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담양 농악의 미래 를 위해 한 길 걸어온 '김동언 명인'
인터뷰-담양 농악의 미래 를 위해 한 길 걸어온 '김동언 명인'
  • 김승룡 기자
  • 승인 2019.05.17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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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이 훌쩍 넘는 풍물 인생, 이제는 후세 양성에 전념할 터
김 동 언 선생

“우리 농악의 명맥을 앞으로도 끊이지 않게 유지해 나가는 게 저의 사명입니다.”


담양의 우도농악을 이끌어가고 있는 김동언(전남무형문화재 17호) 명인의 말이다.


과거, 현재 보다 우리의 전통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미래의 농악 꿈나무를 키우고 옛 것을 꾸준히 전수해 나가는 게 그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현재 김동언 명인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위해 초등학교 3학년의 제자부터 70세가 넘는 제자까지 우도농악 담양전수관을 찾는다. 특히 주말 토요일 무료 강습에는 매주 40~50명이 찾아와 북새통을 이룰 정도로 높은 관심을 받고 있다.


김동언 명인은 “어릴 적부터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치던 분들에게 가르침을 받게 되어 이 자리에 있게 되었다”면서 “그 분들의 가르침에 누가 되지 않도록 저 또한 미래의 농악인들을 위해 스승님들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농악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닌 더불어 함께하는 것이다. 농악은 농촌에서 농사일할 때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하여 행해지는 향토 음악”이라면서 “예전부터 스승님들은 ‘감사, 인사, 봉사 할 줄 아는 삶’이야 말로 사람답게 사는 기본적인 본질이라 가르침을 받아 제자들에게도 그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전남무형문화재 제17호 우도농악 설장구 보유자 김동언 명인도 인생의 우여곡절이 없던 게 아니다.


인생의 여러 굴곡을 거쳐 500여명의 제자를 둔 설장구 명인이 되기까지 그의 인생은 영화 같은 삶이었다.


다만 그의 삶은 우도농악을 위해, 우도농악이 그의 인생의 전부가 될 때가지 한 권의 책처럼 잘 엮어져 있었을 뿐이었다.


김동언 명인은 어릴 적부터 장구에 대한 애착과 농악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초등학교에 재학 시절 정월 대보름이면 봉산면 와우리 앞 송학산에서 천제가 모셔졌다. 이 때 양지리, 수북면 황금리, 대전면 강의리, 광주 태령동 신기마을의 농악패들이 모여 대규모 굿판이 벌어졌다”면서 “각 마을의 장구 솜씨가 비교되었는데 서툰 장구를 보면서 저 정도는 나도 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김 명인은 장구가 미치도록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비싼 장구 가격을 감당할 수 없어 직접 만들기로 결심한다. 장구통은 쌀가루 같은 것을 내릴 때 쓰는 헌 체의 테를 이용했다. 그리고 가죽은 양초(파라핀)를 먹여 빳빳하게 한 무명천으로 대신했다.


장구와 사랑에 빠진 시골 청년은 “시간만 나면 직접 만든 장구를 두드렸다. 혼자서 마을 굿판 때 들었던 소리를 기억해 그대로 치고 다니자 동네 어른이 장구 하나를 선물해 주었다”면서 그 때부터 장구와 인연을 맺었다고 회상했다.


특히 김 명인이 장구와 농악사랑에 대해 더욱 애착이 깊어지는 계기가 있었다.


1957년, 김 명인의 나이 열여덟살 때의 일이다. 그때 전라남도 농촌진흥원 주최로 전국 4H경진대회에 와우리 4H 참가자로 나서게 된다. 이때 김 명인은 대회 참가를 위해 광주 모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는 이봉래 선생에게 장구를 배워 대회에서 특등을 차지해 부상으로 황소 한마리를 받았다.


당시 이 내용이 ‘대한뉴스’에도 나왔는데 김 명인은 시골에 있어서 몰랐다. 우연치 않게 찾아간 광주극장에서 대한뉴스에 나오는 자신을 보고 풍물인생을 결심한다.


하지만 살림이 어려워 우선 돈을 벌어야 했다.


죽제품인 ‘조름발’을 만들어 장에 팔아 논을 사서 농사를 지어 광주에 집도 샀다.


가정을 꾸미고 살림도 늘어났지만 좀처럼 풍물에 대한 갈증이 줄어들지 않았다.


어느 늦가을 김 명인은 들에서 보리를 갈다가 쌍교 쪽에서 농악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에 끌려 일을 하다 말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최막동, 이주원 선생을 만났다.


그날 김 명인은 그 자리에서 최막동 선생에게 장구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최막동 선생이 주소를 가르쳐주자 곧바로 쌀 두말을 짊어지고 광주 방림동으로 향했다. 그런데 선생에게 정식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 장 저 장을 따라다니며 장터에서 함께 풍물을 치며 눈치껏 배웠다.


그렇게 5년을 따라 다녔다. 하지만 식구가 늘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모든 일을 전념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농사일에 매달렸다. 벼농사 외에도 토마토, 오이, 수박 등 이른바 원예작물도 시작했다.

