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3
천년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3
  • 자료제공=담양문화원
  • 승인 2020.04.07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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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향토문화에 대한 원천자료의 소중함이 날로 커지고 있는 시기에 본지는 담양문화원(원장 이병호)의 도움으로 관내 350여개 마을에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설화와 전통들 중에서 일부 내용을 지면에 연재한다.
이는 혹여 잊혀 질 뻔한 담양의 소중한 전통과 이야기를 기록하고 알려 기성세대에게는 어릴 적 아련한 추억과 함께 고향사랑과 향수를 일깨우고 자라나는 후배들에게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가야 할 소중한 전통임을 알리는데 목적을 둔다.
단 지면의 내용들이 문헌에 의해 보존되어 내려온 것을 담은 것이 아니라 오랜 구술에 의해 전래된 설화와 전통들이 보니, 특성상 단지 기억에 의존하여 제보를 해준 구술자에 따라 가공·변형이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음을 양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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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 제각과 당산나무
죽녹원 내 우송당(전 담주리 우송당)

만석꾼 국채웅의 사랑채 우송당
▲제보자=김귀수(남, 1937년생)


▲줄거리=만석꾼 국채웅의 담주리 사랑채 우송당에서 박동실이 기거하며 소리를 했던 사연이 있어 현재의 죽녹원으로 옮겼졌고, 양각리로 이사 가서 지은 사랑채 우송당은 국채웅 사후 큰딸 국유가 조계종에 등록을 해 우송사로 바뀐 내력이다.


▲이야기=우송당은 만석꾼 채자 웅자(국채웅)께서 사랑채 정자를 만들었어.
자기 큰딸 이름이 뭣이더라. (국추)큰딸이 불교를 믿어요. 우송당을 우송사로 조계종으로 만들었거든.(조계종에서 인가를 받았음). 제주도 무슨 절이 있어요. (관음사)큰딸이 제주도 절로 간디. 1869년생인가 돼. 이 양반이 거기서 놀고(머물고)손자 국홍근이가 증설했지. 우송당을 우송사로 만들었어요.


국채웅씨 호가 우송이야. 이 양반이 젊어서 백양사에다가··· 앞에 비문이 있어요.
백양사에 많이 시주를 했고 기증을 했어. 그때 당시에 시주를 많이 해서 백양사가 힘을 잡았다고 했어요. 그러고 내려오다가 백양사 말사니까 백양사 총무의장이 쉽게 말해서 발령을 해. 어디로 가라고, 그러고 국씨들 가세가 기울어지니까 여성들을 많이 보내고 했지.


그래서 지금도 주지가 여자잖아. 백양사가 오래 됐지만은 국씨 때문에 힘을 잡았다는 애기도 있고.
내가 초등학교 때 그 양반이 큰 트럭에다가 싣고 세파트 개를 앞세워서 백양사를 가.


담주리 개인택시 뒤에는 국채웅씨가 집을 지은 안채야.


안 사랑채가 어디 있냐면 주차장 있는데에 있지. 바깥사랑채는 고치과에 있는데 애기들 노는 사랑채고 안 사랑채는 어른들이 노는 사랑채야


양각리 우송사 있는데가 우송당이야. 지금 우리 집 바로 옆인데 하나의원 뒤에는 국채웅씨의 안집이지.


담주리에서 살 때 바깥사랑채가 있고 안 사랑채가 있고, 담주리는 사랑채가 둘이 있었어.
박동실이랑 산 데는 한옥을 다 뜯어가서 죽녹원 뒤로 옮겼지. 비문이 있어.


박동실이가 이북으로 올라 가 판소리하고 노래하는 사람들이 박동실이를 별로 안 찾아.


그 때 당시에는 판소리 말고 더 있겄어. 선생님이라고 확실히 들어본 적은 없는디 부자고 밥술이나 먹고 하니까 술 한 잔씩 먹으면 흥얼~ 흥얼~ 하겄는가?


맏딸이 우송사로 사찰로 등록을 했다. 1950년경 국채웅씨가 1948년에 돌아가셨을 것이며 그 시절에 딸이 관리를 했지.

