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18
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18
  • 자료제공-담양문화원
  • 승인 2020.09.17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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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마을에 온 전두환
▲제보자=김여중(남, 1930년생)
▲줄거리=1980년 광주항쟁이 끝나고 다음해 전두환 대통령이 성월리 성산마을에서 1박을 하고 갔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우리 마을이 장수마을로 유명한 마을이요. 1981년에 전두환이가 이순자랑 우리 성산마을에서 하룻밤 자고 갔어요. 자고 간 집은 당시 이장집인데 그나마 깨끗하고 좋아서 그 집에서 잤다고 그럽디다. 자고 가서 그랬는가 그 뒤에 개축을 했죠. 전두환씨 이야기는 안하고 싶어요. 그때 경호원들이 집집마다 지키고 서서 밭에도 못나가게 하고 그랬어요.
(임성우 : 왜 이 마을로 왔나? 내 생각에는 우리 마을이 들 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경비하기가 좋고, 고서중학교가 가까이 있어서 헬기도 대기 쉬워서 그랬던 것 아닌가 싶어요.)
(이기동 : 봉산면 강정이(강쟁리)로 갈 것인가? 성산마을로 갈 것인가?
두 군데를 사전에 조사를 했다가 우리 성산마을로 왔다고 들었어요. 그때 당시 면장을 했던 김선옥 면장에게 들었어요.)

광주 담양 왕복 기차 이야기
▲제보자=정종채(남, 1935년생)
▲줄거리=광주에서 담양 간 기차가 1923년부터 1943년까지 운행되었는데 당시 망월역, 장산역, 마항역 등이 있었으며, 일본에 징용된 사람들이 장산역에 모이면 소학교 학생들이 군가를 부르며 전송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1941년에 군대 갔다 왔어. 일본 구주에서 1년을 있었지. 1924년생과 25년생이 많이 잡혀갔구만. 우스갯소리로 잡혀간 사람을 묻지마 갑자생이라고 그랬어. 장산역에서 군대간 사람들을 전송했어. 소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군가를 부르면서 전송을 하고 그랬어.
(김여중 : 어렸을 때 기차 타고 광주까지 다니고 그랬어.),
광주에서 담양을 왕복하는 기차가 1923부터 1943년까지 다녔어. 그 사이에 망월간이역, 장산역, 봉산에 마항간이역이 있었어. 내가 고서초등학교 22회 1948년 졸업생인데 초등학교 1학년 때 장산역에서 기차를 타서 광주역에서 갈아타고 송정역까지 갔다 온 적이 있었어. 송정리
에 내 숙부님의 처가가 있었어. 거기에서 내 할아버지인 송포 정구현 할아버지를 초청했는데 내가 따라갔지. 또 이번 것은 내 기억에는 없고 송포 할아버지가 말을 해 주서 그런 줄 아는데 초등학교 다니기 전에 경주 정 문헌공파들의 사당인 옥계서원이 순천에 있는데 송포 할아버지가 구경시켜주려고 나를 데리고 갔다고 그래. 그때도 장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광주로 갔다가 갈아타고 순천으로 갔다고 그래.


월전마을 형성과 지형 이야기
▲제보자=곽중흠(남, 1936년생)
▲줄거리=월전이라는 지명은 반월형 형국에서 따왔다고 하며, 사방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즐비해서 송전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이야기=우리 월전마을은 정조 24년 1800년경에 해미 곽씨가 들어오고 그 다음에 창녕 조씨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해미곽씨는 요새 현풍 곽씨라고 하는데 홍의장군 곽제우 의병장도 한 집안입니다. 우리 동네하고는 촌수가 조금 멀기는 하지만 경상도 의령에 있는 사당에 우리 마을 곽씨들이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우리 마을에 들어 온 할아부지는 곽재욱 할아비인데 나로서는 6대조 할아부지가 됩니다. 마을에 묘도 있고 비석도 있습니다. 지금도 주로 곽씨 일가가 살고 있다고 보믄 됩니다. 30호가 넘는데 빈집이 댓집 있어요. 학생은 어디나 그러겠지만 한 명도 없는 마을입니다.
달 월(月) 밭 전(田) 월전은 뒷산이 반월형 형국이라 그리 붙였다고 들었어요. 지금 마을 모정 주변으로만 소나무가 4그루가 있는데 광주댐 완공되기전 1976년 까지만 해도 사방에 소나무가 즐비했어요. 광주댐 수로를 놓으면서 나무를 다 치었어요. 보호수로 지정해도 될만큼 기기묘묘하게 생기고 몸집이 큰 소나무들이었어요. 옛날 사람들의 말에 따르믄 한 나무로 올라가서 전체나무로 옮겨 다닐 정도로 빽빽하게 있었다 그래요. 그래서 여기를 송전이라고 그랬어요. 마을에서 ‘송전으로 간다’고 하믄 여기를 말했어요.
(곽영기 : 곽재욱 할아부지는 우리 마을에 제일 먼저 들어오셨는데 강진에서 이리 오셨어요. 학자였다고 합니다. 지금 해미 곽씨가 10여 호 살고, 창녕 조씨가 비슷하게 살아요. 우리 마을 뒷산에는 새터굴이라고 금광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 때 세 군데를 팠는데 금이 안 나왔다고 그래요. 우리는 모르죠. 어려서 금광굴을 들어다녔는데 한 20m 깊이로 들어가 보고 그랬어요. 돌을 던져 보면 한 참 있다가 ‘쿵’소리가 났어요. 지금은 완전히 미어부렀어요.
또 마을 앞 들판에는 고분이 있어요. 월전고분이라고 문화재로 군에서 관리하고 있어요. 벌초도 금년에 2~3번 했어요. 삼국시대 것이라고 들었어요. 그런데 그 뭣자리가 송아지 자리라고 합니다. 저 앞 교산리에 있는 창평향교가 암소이고 여기 고분이 송아지인데 향교와 월전 뜰 사이에 중암천이 흐르는데 송아지가 그 냇가를 못 건너간다는 겁니다.)

