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24
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24
  • 자료제공=담양문화원
  • 승인 2020.12.08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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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평 당곡마을

 

 

창평 상월정 호랑이 전설

▲제보자= 고석봉(남, 1947년생)
▲줄거리= 상월정은 월봉산 중턱에 위치하며, 대자암터에 고시공부를 하는 곳으로, 상월정에 들어가는 날, 호랑이가 건들면 불합격한다 하고, 호랑이가 아무짓도 안하면 합격한다는 전설이 전한다. 창평에서 인물이 많이 나온 것이 상월정 덕분이며, 전국에서 고시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유명한 정자이다.
▲이야기= (조사자 : 상월정은 유서가 깊은 곳으로 전해져오는 이야기가 많을 것 같습니다. 상월정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해주세요.)
월봉산 중턱에 상월정이라고 있는데, 그 상월정은 고씨 문중 것입니다.
상월정은 산세가 숲이 우거져 가지고 조용하고 고요한 산 속에 있습니다.
지금은 슬로시티 옛길이 옛날에는 한 군데 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구 길이 나 있어요. 현재 등산객들이 다니고 있는 길과 차량과 같이 등산객들이 운영하는 도로가 있습니다. 그 상월정이라 함은 옛날에 고시 공부를 하는 수재들이 사시에 뭐야 공부를 헐라고 이렇게 상월정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는데 첫 날밤에 거기를 들어가면 합격을 헐 사람은 호랑이가 그 수재는 건들지 않는데, 불합격을 헐 사람은 문을 긁어, 그날 저녁에 잠을 못 이루게 만들어요. 그니까 무서워서 하산을 해버리는 그런 정도가 되고, 호랑이가 문을 긁지 않는 사람은 거기서 수재(사시)공부를 해서 출세를 했다는 그런 유래가 있어요.
글면 거기서 지금도 두 분이 거기서 학문을 쌓고 있는데, 옛날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계시겠지만, 신기하 국회의원도 상월정에서 공부를 했고, 국회의원 하시다가 안 좋은 사고로 죽었는데 그런 유래가 있어
그래서 아까 얘기 했듯이 학당을 만들어 갖고 그때 당시 거기서 공부를 한 사람들이 창평에서 가장 유명하고 명성이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무고시 행정고시 출신들이 183명이었고, 무관이 74명이 나왔다. 그런 곳인데. 인제 그 분들은 다 말살허고(퇴직이나 돌아가시고)옛날일이다. 라고 하고, 인재 고을로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제1위. 전라남도 담양 창평인디, 면 단위에서 왜 그렇게 유명허냐. 상월정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나무 유선정 이야기
▲제보자= 전용기(남, 1929년생)
▲줄거리= 유선정은 마을회관옆 정자로써 마루가 긴 대나무로 되어있어 특징적이고 신선들이 논다는 의미를 두고 있다.
▲이야기= 애초에는 한 800년 될 거요. 지은지가.(백년이 못 됐다, 그래)
어른들이 짊어지고 지어 놓은 것이다. 해서 2칸으로 쪼그마 했는디. 이 모정 집은 우리가 지은 거여. 우리들이
(조사자 : 마을 주민들이 지었어요?)그러제. 그래가지고 울력도 하고 지은 거야.
(조사자 : 동네사람들이 돈을 모았어요?)
그러제. 유선정. 노을 유(遊), 신선 선(仙해가지고 신선이 놀던 정자다, 해가지고 유선정 했어. 내가 지은 것인디, 여기서 모다 누웠다가데요.
(조사자 : 유선정 마루가 대나무로 쭉 되어 있잖아요? 어느 분 생각이었어요?)
애초에는 옛날에도 요것이었는디 중간에 와서 판자로 했어. 판자로 하다, 이 집을 지면서 이것으로 했어. 매년 간 것이 아니여. 십년 만에 갈 수도 있꼬, 오년 만에 갈수도 있고.
(조사자 : 대나무를 가공도 안했는데 오래 가나 봐요?)
그러제 목수가 했어. 이 마을에 채기동씨라고 목수가 있는디, 인자 가불고 없어.
(조사자 : 정자가 큰데 원래 몇 칸이에요?) 두 칸 이었는데 세 칸으로 늘린 거예요?)
그러제 팽야 내가 사는 데여. 저 대밭이 우리야여.
오산. 오뫼 그러거든. 뫼산(山)자, 뫼여 산 이름이. 오동나무가 있었든가 어쨌는가는 몰라도 이름이 기여. 오산이여 오동 오(梧) 뫼산, 인자 오산을 오뫼.
오강리는 그 원인도 모르고 양산, 당곡, 강촌, 오산 합쳐서 오강리여.
당곡하고 여기는 2구, 양산하고 오산은 1구 그래.
여기가 유선정, 노을 유(遊), 신선 선(仙), 정사 정(政). 신선들이 노는 곳이다.

