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22
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22
  • 담양군민신문
  • 승인 2020.11.20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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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종가

 

창평의 명산 월봉산
▲제보자= 나숭경(남, 1938년생)
▲줄거리= 창평쪽에서 볼 때 월봉산은 필봉이 높고 잘생겨서 상월정이 있고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으며, 가물 때 무제를 지내면 비가오고 산속으로 돈이 들어오는 명산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월봉산은 창평면에 있습니다. 각 면마다 군마다 명산이 있습니다.(창평의)명산은 월봉산이여. 유명한 산이여. 월봉산은 산이 높으고 필봉도 높으고 잘 생겼잖아. 산이 저짝 위에서 보믄 산이 안 이뻐. 근디 여기 창평에서 보면 이뻐.
(창평에서 우리가 볼 때 게 산속으로 돈이 오잖아요.)                                  
월봉이라 허면은 달 월(月 )자, 메꿀이 봉(鳳)자, 월봉산이여. 상월정이 있고 그렇게 달월자해서, 그래서 월봉산이여.
기우제를 지낼라고 면에서 인자 동네에서 날을 받았제, 글면 인자 수곡에서는 산돼지를 짊어지고 가고, 우리 용운동서는 비니루 푸대에다 물을 담아서 짊어지고 거가서 돼지를 새로 잡아요. 목을 따서 잡아 가지고 그 피를 바우에다 칠해요. 근게 그날 저녁에 비가 왔어요.
근디 그 돼지를 잡았는디 내장을 누가 가져가 부렀어요. 누가 갖고 갔냐면은 수곡 무안양반이라는 사람이, 근디 산신령님이 못 가게 혀. 근디 저녁내 돌아 거기를 인자 월봉산에서 돌아도 거가 있고, 그래 갖고 그 양반 몇 해 안 있다가 죽어 부러써.
산이 말입니다. 창평 저그 저 병원, 널다리라고 있어요. 병원 앞에 거기서 보면, 산이 병풍같이 생겨가지고 막 창평으로 옵니다. 쏟아져 글믄 창평에서 뭐라 그냐면 말하자면, 인자 막 부자가 되고 사람이 난다. 사람이 났잖아요. 창평서
그래서 월봉산이 명산인데 보기에 산이 높으면서도 이쁘고 또 사람이 나면은 똑똑허고 필봉으로도 보이고 그래요. 필봉이라는(필자는) 붓필(筆)자거든. 그런게 필봉을 제대로 잡은 것이 창평고등학교거든. 필봉으로 딱 보이잖아. 창평고를 처음에 촌에다 지어 놓고 창평고 1기생, 2기생들이 뭣이 나올란가 했어도 서울대를 들어가고 그러 안했습니까. 그 이치가 뭣이냐면 필봉 요거를 기를 잡아 넣어서 터를 잡아서 집을 지었대요.

불천위 명문 학봉 종손가의 명예와 애환
▲제보자= 고영준(남, 1939년생)
▲줄거리= 학봉 고인후에서 녹천 고광순 종손가의 이야기이다. 조선 500년 역사 유일한 3대 서장관 불천위 집안의 종손으로 종가를 자식에게 물려줄 수 없을 것 같다는 고민이다.
▲이야기= 우리 할아버지 호가 학봉이여. 휘자는 인자 후, 고인후, 서른둘에 돌아가셔. 유촌리 사신 건 사실이여. 그 양반이, 장가만 오셨어. 이리, 함평이씨한테 장가만 오셨어.
(조사자 : 원래 어디서 사셨대요?)
광주 대촌에서 살았어. 아버지가 살고 있는, 고경명 의병장 잘 아시지? 거가 대촌리여, 거기서 사셨어. 장가를 오셔. 여기로 오신거야. 그러다가 돌아가셔갖고 학봉의 장인은 이자경이야. 함평이씨 황해감사야, 그 당시에. 학봉 장모님이 가만 생각하니까 외손자가 천애고아란 말이야 인자 따님이 먼저 돌아가셨어. 사위보다, 그러다 사위까지 죽어불었어. 우리 집이 그때 임란 때 일곱 분이 돌아가셔. 외손자들이 불쌍해. 잘 살고 근께 데꼬 왔어.