광산마을 유래

▲제보자=박근서(남, 1936년생)
▲줄거리=광산마을평은 평촌과 산촌이 통합된 작은 마을로, 아이 돌이면 음식을 나눠먹으며 오붓하게 살아온 마을이다.
▲이야기=광산마을은 숙종 6년 반남 박씨와 해미 곽씨에 의해 개척되었습니다. 광성산을 안산으로 하기 때문에 광성촌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또 평촌이라고도 불렀는데, 전에는 마을이 양촌으로 되어 있어서 평촌, 산촌, 들광산, 안광산 등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상세한 연수는 없으나 평촌과 산촌 두 마을이 통합되어 광산이라고 명명하여 지금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우리 반남 박씨는 1746년생 함자가 신원인데 이 어른이 제일 먼저 오신 것 아닌가 합니다. 그 다음이 1798년생 용수 할아버지인데 이분은 여기서 살다가 구름다리 운교마을로 갔다고 그래요. 해미 곽씨는 3집이 살았는데 다 이사를 갔어요. 6·25 되던 해에 다 떠났어요. 내가 이사짐을 구르마(우마차)에 실어주고 그랬어요.
지금 19호 60명이 살고 있는데 60년 전에 많이 살 때는 30호가 넘었어요. 우리 마을은 돌이 되면 음식을 마을이 나눠먹는 풍습이 있어요. “아무개 아들 손자가 돌이면 한 잔 묵겄네” 라는 말을 서로 하고 부모들이나 할아부지한테는 “고기도 좀 많이 사고” 이렇게 말하고 그러제. 돌날이 되믄 그 집으로 다 모여요. 당연히 해야 되는 걸로 알제. 마을사람들 2/3는 모여. 한 4~5년 전까지는 했어요. 마을이 적으니까 오붓하게 살았지. 요새는 아기를 안 노니까 못 허지. 지금은 옛날이야기가 되어 갑니다.

무관의 터
▲제보자=조명호(남)
▲줄거리=운현마을은 무관의 터라 마을출신 중 일곱 명이 군인출신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우리 마을에서만 군인이 무려 일곱이 나왔어. 그래서 무관을 배출하는 터라고 해. 한마디로 무관의 터지. 육사를 대령 달고 퇴역한 조영천, 하사관 출신으로 관보부에서 군대 생활을 했다가 대령까지 진급한 조구호, 관보부는 3사관학교 전신으로 3개월짜리 특별관리대상을 관리하는 군대인데, 조구호 대령은 나중에 파킨슨씨병을 얻었는데 정직하고 청빈하며 잘 생긴 군인이었어. 진급 점수로는 별을 달고도 남을 사람으로 평가를 받았다고 그래. 또 해사출신으로
해군중령을 달고 있는 조정우라는 분도 계셔. 또 소령으로 제대한 이효걸, 대위로 제대하여 예비군 중대장을 맡고 있는 조영수, 소령으로 제대하여 예비군 중대장을 하고 있는 조대식, 3사관학교를 나와서 중위로 제대한 조재철 등 군인이 여럿이여. 우스운 얘기로 이분들을 다 한 자리에 모으면 운현마을 군대를 하나 만들 수도 있겠지.

검단마을 형성과 옛 이름
▲제보자=김영순(여, 1941년생)
▲줄거리=검단마을은 오래된 마을로 고읍 창평 현청으로 출퇴근하는 관리들의 주거지 기능을 했다 하며, 옛날에는 고터, 혹은 가늘깨라고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우리 검단마을은 오래된 마을인데, 옛날부터 사람이 적게 살았다고 그럽디다. 고읍리에 구 창평이 생길 때 이 마을도 생겼다고 들었어요. 중종 6년 1511년에 금성 오씨들이 처음에 들어와 살다가 정조 24년 1800년경에 연안 이씨가 해남에서 이리 들어왔다고 그래요. 옛날에는 이 마을을 고터라고 부르고 가늘깨라고도 불렀다요. 고읍이 우리 큰 집인디 시아버지랑 함께 고음리 감서 가늘깨라는 소리를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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