마을 쉼터가 되어 준 당산나무
▲제보자=이상원(남)


▲줄거리=백동리 광산김씨 제각 옆에 당산나무는 암수가 있어서 남자 여자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당산제는 지내지 않고 마을사람들 쉼터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여기가 삼거리길이여. 예전에는 무정 가는 길이 여기로 다녔어.
길로 새로 나 저기 사거리에서 무정으로 가고, 또 청전 아파트에서 주공 쪽으로 길이 나 사람들은 물론 차들도 이 길로는 안 다녀. 옛날 방죽 있을 때가 좋았제.


저쪽 제각에 있는 나무는 암놈이고, 이쪽 담양쪽에 있는 것은 수나무라고 했거든.


그것이 수놈. 당산제는 안지네. 그 나무가 암수는 여자 치마처럼 생겨서 안으로 사람이 들어가는 키만큼이나 커. 그래서 사람이 들어간다니까. 지금도 있어. 그래서 이 나무가 중간에 올라가면 혹이 있어 우리가 나무를 타고 잡고 올라가면 혹을 젖꼭지라고 했거든.


여기 수나무는 고사되어 비어져서 없어져버렸어. 그런데 수나무가 옆으로 혹이 나와 있었는데 이것이 꼭 남자 성기같이 요렇고 나왔어. 그래서 사람들이 여기서 의자같이 앉아있었어.


그런데 고사되어 없애버리고 다시 심었어. 그래서 이짝 암수는 큰 디 수나무는 적어.


이 새로 심은 나무는 12~15년쯤 되었능가 몰라. 새로 심은 나무도 요렇고 커. 암나무는 양쪽으로 가지가 추욱 쳐졌어. 제각 쪽으로 뻗은 가지에는 그네를 만들어 탔고 그랬제.


암수 있는데는 요러고 묘똥같이 있어서 사람들이 여그서 여름에 누웠기도 하고 그랬어. 꼭 묘자리같이 생겼는디 묘는 아니여.


사람들이 여름에 모심고 그랬을 적에 머리를 봉우리 쪽으로 하고 누워서 쉼터로 썼제.


평지에서 누운 놈보다 여기가 편해. 여기가 마을 사람들 쉼터였제. 우리는 어렸을 적에 제각 위에서 비석치기도 하고 그랬어.

양시암 이야기
▲제보자=김태성(남, 53세)


▲줄거리=지침리에는 큰 양시암 거리가 있고, 작은 양시암이 있었는데, 작은 양시암은 상하수도 사업소가 생기면서 사라지고, 큰 양시암은 오랫동안 남아서 아이들 놀이터로 빨래터로, 목욕탕으로 여러 기능을 하였다는 이야기다.


▲이야기=여기 양시암 거리가, 저도 어른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어렸을적 저는 양시암에서 많이 놀았어요. 양시암이 현재 운영 중인 1박2일 가게 뒤편에 있었어요.
거기에는 옛날에 철물점이 있었던 자리기도 합니다. 저는 거기 양시암에서만 놀았는데, 거기가 원조 양시암이고, 작은 양시암이 또 있었대요.


작은 양시암이 어디 있었냐면 금강 레인보우 아파트 맞은편 원불교 어린이집 자리에 적은 양시암이 있었대요.
작은 양시암은 제가 어렸을 적으로 생각을 해요. 논 가운데에 어느 날 갑자기 건물이 들어섰는데, 그게 상하수도 사업소라고 알고 있어요.


그 건물이 들어서면서 작은 양시암이 없어진 거죠.
왜 그 자리를 기억을 하냐면 초등학교 가기 전에 그 자리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어요.


기억이 무지 강해서 박정희 대통령 시절로 알고 있는데. 상하수도 사업소를 부부가 관리하는 요즘말로 하면 관사가 있었는데, 그 때 살인사건이 일어나가지고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그랬던 기억이 있어요.


저의 기억에는 강도 살인 사건으로 기억을 하고 있어요. 범죄자를 잡았는데 그 범죄자가 현장재현 하는 걸 봤어요.


그리고 큰 양시암은 어렸을 적 하도 많이 놀아서 양시암의 어원은 밑에서 솟아나는 물이라 했어요.


여름에도 발이 시릴 정도로 차가워서 오랫동안 있지는 못했다고 들었어요.


샘이 깊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지하수가 올라올 수 있고 양시암의 모양을 보면 샘이 올라오는 곳은 동그랗게 바위를 쌓아놨고, 그 밑에다가 네모나게 물을 받는 곳이 있었어요.


