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33-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 자료제공=담양문화원
  • 승인 2021.03.18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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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할머니 열녀문

 

창평 초여마을 이야기
▲제보자= 공기수(남, 1944년생)
▲줄거리= 마을지명이 수풀이 많아서 새너미, 새남이, 초여리, 외동리로 변천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조사자 : 이 마을은 전통적으로 초여 마을이라고 했어요. 초여 풀 초(草) 남을 여(餘)마을이다. 풀이 남는다하여 초여 마을이죠?)
그러죠.
(조사자 : 그러니까 초여 마을이라는 것이?)
풀이 많다는 말이죠. 박병선 비가 여기에서 나왔고 만요.
(조사자 : 그리고 마을 이름도 초여리라고 했네요?)
그 이전에는 새남이. 그 뜻을 잘 모르겄던디. (외동을 보고)밖에서는 새너미 놈들이라고 했어. 새너미가 풍수 지리적으로, 숲 터라고 . 숲속에 새집을 지었다고 해가지고 새집을 지은 마을이라고 해갖고 새남이라고 했어요. 근께 이 마을을 보면은 담양군에서도 이렇게 마을이 생긴 데가 없어요. 이렇게 폭 싸이고 쌓인 마을이 없어. 다 돌아 다녀도….


정문할머니 정려 이야기
▲제보자= 공기수(남, 1944년생)
▲줄거리= 임진왜란 때 길가 모퉁이에서 술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일본 놈들이 술을 팔고 있는 할머니 젓가슴을 만지면서 희롱하자, 할머니가 스스로 가슴을 도려냈다는 이야기
▲이야기= (조사자 : 초여리 려가 뭡니까?)
열녀문. 바로 학교 뒤에가 있어요. 열녀문 현판이 있어야 한디. 현판이 떨어져 나가가지고 할머니라고 해요.  현판이 떨어져 나가서 할머니 이름도 모르지 그 연대도 모르지 그래요. 정문할머니라고.
(조사자 : 정확한 연도나 그런 것들이 기록에 없어가지고 기록을 못하네요?)
기록을 못해요
오래됐지요. 어른들한테 듣기로는, 거기서 할머니가 술장사를 하고 있는디 왜놈이 젖가슴을 만지니까. 더러운 손으로 젖가슴을 만졌다고 자기가 베어내니까. 그래가지고 열녀문을 만들어줬다고 했어요. 그랬다고 들었어.
(조사자 : 임진왜란 때 왜놈이)
그랬다고 혀.
(조사자 ; 스스로 젖가슴을 베어버렸다?)
네.
그래가지고 그 친구가 대숲으로 도망을 가니까. 열녀할머니랑 같이 살던 개가 대밭 쪽으로 가서 일본 놈을 찾았다는 것이여. 그 개도 다음날 죽었다네요.
(조사자 : 그래서 열녀문 옆에가 돌무덤이 있다던데요?)
그것까지는 모르겄는데.(돌무덤이 있었데요, 땅딸막이로 넓쩍허니 있도만.)


부동촌마을 유래
▲제보자= 정해철(남, 1937년생)
▲줄거리= 해곡리가 4구역으로 얼그실, 내동, 성덕, 부동이 있는데 부동촌은 처음으로 부춘이라 불러 모정 현판에 부춘정이라고 현판도 걸려있다고 한다.
▲이야기= (조사자 : 여기부동촌은 부춘이라고 했어요?)
네 부춘이죠. 저기 시정에 가면 현판에 부춘정이라고 현판도 걸려 있습니다. 구할 구(求)자에 봄 춘(春)자를 썼어요. 마을부, 마을 동, 해서 부동춘으로 그래가지고 행정구역이 바뀌면서 해곡 3리, 해곡리가 4부락입니다. 첫 번째가 얼그실이고 내동, 성덕, 부동이 있습니다.
(조사자 : 여기가 과거에 부촌이었습니까?)
과거에는 괜찮았죠. 그런데로 열심히 살고 이 넘어에 백석꾼 유씨가 살았지요.
(조사자 : 누가 제일 잘 살았습니까?)
저짝에 함양박씨들의 세가 셌죠. 문화유씨에서 몇 백석을 했어요. 우리 친구 증조할아버지하고 우리 할아버지 정창환 요 금방 땅은 저 할아버지 땅이였죠.
(조사자 ; 6·25 해방정국에 큰 피해는 없었습니까?)
큰 피해는 없었는데 6·25때 정한담씨 동생이 군인이었어요. 우리나라 육군창설이 될 적에 경비대로 간 정한군씨하고 박종령씨가 육군 중령이나 대령으로 제대를 했어. 내가 어렸으니까 잘 기억은 안난디. 얼핏 들은 이야기인데 정한담씨가 우리 국군이 광주에 진출했다는 정보를 들으셔가지고 동생(정한군 장교)을 만나러 가셨다가 그러다가 피살을 당했어요. 마을에서는 공비들한테 시달림을 당했어요. 대전면 갈전(마을)에서 여기로 피난을 오셨어요. 여기서 시집을 가신 분 중에 정삼례인가 피난을 왔지요. 그 외에도 피난오신분도 있고 외동에서 피난 오신분도 있고 공비들이 소를 봉산지서나 창평지서로 저녁에 끌고 가서 내가 그댁에 여나므살 때 할아버지 집에서 가서 할아버지 옆에서 자고 그랬지. 아버지랑은 다 피난가시고. 크게 죽은 사람은 없고요.
(조사자 : 머슴들을 못 살게 한다던가하면 공비나 머슴들에게 찔러서 죽게 하는 경우도 있던데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그런 경우가 우리 마을에도 있었죠. 그러나 피난을 가셔버려서 피살은 안 당하고 그때는 부역을 해갖고 그랬으니까.
(조사자 : 이 마을에서는 추석 때 그네를 만들어 놓았던 데요?)
어렸을 적 기억이 당산제. 풍악놀이는 많이 하고 그네놀이 하고 지금애들도 연애를 하지만 우리 옛날 조상들도 다 담너머로 연애 했어요. 하이튼 옛날에는 정월이 들어오면 풍악, 지신 밝기 샘놀이를 하시더라고요.
(조사자 : 그럼 여기 지잣거리라는게 나오는데요?)지잣거리는 들 이름입니다. 고속도로 바로 밑에입니다.
(조사자 ; 지금 여기 동네에 몇 분이 사시네요?)
호수는 40호인데 혼자 사는 사람. 빈집. 그러니까 남자들이 일을 하시는 분은 하우스에 계시고 초등학교 다니는 애들은 4명 될랑가 몰라. 그전에는 어느 마을이고 간에 농사를 지어야 한다. 산업이 농사여. 벼농사 수확을 많이 하면 부자여.
(조사자 : 가암리는 어딥니까?)
여그, 마을이 고속도로 나면서 없어져 버렸어요. 일곱 집이나 살았는디 다 없어졌어요.
(조사자 : 해평뜰을 바다뜰이라 했네요?)
네. 여기서는 한바다 뜰이라고 했어요. 옛날에는 송강정 앞에 있습니까. 송강정 앞에서 낚시를 했다고 했어요. 그리고 면앙정에 가서도 낚시를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앞에 뜰에서 농사를 지으면 조개껍데기도 나오고 옛날에는 여기도 바다였다는 것이 입증이 된것이죠. 그러니까 한바다였다고 하잖아요. 여기서 출발하면 나주까지 뚝 터져 버렸지 않습니까.

