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35. 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 담양군민신문
  • 승인 2021.04.07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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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번째 (사진 미암사당, 대덕면 매산리 소나무)

 

 

미암 사당

미암 유희춘이 노랑골에 온 까닭

제보자= 유근영(, 1954년생)

줄거리= 미암 유희춘은 해남 출신으로 처가가 있는 노랑골에서 생활한다. 이후 양제역 벽서 사건으로 유배길에 오른다. 제주도와 함경도에서 긴 유배생활을 접고 복직되어 출사를 하게 된다. 돌아가시기 전날 까지 일기를 쓴 기록왕으로 유명하다.

이야기= 미암 유희춘의 처는 송덕봉, 이름은 송종개(種介)인데 처향으로 온 것이지. 16세기에는 처량으로 가는 풍속이 있었다 그래. 율곡 이이, 송강 정철도 그랬지. 미암과 19살 터울인 친형 취암도 그랬어. 실은 미암보다 더 훌륭한 양반이제. 취암은 과거시험 갑과에서 3등으로 합격해서 24살에 이조정랑을 지내. 취암이 기묘사화에 연류 돼서 파직을 당하여 해남 고향으로 내려와 결국 요절을 하는데 취암도 처가로 살았지. 처가가 장성인데 취암이란 마을이 있어. 미암생가는 현재 해남 해리라고 하는데 부친의 이름은 유계린이라고 하는데 그 양반이 큰아들 취암은 기묘사화에 연류 되고 작은아들 미암은 을사사화에 연류 됐지. 부친 유계린은 스승인 김굉필이 사화에 연류 돼 유배를 가니까 정계가 싫어져 숨어 지내겠다고 해서 호도 성은이여. 해남이 왜구 침입이 잦고 왜구에 의해 성은의 사위가 전사하니까 평소 자식들에게 내지로 이거하라고 해서 미암이 이곳 노랑골 당시 대곡으로 왔지. 송덕봉의 고향이고 하니까 이곳으로 온 거지. 또 홍주송씨가 이곳에 재력가 가문이었기 때문에 쉽게 올 수 있었던 거지.

미암은 양재역 벽서사건-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 대자보 비난사건때 휘말려 과연 이것을 누가 붙었겠냐, 을사사화에 연류 된 자가 붙였을 것이다. 당시 소윤에 속했던 임백령이 왕권싸움에 가담하자고 제안했는데 이에 응하지 않자 미암을 벽서사건의 가담한 자로 음해하여 유배를 당하게 되었다고 그래. 제주도로 유배를 갔다가 고향 해남과 가깝다고 하여 다시 함경북도 종성으로 다시 유배를 보낸 거여. 19년을 유배생활을 하다가 선조원년에 풀려서 정계에 진출해 가지고 선조초기 10년에 기록을 미암일기로 남긴 것이지. 미암은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지는 영남학파였지. 도덕군자들이었어. 주로 이쪽 경학쪽이 일기를 남겼어. 미암일기에 보면 이런 표현이 나와. “성군일기에 보면 또는 선영일기를 보면 눈물이 난다여기서 성군은 아버지 유계린이고 선영은 형 취암을 말하는 거지. 일기를 쓴 것이 가풍이었던 거지. 미암은 실제 노랑골에 살았던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아. 58세 때 전라도 관찰사를 지낼 당시 두세 번 휴가를 지낼 때 왔다 가거나 마지막 벼슬인 홍문관 부제학을 지내고 이곳으로 오셔서 겨울부터 봄까지 지내지. 미암은 선조에게 몸이 불편하여 보필할 수 없으니 고향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나 선조가 보내지 않다가 겨울만 지내고 봄이 되면 다시 돌아오라며 방한복과 신발을 내주었는데 그걸 싸들고 고향으로 오지. 지금도 여기 미암 박물관에 어의와 신발이 있어. 그런데 봄이 되도 미암이 안 올라오는 거여. 선조가 미암을 올라오게 하기 위하여 신하들과 상의하여 자헌대부 직함의 교지를 내렸는데 그 당시 교자를 받으면 반드시 신고를 해야 하기 때문에 미암은 별수 없이 서울로 갔는데 그때 이미 병이 깊이 든 미암은 선조로부터 궁에 들어오라는 어명이 내려지기를 우사에서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던 중에 병사를 하지. 미암은 돌아가기시 전 전날까지 일기를 썼는데 마지막에 힘이 없어 붓을 들 수가 없다고 하면서 끝을 맺어. 그때가 157764세였지.

대덕면 매산리 소나무

 

반 토막 난 대덕면 몽한각 토박 솔나무

제보자= 김용휘(, 1953년생)

줄거리= 몽한각 옆에 우뚝 솟은 큰 소나무를 토박솔나무라 불렀는데 1968년경 벼락을 맞아 반토막이 되었다. 처음에는 10그루 정도 있었는데 고사가 되고 지금은 2그루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이야기= (이재휴 : 매산리 몽한각 앞에 있는 소나무는 광복절 8·15 그 무렵에 태풍이 심하게 불었을 때 부러졌어요.)

매산리 몽한각 옆에 우뚝 솟은 큰 소나무 있죠. 그 소나무를 토박 솔나무라고 불렀어요. 1968년경에 이 소나무가 벼락을 맞아 가지고 완전히 반토막이 나 부렀어. 지금 소나무는 반 토막 짜리예요. 벼락을 안 맞았으면 대단한 소나무지. 몽한각 주위에는 어렸을 때 10여 그루가 있었는데 지금은 두 그루만 남았죠. 동원물류 자리에 있었던 소나무는 큰 소나무는 아니었어요.