창평 유촌마을 유래 
▲제보자= 고영준(남, 1939년생)
▲줄거리= 유촌마을은 창평에서 제일 처음 생긴 태산에서 유래하며, 언양김씨가 300년, 함평이씨가 300년, 창평고씨가 400년 이어와 1,000년의 역사를 갖는 곳이다. 고부천을 만나러 왔던 능양군이 산세를 보고 버들나무 같다하여 유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처음에는 태산부락이여, 태산부락. 모태(胎)에 태아. 무슨 자인고허니 태아자고, 태자여. 뱃속에 있는 태야. 태산부락이었는데 이것도, 설이여. 인조가 광해 다음에 인조 아니여.
인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능양군 때 여기를 오셔. 우리 동네 유촌리가 태산이었는데, 능양이 여길 오셔갖고 산세를 보니까, 버들나무 같애. 판세가 그래서 그때부터 유천리라 그랬다 그래요. 설이 그래, 유천리다.
저 웃동네 가면은 나도 밤나무 그걸 봤어. 밤나무에다가 능양이 말을 묶었다는 거야. 밤나무가 오래 못 살잖아 밤나무가. 지금부터 한 40년 전에도, 내가 요것이 기다냐 하고 끌텅을 봤어. 밤나무 끌텅이 대밭 속에가 있었어. 지금은 없애부렀더라고.
그러고 지금 우리가 진주성에 싸웠던 김천일. 역사에 많이 나오는 사람 들었지. 그분 태생지가 여그 태산이여. 다 나주로 알고 있는데 태생지가 태산이여.
(조사자 : 김천일 장군이 여기 유천리 출신이라고요?)
응. 태산이여.
(조사자 : 유천리 마을이 형성 된지가 대략 얼마나 되었을까요?)
여기는 창평서 제일 먼저 생긴 마을이 여기라고 그래요 창평서 제일 먼저 생긴 마을이 유천리라 그래. 그것은 인자 나도 잘 모르겄어.
(조사자 : 어느 성씨가 먼저 입촌하나요?)
처음에는 언양김씨 설이여. 언양김씨가 300년동안 이 터를 가지고 있었다는 거여. 그 다음에 언양김씨에서 함평이씨한테로 가. 함평이씨가 또 300년 가지고 있었다는 설이여. 설. 그때 우리가 함평이씨한테 받은 것은, 재산은 분명히 우리가 받어. 우리가 근디 400년이 넘었어. 근게 그렇게 설로 얘기하면 1,000년이 넘었제.
(조사자 : 유천리 마을은 대대로 부자로 살아왔나요?)
여기 유천리란 동네가 가난한 동네여. 그때는 저수지가 없어 . 관정이란 거는 생각도 못 헐 때여. 가뭄만 들면 농사를 못 지어. 일본시대 말 때(일제강점기 후반)여러분들은 몰라. 그런디 이회장(전 국무총리)이란 사람은 다 알아. 이회창 외갓집 큰 외숙이 김흥룡씨라고 면장을 하셨어. 일본말 때 그때 요새 말하면, 정부에서 돈을 많이 가져와갖고 저수지를 몇 군데 만들어. 그때 우리 유촌 저수지도 만들어. 김흥룡씨가. 용수리에 저수지를 만들고 그래서 소위 수로 물을 맘대로 댔어. 그때부터 여기가 먹고 사는데 편한 거여.
우리 고가들이 여기서 400년 이상 살면서, 부자는 삼천리 그 삼지내라고 그래. 거기가 부자야. 우리 만석꾼들이 계셨어. 그때는 같은 일가라도 그 집 소작농이야. 그래서 만석꾼이라고 하면은 천석이상 부터는 군이라고, 천석군. 오백석지기. 천석이라는 것은 벼를 수확한 쌀은 천가마니 한다. 그말이여. 쌀을 천가마니. 천석이라는 것은 어마어마한 거여. 만석이라 하면 만가마니 헌 게. 어마어마한 것지.