창평 담주산성 터
▲제보자= 최영완(남, 1932년생)
▲줄거리= 마을 뒷산 담주산에 담주산성 터가 있으며, 언제 축조되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집터와 가정에서 쓴 기물 들이 발견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조사자 : 여기 뒷산이 어디입니까?)
담주산입니다. 담주산. 참 좋습니다. 담주산에 가면은 성터가 하나 있어요. 담주산성이여.
많이 올라가서 거기서 살다시피 했지. 가서 보면 좋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 안 드려도 지방 향토를 위해서 관광가치를 얘기해서라도 잘 살폈을 것인디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담주산성이거든요. 거기 들어가는데 성제라고 있어. 성에 들어간다. 그래서 신흥리 쪽으로 성벽이 쌓아진 것이 있어요.
옛날 돌로 이렇게 형태가 있어요. 고위에 가서 보면 기와 완연장이 겁나게 거기에 있어요. 집이 있었다는 거거든요. 집에나 가정에서 쓴 기물 같은 것도 모두 그전에 파와서 쓰는 것도 있고. 가져간 사람도 있고 그랬어요.
(조사자 ; 산성 안에 사람이 살았나요?)
아! 살았지. 가서보면 뚤방을 도자기로 다 했으니까 망정이지. 하기가 수월했지요. 근디 그 높은 데를 땅으로 깍아가지고 가이상 가이상으로 해서 가서 보면 집터가 있습니다. 중간에 까지도 그 주춧돌이 남아 있었는데
(조사자 : 담주산성은은 언제 만들어졌나요?)
그건 잘 모르고 금성산성에 있을 적에 그 시기 무렵에 같이 만들어졌지 않나. 아마
원래 들어오는 입구는 무정면 오봉촌, 오봉춘에서 입구가 되아 있습니다.
여거서 성을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그리가서 거기서부터 산우게로 올라가게 우영무영허니 지금도 남아 있어요.

미너미고개 도깨비
▲제보자= 김성오(남, 1942년생)
▲줄거리= 산태바우에서는 호랑이가 나타나고 미너미고개에서는 도깨비가 출몰하여 예부터 마을 사람들은 밤이 되면 가급적 그 고개를 넘어 다니지 않았다는 마을이야기가 전해져온다.
▲이야기= (조사자 : 미너미고개 밑에 내려가면 굿당들이 많이 있는데 예전에도 그랬나요?)
시방 그 집 지은지가 얼마 안 되아요. 다한 뒤로 집을 지었지.
(조사자 : 그쪽이 기가 센 곳이었나요?)
네. 옛날에는 어른들이 그랬어요. 도깨비도 보았다고. 저그 그전에 산태바우라고 요렇게(손바닥으로 평평한 바위모습을 그린다)생겼는디. 골짝에 음침한 데가 있어요. 낮에는 음침하고 저녁에는 뭐 생기고 그런디. 거기에서 하는 말이 호랭이가 나왔다는 어르신들 말씀이여. 그런데 우리도 한번 혼났어. 담양서 날이 구졌어. 늦은데다가가 혼자 걸어 온게로 거기서 불이 깜빡깜빡 써지더라고 그랬는디. 그때는 젊었을 때라 혼자 걸어왔어. 그런디 고갯길을 넘어와서도 또 그려. ‘아이고메~ 그때는 으슥하더라고.’ 그때는 인자 그 후로는 앞에서 불이 안써지더라고. 그런 뒤로는 생전 저녁에 거기를 안 걸어 다녔어.
(조사자 : 그때가 몇 살 무렵입니까?)
그때가 30살이 넘었어. 서른 두서넛 되았어. 지금으로부터 40년이 넘었제.
(조사자 : 이 마을 어르신들한테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셨나요?)
거기가 음침하다고 그런 말을 들었제. 사람하나가 희생당하기는 했지만 강도 생긴 역사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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