 

담양군에 거주하는 전주이씨 27개 파와 토반 성씨들

제보자= 이병윤(, 1930년생)

줄거리= 담양군에 거주하는 전주이씨 27개 파 1350호와 남면 연일정씨, 대산에 광산김씨, 담양국씨, 창평 문화유씨와 절산박씨 등 토반 성씨들 이야기이다.

이야기= 양녕대군 할아버지가 12형제요. 둘째인 효령 동생은 전라북도 남원에 셋째 동생은 충령대군. 넷째는 죽은 성령대군이요. 나머지 8형제는 서손인데 운암리 상운에 경령군과 후손들이 살아요. 또 양녕대군 5대손인 추성공 이서 할아버지 큰아들 파가 상파, 둘째 아들 파가 창평 장화리에 사는 중파, 셋째 아들파가 계파인데 성공리 이인선 대부와 등갈리 경남이 아버지 이병하 집안이요.

담양군에 전주이씨는 27개 파인데 1350호가 살고 있소. 나가 종중 일을 54년을 봤소. 종중 이사장만 10년을 했어요. 젤 많이 사는 곳이 봉산면인데 100여 호가 넘고 그 다음이 무정면인데 70~80, 고서에 60호 가까이 살고, 각 읍면에 20~30호씩 살아요.

창평에는 창평고씨(장흥고씨 고경명 둘째아들 학봉 고인후 후손을 일컬음). 남면에 연일정씨, 대산 수북으로 광산김씨, 담양국씨, 창평에 문화류씨, 절산박씨(창평 유곡리 함양박씨)다 토반들이요.

 

대덕면 장산리 지명 유래

제보자= 유근영(, 1954년생)

줄거리= 미암사당이 있는 연못 뒷산이 원래 노루봉이라 노루골이 입말로 노랑골이 되면서 노랑골이 지명으로 굳어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미암사당이 있는 연못 뒷산이 원래 노루봉이요. 기록에 보면 장봉(障峰)으로 나와 노루 장()자지. 장산리 자체가 장봉 아래에 있는 마을이여. 저 아래 마을이 대산, 소산, 해서 대소산이라는 마을인데 장봉 장자와 대소산 산자를 따서 장산리라고 해. 행정명으로 대소산이 장산리 1, 장동을 장산리 2구라고 해. 우리 장동마을은 미암사당이 있는 연못 아래를 안양골이라 하고 연못 위를 노랑골이라고 불러. 원래 노루골이 입말로 노랑골이 되면서 노랑골이 지명으로 굳어버렸지.

대덕면 비차리 원효골 이야기

제보자= 정연섭(, 1956년생)

줄거리= 봉황이 금비녀를 몰고 날아오다(飛鳳釵來) 비녀를 떨어뜨린 자리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해서 비차리(飛里) 차동()이라는 마을 이름을 가졌는데 이곳은 옛날에 원효(元曉)대사가 오랫동안 머무른 원효사라는 절이 있어서 원효골이 라고 했고 그 외에 새절, 대절, 꼭지절, 장절, 향절 등 마을 지명이 모두 절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대단히 큰 절골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곳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비봉차래(飛鳳釵來). 비차리(飛里)

500년 만에 봉황이 금비녀를 물고 다시 날아온다는 뜻으로 금비녀 물고 온 봉황은 지금 살고 있는 마을 주민들로서 화합된 마음 즉 부처님 마음을 가진 주민들을 뜻하지 않을까요.

옛날 우리 마을 유래로 봤을 때는 금비녀 자리여라. 봉왕이 금비녀를 몰고 가다 떨어뜨려 만든 터여라. 특히 우리 마을 터가 지명이 전부 절터예요. 새절, 대절, 서당골, 향절, 장절, 꼭지절, 구아산, 원효사 절터. 이 지명이 전부 불교쪽에서 나온 절터가 아닌가 하는 거요. 마을 골짜기 전체를 원효골이라 하고요 마을에 저수지 두 개가 있는데 하는 원효재라는 저수지고, 또 하나는 비차재라는 저수지가 있어요.

웃대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말은 이곳에 분명히 절이 많이 있었다. 빈대 때문에 절이 나갔다. 이런 말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는 물이 적어서 절이 없어진 것 아닌가 그렇게도 생각합니다. 우리가 관정을 파 보는데 물이 안나와요. 암바위 쎈 돌이 걸려갖고 안 나오드라고. 물이 좀 부족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절이라는 데는 물이 많아야 융성해질 텐데 물 땜에 그라지 않냐 하는 것입니다.

한문으로도 원효 대사의 원효를 그대로 쓰기 때문에 원효대사가 아마 그때 당시에 위치적으로 봤을 때도 경치가 좋고 하니까 우리 시골에다가 절터를 잡지 않았나. 우리가 10~12살 묵었을 때 매봉산에 많이 갔는데 그 밑에가 원효사 절터가 있었어요

절터는 별로 안 큰데 그때 보믄 주춧돌도 있고, 샘도 있었어요. 샘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던 기억이 나요. 우리 할머니 말도 큰 스님이 우리 마을에 오셨다.”는 말을 늘 했어요. 또 마을 여기저기 절터에 가 보면 간혹 옛날 흘기와가 하나씩 나오는데 유래상 원효대사가 다녀간 후에 원효대사를 좋아하던 스님들이 많이 오지 않았나. 원효골 지명도 그렇지. 절터 지명도 그렇지. 그렇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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