이때 하는 농사마다 풍년이 들어 살림도 더욱 늘어났다. ‘김동언이가 하는 농사만 따라 하면 실패는 없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농사를 잘 지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늘 풍물 판에 있었다.

이 무렵 김 명인은 당시 유명한 만담가 고춘자·김용운이 사회를 보던 KBS 인기프로그램 ‘전국민속백일장’에 나가 상을 받았다. 민속백일장에서 상을 받자 그 프로그램에서 함께 하기를 제의 받았으나 아내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러던 차에 무정면 죽산마을 출신 김회열(광주무형문화재 8호)씨로부터 시골에서 지내기는 아까운 재주니 광산농악에서 함께 활동하자는 권유를 받는다.


그래서 김 명인은 광산농악 단원으로 입회하고 이어서 기능보유자 전수생이 된다. 광산농악에는 9년간 몸을 담는다.

이 무렵 우도농악의 김오채(설장구), 전경환(상쇠) 선생을 만났다. 당시 김오채 선생의 설장구는 전국 최고로 평가받고 있었다.


당시를 김 명인은“그런데 김오채 선생님이 전라도 사람이니까 광산농악보다는 전라도 농악에 전념하기를 바랐다. 김회열 선생님에 대한 의리도 있는데 고민하다가 결국 전라도 농악을 선택했다.

그 일로 김회열 선생님 사모님에게 멱살을 잡힌 일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 후 1993년 4월, 김 명인은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우도농악기능보유자 전수조교(후보자)로 지정 받는다. 그런데 김오채 선생이 갑자기 세상을 떠버렸으므로 선생의 생전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설장구를 익혔다.


1994년 4월 김오채 선생이 작고하고 김 명인은 마침내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7호 우도농악기능보유자로 지정받게 된다.

그때 김 명인은 스승님이 돌아가셨으니 3년 상이나 지낸 다음에 받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1996년 10월 14일 무형문화재가 됐다.


그는 무형문화재가 되고 나서 더욱 스승님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우도농악과 전통 농악 발굴 계승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더 많은 이들이 우리의 전통인 농악에 대해 관심을 갖고 찾아 올 수 있도록 지난 2009년 우도농악 담양전수관을 지었다.


김 명인은 “저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 김오채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 제가 배운 모든 걸 후세에 전하는 게 저의 의무이자 사명이란 생각에 전수관을 짓게 되었다”면서 “지금은 많은 이들이 찾아와 우도농악을 배우고 있는 등 앞으로도 전수관으로의 역할을 꾸준히 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의 고향마을인 봉산면 와우리 인근에 위치한 전수관은 우도농악기능보유자로 지정된 1996년부터 매달 지급되는 월급(연구비) 30만여원을 한 푼도 쓰지 않고 13년간 고스란히 저축해 짓게 됐다. 그리고 부족한 돈은 공연에 따른 출연료를 보탰다.


이와 함께 김동언 명인은 후진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전남대 국악과, 중앙대 음대, 조선대 사회교육원, 남도대 음대, 용인대 음대 등 대학교를 비롯해 충남도립국악단, 전남도립국악단, 광주시립국악단, 진도 국립국악원 등 그가 강단에 선 강의만 하더라도 수도 없이 많다. 지금은 전북대학교 대학원에서 젊은 국악도들에게 우도농악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전국에서 내노라하는 국악도들이 김동언 명인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특히 김 명인은 김동언 류(流) 담양 우도농악 설장구를 온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지난 2015년 세계대나무박람회 기간 동안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100인 설장구’ 공연을 통해 휘모리, 봉살풀이, 굿거리, 자진풍류, 굿거리풍류 등의 가락에 화려한 춤사위로 가득 채워지는 진풍경을 자아내기도 했다.


게다가 김동언 명인은 ‘용전 들노래’, ‘담양광광술래’ 등을 발굴·재연했으며 ‘용전 들노래’로 인해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제 제22호, 광주 북구문화상 제1호의 주인공이 됐다.

또한 사라져 갈 뻔한 우리의 전통 문화를 발굴 재연해 나가고 있으며 풍장소리(농사지으면서 부르는 노래), 상여소리(전통 제례문화) 등을 꾸준히 고증을 거쳐 우리 전통 문화로 후세에 전승될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할 계획이다.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풍물 인생을 걸어온 김동언 명인.


이제 팔순의 나이가 되어 오는 6월 1일 우도농악 담양전수관에서 팔순 수연례(어른의 생신에 아랫사람들이 상을 차리고 술을 올리며, 오래 사시기를 비는 의식)가 치러진다.


다만 그는 “풍물 인생은 이제 시작일 뿐이며 아직도 풍물에 대한 배움이 부족해 끝임 없이 배우고 있다”고 전한다.


끝으로 김 명인은 “선배 명인들이 살아온 생활과 가르침을 본받고 우리전통 민속예술을 계승 보존 발전시키고자 더욱 전진할 것”이라면서 “문화와 예술의 고장 담양에서 우도농악이 더욱 꽃피울 수 있도록 지역민의 참여와 관심을 바란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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