임란이 1592년에 나. 그래가지고 금산에서 그 해 돌아가셔. 부자가. 근께 부자 상달이 똑같혀. 15대 할아버지 하고 14대 할아버지하고 제사가 똑같어.
(조사자 : 불천위 집안이잖아요?)
불천위 제사를 모셔. 계속 모시지. 지금 총리된 이낙연씨가 종손 모임을 만들어줬어. 그래가지고 내가 몇 번 참석을 해. 근디 불천위가 몇 분 계셔. 전라도에도 거의가 합쳤어. 불천위면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이 아녀. 한날로 정해갖고 합쳐 불었어. 또 어떤 집은 날을 별도로 날짜를 옮겨갖고 지내고 그러더라고. 그다음에 어떤 집은 밥에 지내잖아요. 제사를 낮 11시에 지내.
(조사자 : 선생님이 알고 계시는 불천위에 대해 설명 좀 해주세요.)
근께 불천위가 딱 옛날에는 종류가 세 가지야. 요새는 그것보고 국불천이라고 하도만, 국불천. 옛날에는 그것이 특병불천이여. 요새는 특명불천보고 국불천이라고 그래. 그다음에 향불천이라고 있어. 그다음에 사불천이여. 여그서 말한 국불천, 명불천은 임금이 줘. 그다음에 향불천위는 향교유림들이. 이분은 불천위로 해야 쓰겄다 하면 예조에서, 중앙정부에서 승인을 해줘. 근께 국불천보다 한 급이 낮은 것이지. 그 다음에 사불천위는 예조까지는 못 올라가고 아, 이 양반은 우리가 하자. 하고 또 하나 생겼어. 가불천이라고. 즈그 집에서 엄밀히 말해서 국불천, 향불천위는 구분이 어려와. 근데 경상도 안동 가믄 양반들 집합장소거든. 불천위가 거기는 사태가 났어. 만항. 거그는 90프로가 향불천위야. 퇴계 이후로. 그래서 여기 많은 국불천이여. 명불천위는 경상북도나 전라남도나 숯자차이가 얼마 없어. 근디 즈그들이 그쪽에서 막 불천위다고 하고 다녀.
(조사자 : 한 집안에 세 분이 불천위시잖아요?)
조선 500년에 삼대 서장관, 할아버지와 아들 손자 서장관은 우리 집밖에 없어. 서장관이란 것은 그때 명나라, 청나라에 소위 우리가 그 밑에 나라니까. 인사드리러 가. 그러믄 정서가 있고 부서가 있고 한데 외교사절단이여. 가서 인사드리러 가. 글믄 그 나라에서 제일 글 잘하고, 그다음에 말 잘하고, 그다음에 제일 잘 생겨야 되아. 그 신원서판이 뚜렷해야 서장관이여. 그 신원서판이라고. 그래서 삼대가 내리 서장관을 해. 그 다음에 삼대가 불천위를 동시에 받은 집은 조선 500년에 우리 집밖에 없어.
어떻게 보면 종가 집은 불행한 집이여. 저 위에 우리 동네 꼭대기에 집이 어마어마하게 컸다는 거여. 근디 1907년에 일본놈들이 불을 질러 부렀어. 의병 한다고 해가지고. 그리고 그 아드님이 내 증조부가 의병하시니까,
(조사자 : 그 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녹천 고광순, 포의사 주인
(조사자 : 아까 그 저택에 일본 놈의 의해 소실되고 요쪽으로 옮기신 거잖아요?)
