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36-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 담양군민신문
  • 승인 2021.04.20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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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계정
팔학마을 뒷산 봉우리

 

대덕 미암사당 건립과 미암일기 간행본

제보자= 유근영(, 1954년생)

줄거리= 미암사당은 1579년 짓기 시작하여 1608년 지붕기와를 사용했다는 자료를 보면 10년 정도의 건축이 이루어진 것 같다.

이야기= 미암사당은 1579년에 초창을 하였는데 목수 중() 김창준이라고 씌여 있고 1608년에 추월산 진경사에서 구운 기와로 번와를 했다는 기록이 대들보에 남아 있는데 공양주는 도호 기와를 구운 스님은 지석스님이라고 씌여 있어. 추월산에 가막골이 있는데 그것은 기와구운 가마터가 있기 때문이고 미암사당 번와 기와를 추월산 진경사에서 구웠다는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지. 미암일기는 초본 원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한자로 되어 있어서 해독이 어렵고 하여 초선 총독부가 조선의 기록물중에 일본어 활판본으로 인쇄할 열가지중 하나로 미암일기가 지정되어 일본어 활판본이 있고 그것을 많이 봤는데 92년에 담양 향토문화연구회에서 일본판을 한글로 번역한 후 그 후에 한자를 가로로 처리한 윤문번역본을 간행하였는데 적은 양을 간행하여 남아 있지가 않아

 

미암일기에 전해지는 선조이야기

제보자= 유근영(, 1954년생)

줄거리= 선조가 초년에는 미암 우희춘에게 많이 의지하고 도움을 요청했던 것 같다.

이야기= 원래실록은 사관에 사초, 승정원일기, 비변사 기록 등을 보고 쓰는데 선조실록은 임진왜란 때문에 사료가 다 소실돼서 개인의 일기를 수집하여 실록을 썼다고 해요.

선조원년부터 10년의 실록은 미암일기를 보고 썻는데 99% 미암일기가 선조실록이여. 실록을 쓰고 난 후 일기는 다 없애는데 이 미암일기는 돌려줬다고 그래. 미암일기를 우리 집안에서 찾은 것이 아니고 백광훈이라는 인물의 후손 집에서 보관하고 있던 것을 찾아왔지. 백광훈이라는 사람은 선조시대 인물로 미암의 제자였던 것 같아. 미암일기를 보니까 선조 초년에는 선조가 판닥력이 있고 지조가 있었던 것 같아요. 암 유희춘이 홍문학 부제학으로 옥당에서 경연을 펼쳤는데 경연 중 미암과 선조와의 대화한 대목에 이런 말이 나와.

미암이 기묘사화로 역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았는데 조광조를 복권시키기 위하여 문묘에 배향할 것을 건의 하였는데 선조가 빨리 결정을 내리지 못해. 미암일기를 보면 선조는 그 이후로 어쨌든 조광조가 반역을 해서 그렇게 되었는데 문묘에 배향하게 되면 선대의 왕인 중종이 잘못한 것으로 인정한 꼴이 되지 않겠는냐, 그래서 그렇게 결정한 것은 나로서는 효가 아니다, 라는 이유로 그 결정을 미루는 내용이 나와. 그래서 선조 초년에는 선조의 판단력이 좋지 않았느냐. 라는 생각을 한다는 거지. 또한 허균이 미암 사후에 이곳 노랑골로 왔다가 무등산에서 미암행장을 쓰는데 거기에 보면 또 이런 말이 나와. 선조가 초년에 선정을 베풀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유희춘의 가르침 또는 보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말로 미루어봐서 선조 초년에는 선조가 판단력이 좋았다. 이렇게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싶어.

 

대덕면 시목마을 형성 이야기

제보자= 김행규(, 1942년생)

줄거리= 감시(), 나무목()자를 써서 시목이라고 한다. 시목마을은 400년 정도 되었으며 서출동해수라 해서 좋은 터인 것을 알고 조선시대 단종 때 수양대군의 화를 입고 낙향한 대촌 김문규 후손들이다.

이야기= 왜 시목인가. 감시(), 나무목()자를 써. 그런데 단감나무 심은 지가 35~6년 밖에 안되었어. 그 전에는 감나무가 없었어. 옛날 어른들이 참 대단혀. 여기가 감나무가 될지를 어찌 알고 감 시()자를 써놨는지 모르겄네. 안 그런가? 우리 마을 생긴 지는 한 400년 되었다고 그래. 단종 때 경상도에서 피신 온 사람들이여. 금녕 김가들인데 김영삼, 김재규 한집안이여. 맨 처음 시목에 터 잡은 사람들은 김가들이여. 우리 선조 이름은 김문규, 호는 대촌인데 수양대군이 단종을 밀어내자 수양대군을 밀어내려고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과 모사를 했는데 한명회가 고자질을 해부러 가지고 노량진에서 사형을 다 당했어. 소 한 마리가 사지를 찢어버리는 형벌을 당했다고만. 그때 대촌공이 노량진에 가면 제일 어른이라고 해서 제일 위에다가 묘를 썻어. 노량진 제사는 나라에서 지내는데 절만 하고 오지요. 피신온 사람들은 서당 공부도 못하고 낯장 내놓고 살지도 못했어. 100호 중에 70호 정도가 김가들이었는데 똑똑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여기 시목이 어째서 피난처냐 하면 옛말에 담양으로 내려가면 서출 동류수가 있는곳이 피난 터다. 여기 시목 서쪽에서 물이 나서 동쪽 무정으로 흘러가서 무정에서 다시 영산강으로 흘러가죠. 뒷산은 금산이고 앞산은 마을을 맨들라고 돌아들어온 산인디, 백아산에서 온 산이여. 무정면 오례에서 마무리 되지. 앞산이 마을을 감고 돌아가는 형국의 산이여.

