을 멈출 수는 없다. 가마를 다 채워야 불을 지필 수 있다. 가마를 다 채우기 위해서는 물레를 더 돌려야 한다.


“사람의 신체는 재생이 잘 되는 모양입니다. 하룻밤 자고 나면 말끔해지니까요. 흙도 늘 재생이 되잖아요. 밭이 되었다가 건물의 벽이 되었다가 도자기가 되기도 합니다. 흙이 죽었다는 소리 들어 봤습니까? 그리고 흙은 부드러운 것 같지만 아주 강하기도 합니다. 1천300도 불길 속에서도 녹지 않고 도자기로 재탄생되니까요.”


송씨는 예전에 비하면 살림이 아주 넉넉해졌다며 특유의 천진한 미소를 짓는다. 요즘은 한살림에 다기와 식기류를 공급하고 있다. 고등학교 1학년생인 막내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송산요를 지키겠다고 약속을 해 마음이 더욱 든든해졌다.


“저의 취미는 일입니다. 일을 하면 쉬는 것 같고 쉬면 아픕니다.”

*이 글은 2017년 9월 25일 현재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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