패랭이갓 만든 이야기
▲제보자= 강차남(남, 1943년생)
▲줄거리= 한 50년 전에는 마을에서 패랭이 모자를 부업으로 하여 좋은 수입원이 됐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패랭이가 대모자여. 알기 쉽게 말해서, 대모자. 근디 그 대모자 용도가 옛날에 상가 댁에서 쓰고 일반인들은 그 모자를 많이 썼겠지요. 주로 상가 댁에서 그 모자를 많이 썼어요. 그래서 대모자여. 대나무 갓이여. 여기서 부업으로 많이들 생산해갖고 우리 어렸을 때 보면은 도방으로, 그 가벼워요. 가벼운 게 그냥 백장도 그냥 한꺼번에 지고 쭉 다니고, 담양장, 창평장, 또 먼데로 갔겄지라우. 저쪽 옥과 곡성으로. 소비처에 따라서 갔겄제.
(조사자 : 패랭이는 보통 어느 계절에 많이 만들었나요?)
그건 춘하추동 상관없이 시간 나는 데로, 주로 겨울철에 많이 만들제. 시간이 많으니까
(조사자 : 어떤 대나무로 많이 만들었을까요?)
대도 인자 우리는 모르지만 그 사람들은 다 알제. 대나무가 신죽 같은 것은 힘이 없을 것이고 묵은 죽도 말하자믄 너무 뻣뻣한 것은 또 안 좋을것이고. 그사람들은 다 알제
(조사자 : 언제까지 패랭이갓을 동네에서 만들었을까요?)
한 50년 전에
(조사자 : 패랭이 만드는데 시간은 어느 정도 걸리나요?)
우리 어렸을 때 보므는 내외간에 만드는 거시기가 있어요. 그것보고 뭐라 할까? 틀이 있어. 거기가 대고 만들어요
모자형태를 만들어서 모자 만드는 틀이 있었어요. 예를 들자믄 남자는 대나무 쪼개주고 여자는 요렀게 엮어서 만들고 그렇게 했지라. 근디 그것이 수익이 좋았어요.
(조사자 : 그때 가격이 얼마정도 됐었어요?)
그런 것은 모르제. 그때 몇 백원이면
남자들은 대를 쪼개주고 여자들은 앉어서 만들고
(조사자 : 가족들이 다 같이 만들었어요? 애들도 만들었어요?)
그렇게 안되고 어른들이
(조사자 : 여기도 5일 동안 일해 갖고 5일장에 팔았겠네요?)
수집을 해 갖고, 중상이 있어요. 한 마을에서 중상이 있어. 그래 갖고 쭉 돌아감서 많이 만들어 노믄 걷어. 그래갖고 그 사람이 가벼운께 한꺼번에 짊어지고 가서 팔고 패랭이 모자 중상한 사람은 애기들을 다 갈쳤고, 그때 세상에도 그냥 앉아서 만든 사람은 별로 하고, 장사는 언제 어느 때든지 장사가 이익이 있겠죠. 지금 생각해 보믄 장사한 사람들은 다 애기들을 갈켰어. 차이가 나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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