 

팔학 지명과 배출된 학자들

제보자= 이재휴(, 1936년생)

줄거리= 마을 뒷산 봉우리가 8개가 있다. 두루미 학()자에서 배울 학()자로 변경하면서 마을에 의사를 비롯해 기자, 교장, 교감 등 학자들이 많이 배출된 마을이다.

이야기= 팔학 마을은 옛날에는 팔학동 마을이라고 했어요. 행정명은 운암리 3구입니다. 왜 팔학이라고 불렀는가. 뒷산 봉우리가 8개여. 이 동네가 남향으로 앉았거든. 마을이 소쿠리 알죠. 남향으로 벌리고 앉아 있어. 학이 날려고 하는 자세 또는 학이 알을 품고 있는 자세예요.

(김용휘 : 제가 10살 정도에 우리 할아부지에게 들은 것은 우리 팔학 마을에서 8분의 학자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직접 들었어요. 우리 할아부지는 일제 때 면장을 하신 김, 창자, 호자 김창호 어른입니다.)

새와 인간깅 공생을 하는 것은 자연현상이지만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중요한 일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서 학학()자를 배울 학()자로 바꿨다고 합니다. 김창호 면장님의 김해김씨 조카 되는 김정두 면장께서 바꿨다고 합니다. 면지에 보면 배울 학자로 나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어른들이 선견지명이 있는 거요.

김창호 면장님의 종손이 김용만인데 전대 의대를 나와 가지고 미국 뉴욕(운암리 하운마을 김병곤 어른증언. 중간에 한 번 나와서 만났을 때 뉴욕에서 의사를 하고 있다고 들음)에서 의사를 하고 있어요. 나하고 동갑이요. 팔십 둘. 또 김해김씨 후손 중에 KBS기자가 있었는데 김승두라고 LA특파원을 했어요. 또 나도 교장이지만 내동생 둘이도 교장이요. 나는 광주동신여고 교장, 동생은 광주서강고 교장, 밑에 동생은 여수에서 초등학교 교장을 했어요. 또 무안 무학고에서 교감으로 있는 사람이 있어. 박태선이여. 이러믄 7~8명 안 돼요. 동네에 배울 학자를 잘 안 쓰는데 아무튼 이 마을이 대덕에서 가장 유명한 마을이 되었어요.

 

창평 월봉산 광산이야기

제보자= 김병곤(, 1932년생)

줄거리= 일제 강점기 때 월봉산 광산에서 납과 구리가 나왔다고 한다. 그 깊이가 30미터 정도 된다고 한다. 이후 월봉산에 정상호씨가 오동나무를 많이 식재했으나 망했다 한다.

이야기= 우리 마을 건너편에 월봉산이 있어요. 월봉산에 납하고 구리가 나와요. 광산이 있어요. 그런데 거기 손만 대면 난리가 나요. 일정 때 일본 놈이 개발했는데 2차 대전 그 대동아전쟁 후에 망하고 일본 놈들 들어갔죠. 그 후에 또 손을 댔는데 6·25가 났어. 그 후에는 누가 금광을 하려고 하믄 마을에서 절대 못하게 해요. 지금 가보면 깊은 굴이 30m 깊이의 굴이 있어요.

가수 금호동(이름이 서모)이 그 월봉산을 사서 오동나무를 많이 심었어요. 그후 1970년도에 정성호라는 분이 대대적으로 오동나무를 심었어요. 그 양반 거기서 죽었어. 그런데 어디에서 죽은 지도 모르고 있다가 1년 후 오동나무 밭에서 시체를 찾았어요. 이 냥반 충장로에서 태화고무상사를 했어. 선견지명이라 할까. 앞을 내다본다고 할까. 이 양반이 앞으로 포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 당시에는 오동나무 포장이 최상품이라 오동나무를 심은 거야. 여기다 돈 엄청 꼴아 박았어. 종이포장이 나와서 망했어. 시대를 잘 못 읽은 거지.

 

만 명을 품어 만 명을 살렸다는 만덕산

제보자= 이재휴(, 1936년생)

줄거리= 임진왜란 때 만덕산으로 피난하여 살 수 있었던 곳이 만덕산이다.

이야기= 요 위에 만덕산이 555고지예요. 운산마을 분들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옛날 임진왜란 때 저 산에 사람이 들어가 살면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만 명을 품고 만 명을 살렸다고 해서 만덕산이라고 불렀답니다. 사람을 딱 껴안고 차마 밑으로 넣어 부러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만덕산은 주로 이쪽에서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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