불질러버리니까 딱 뭐만 남었냐. 신위만 남아 있는 거여. 옛날에 선조가 도망칠 때 묘는 못갔고 간게 신위만 갖고 가. 신위만 모시고 나왔어. 기록에 다 있어. 여기가 인자 불경설이란 소리를 많이 들었을 거여. 불량한 조선 사람, 불경설이라고 그래 일본 놈들이. 우리 집이 그 집이야. 불경설집. 한 군데 정착을 못해. 그니까 다행히 종가집이니까 여기 좀 살다가 또 요리 살다가 신위 모시고 다니면서, 여러 곳 돌아다니면서 살아. 삼지내에서 살기도 하고. 나이든 양반들은 알란가 모르겄다. 신위 갖고 다니면서 고생 했다는 거 알어. 근데 다 돌아가셔 부렀구만 이제. 그러다가 인제 못사니까 여기가 논이여. 논. 제각에 살았어. 마지막에. 지금 제작이 있어. 지금 할아버지가 살으셨느느데 제각에서

구경들 전설과 창평 경동마을 이야기
▲제보자= 고영준(남, 1939년생)
▲줄거리= 큰 정승이 아홉분 나온다 해서 벼슬 경, 아홉구를 써서 경동마을이라 이름하였고 학봉 고인후가 영의정을 받았기 때문에 경동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이야기= 경동부락이 보통, 서울경자 쓴지 알아. 근디 벼슬 경(卿)자야. 동네 우리 사람들은 그렇게 알아. 벼슬 경자여. 그 사람들이 구경들이여. 앞뜰 들 이름이. 우리 집 앞에 들이 구경들이여. 구경이 머냐? 전국에 구경한다 해서 구경, 그게 아니여. 아홉 구(九)자, 벼슬 경자여. 큰 정승이 아홉 분이 나온다는, 그래서 구경이여. 근디 그 이유가 경동에 가면은 나로선 14대 할아버지가 임란 때 돌아가셨어. 서른 둘에
(조사자 : 그 분이 누구신데요?)
학봉, 여기가 학봉 종가라 하잖아. 호가 학봉이고 휘자는 어려서 돌아가신 양반은 휘자라 해. 이름이라 안해. 휘자는 인자 후여. 그 할아버지가 정직으로 요새는 추서, 정직으로 영의정을 받으셨어. 영의정이면은 임금 다음 사람 아니여. 요샌 국무총리지. 국무총리도 아니여. 국무총리가 3번이니까. 5번인가 되아. 국가 순으로 대통령이 1번, 2번이 국회의장, 3번이 대법원장, 아무튼 국무총리가 4번인가 5번인가 되아. 선거관리위원장이 4번인가? 그건 모르겠다. 근디 영의정은 임금 바로 밑에 있어 근께 옛날 얘기가 일인지하, 한사람 밑에 만인지상이여. 영의정을 받었어. 그래서 여길 경동마을이라고 한 거여.
(조사자 : 아까 아홉 분이라고 했는데?)
이 터가 큰 벼슬이 아홉 사람 나온다고 했다. 해갖고 구경들이라고 하는 설이 있어.
(조사자 : 그 다음에 몇 분이나 더 나왔을까요?)
많이 나왔어.
(조사자 : 관직에 올라가신 분이 많이 계셨을 것 같기는 해요. 창평에서?)
바닥이 전라도 바닥이여, 바닥이. 우리가 고려 때는 왕의 사위집이여. 고가들이 왕의 사위집이니까 상당히 컸지. 조선이 개국하니까, 개국하면서 ㅤㅉㅗㅈ겨 온 거야. 다 죽여부니까. 이방원(태종) 때문에 쫓겨 왔어. 개성서 ㅤㅉㅗㅈ겨 온 것이 영광으로 오게 됐지. 그래서 바닥을 우리가 영광으로 잡어. 근디 우리 집이 사학가들은 다 알아 우리 집을
역사한 사람들은 대과라고 요즘, 고시라고 알지. 5대가 안 끊어지고 딱 했어. 딴 집은 딴데로도 우리가 훨씬 많이 나왔어. 직계로 안 끊어지고 5대가 나온 집은 우리 집밖에 없어. 조선 500년에. 그래서 경동부락이여. 아까 그 할아버지가 영의정을 받았기 때문에 경동부락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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