여기 받는 곳에서는 어머니들이 빨래도 하고 그리고 그 주변에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동그랗게 양시암 주변으로 우거져 있었어요. 여자들 사랑방도 되고 빨래도 하고, 목욕탕도 되는 여러 가지 기능을 한 곳입니다.

부자마을 남촌의 옛 모습
▲제보자=서광태(남, 1943년생)


▲줄거리=만석꾼 정참사 댁이 있을 정도로 부자동네여서 기와집이랑 큰 나무가 많았고, 전기도 담양에서 제일 빨리 들어왔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60년도에 이 동네로 이사왔어. 남산에서는 금광을 채취했다고 해.
저기에 만석꾼 참사집이 있고 만성리에 호국사 절이 있지. 그 절이 여기 있는 거를 만성리로 뜯어 간거야. 여기 우리 집 있는 곳이 명당 터야. 여기 동네 뒷산도 우리 산이야.


만석꾼 정참사댁이 우리 집 아래쪽에 있어. 그 집도 참 오래 됐지. 옛날에는 구워서 만든 기와로 다 이었던 것을 집이 무거워서 다 뜯어내고 스레트로 했다가 이제는 함석기와로 다 바뀌었어. 옛날에는 이쪽이 전부 저렇게 생긴 기와집이었어.


옛날에는 여기가 부자동네라, 부잣집에는 큰 나무들이 많이 있지. 그 나무들을 우리 아버지가 다 사서 여기 집주변으로다 한 대 채를(여러 채를) 만들었지. 여기 앞에도 집이 몇 채가 있었어. 다 초가집이었는데 다 허물어져서 없애버렸어.


(조사자 : 옛날에 여기가 전기가 제일 빨리 들어왔다면서요?)
그렇지. 그만큼 여기가 부자 동네였지.

인재들을 모으는 취영마을
▲제보자=강기섭(남, 1959년생)


▲줄거리=인재들을 모은다 해서 취영이라 했고 서원이 있어서 서우내, 강의실이 있어서 강당으로 불렸던 향교2리 취영마을의 지명유래이다.


▲이야기=모을 취(取), 영재 영(英)이여, 인재들을 모은다 해서 취영마을이라 했제. 어렸을 때는 서우내라고도 불르고···. 안 그러면 취영이라는 의미 이해 할 수가 없제.


옛날에 우리 어렸을 적에는 서우내라고 들은 얘기가 그래. 우리는 왜 서우내로 알았냐면 옛날 우리 마을이 한양, 서울이 될려고 했는데 도사가 와 가지고 “남산이 뒤로 땅이 넓어야 수도를 세울 거 아니야.”그래서 남산이 도사 말을 듣고 뒤로 물러나고 있는데, 그걸 본 사람이 “어이~ 남산이 움직이네.”그래서 그 말을 들은 남산이 멈춰버렸대.


그래서 수도가 못 돼서 서운하다 서운하다 그래서 서우내로 불리어졌어.
그런데 나중에 나이를 먹고 보니 우리 마을에 서원(미암서원)이 있었다는 걸 보아서 서원내로 부르다가 서우내로 통했다는 말이야.


옛날 골목에 사는 애들 보고 우리는 강당에 사는 애들이라고 했거든 골목을 강당이라고 그랬어. 한동네 살아도 그렇게 말했어.


왜 강당이라고 했을까 생각해보니 옛날에 쉽게 말하믄 강당이 있었어. 강의실이 있었단 말이여.


그래서 우리 어렸을 때는 그런걸 잘 모르잖아 그래서 나중에 커서 자료를 찾아서 본게 ‘아~그래서 강당이라고 했구나.’ 그 나중에야 알았제. 그러지 않고서야 왜 강당이라고 불렸을까 알 수 가 없제.


근데 장어집 위쪽에 서원이 있었어. 그렇지 않고서는 취영마을이 이름 붙여질 이유가 없다는 말이야. 인재들이 많이 모으는 곳이라 해서 취영이라고 이름 붙여지지 않았을까.


(조사자 : 서원이 어디에 있었나요?)
유동장어 옆쪽에 죽녹원 안쪽에 있었다고. 계단 기초석도 우리가 발견했거든.


(조사자 : 서원이 있었으면 스승님이 계셨을 텐데요?)
서원이라는 게 제사를 모시는 데거든. 향교는 공식적인 학교고.


미암 유희춘의 제자들이 사당을 지어놓고 모시면서 인재들을 모아서 사적인 교육, 요즘말로 하면 사교육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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