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46
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46
  • 담양군민신문
  • 승인 2021.07.28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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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면 외천마을 유래
▲제보자= 임기태(남, 1936년생)
▲줄거리= 원천리는 원래 지금보다 위쪽에 터를 잡았으나 샘물을 올려 먹으면 안 된다 해서 마을을 샘 아래로 옮겼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시암은 거시기 해 가지고 옛날엔 이 마을이 저 우게 대밭 위에가 마을이 되았어요. 어른들 말씀 들어보면…그러면 거그서 마을이 있다가 이 시암물이 원치 좋고 거시기 헌 게 어른들이 시암물을 올려 묵으면 안 된다 해서 마을을 내렸다는 거여.
저 산 위에가 본래는 동네가 있는데, 인자 지금 샘이 제일 위에가 있거든요.
그 마을을 밑으로 형성을 시켰다 이말이구만, 밑으로 이사를 왔다 이 말이여. 전부 내렸어요. 위에를 다 철거해 부리고…
근게 옛날에는 시암골. 여기가 전체가 샘골이에요. 그라고 그 물로 해서 샘골이라고 옛날엔 이 마을 이름을 지었어요.
여기가 샘골 어째서 샘골이냐? 땅만 파면 물이 나온 거여, 여그는 아무데나 물을 딱 파면 물이나요. 그러고 수렁이골이여. 수렁이 생겨서 자동으로 물이 올라와요. 글고 다른 데는 농사를 못 지어도 여그는 물이 많했기 때문에 옛날에 전기도 안 들어오고 했을 때 여기는 농사를 지었어. 근게 샘골이라 그래서 샘이 논마다 샘이 있어요. 엄청 많해 샘이., 샘 짚이가 십미터 넘을 거여. 나온데가 있고 안 나온데가 있고 그러잖아요. 요 앞에만 나가도 물이 안 나와 부러요. 근데 여기는 어째서 그런지 몰라도 땅만 파면 나와요.

금성면 석현마을 유래
▲제보자= 신영길(남, 1941년생)
▲줄거리= 석현마을은 금성면 소재지가 있었던 큰 마을이었다. 옛날에는 영산강 물길이 마을 쪽으로 되질러 갔다고 해서 석현마을로 불리었으며, 담양댐 막기 전에는 큰물이 다리 밑까지 차곤 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옛날에는 여기 하천이 제방이 안 되어있고 물이 그냥 자연그대로 갔다가 흘러 내려오고 하면서 마을 쪽으로 갔다가 물이 되질러 부렀어요. 그래가지고 거기서 요리 돌아서 나갔어.  그러다 보니까 돌석(石)자 고개 현(峴)자 그래서 석현리로 마을 이름을 짓게 됐고, 그 뒤로는 하천 제방이 되어서 바로 그 옛날에 흔적을 찾아보기가 좀 힘들 정도여. 그때게는 물이 흐르고 싶은 대로 자연 그대로만 굽이치면서 흘렀잖아요. 그런데 인자는 직선으로 잡고 약간 인자 돌아서 나가도록 되아 놔서 옛날의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그 때에도 여기 소재지 마을이고 하니까 옛날부터도 마을이 상당히 크거든요. 아마 백 여호 이상 살았을 것으로 봐요. 근데 인자 이 마을은 다른 바우가 발파적으로 있기 때문에 여기 큰물이. 영산강 상류가 돼가지고 물이 엄청나게 나와 부러. 지금 담양댐 있으니까 그러제. 그때게는 아무튼 여기 다리 밑에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 보며는 큰 비가 200미리 약 300미리 와분다 글므는 다리 밑에까지 차 부러요. 그렇게 물이 많이 나와 부렀어요. 그랬는데 근래에 와서는 댐을 막아부리고 그러니깐 그런 건 내려오질 안하고 있죠.

금성면 무너미고개와 호미등
▲제보자= 조일원(남, 1945년생)
▲줄거리= 물이 언젠가는 넘는다해서 무너미 고개라고 불렀는데 담양댐 수로를 내서 물이 흘러 물이 넘오오고 있고, 마을 호미등에는 일제가 철로를 놔서 호랑이 꼬리를 잘라버리는 바람에 석현리 운세가 안좋아졌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이야기= 무너미고개는 마을 어르신들한테 들어서 아는데 어르신들 말이 요리 물이 넘어간다 해서 무너미 고개라 했다요. 물이 언젠가는 넘어간다고… 지금 현재 와서는 그 말이 맞었어. 담양댐을 막으니까 자동적으로 물이 요리 흘러 수로를 냈기 때문에 지금 흐르고 있어. 동네 앞으로 쭉 가믄 수막이 있어요. 좌측에. 동네 끄터리 가믄 수막이 있어요.
(조사자 : 네, 저 앞에요. 근데 저 산 이름이 뭔가요?)
마을에서는 머라 하냐믄 호랭이 상호래요. 저 짝애가 머리. 요 짝에가 꼬리. 철로가 산 밑으로 났거든요. 꼬리를 잘라불었다 그 말이여. 철로가, 근께 왜정 때 철로가 났제. 석현리가 어째서 안 좋냐 그러며는 호랭이 꼬리를 잘라 불었다 그말이여. 어르신들 말씀을 들어보믄 그래요.

금성면 무림동 서당이야기
▲제보자= 김순규(남, 1938년생)
▲줄거리= 마을에서 선생님을 모셔와서 돌아가면서 한문공부를 하고 대접을 하였으며, 공부를 한단계 마칠 때마다 부모 앞에서 시헌을 보고 하격하면 시루떡을 해서 나눠먹었던 마을 서당이야기이다.
▲이야기= 저도 어렸을 때 쪼그만할 땐디 나보다 더 나이 잡순 양반들 있잖아요. 거 분들이 제일 처음 추구를 배웁니다. 추구, 사자소학, 그 다음에 가서 천자, 이렇게 나가갖고 명심보감, 그 우게로 올라가갖고 소학 대학 이렇게 하는데 선생님을 동네다 모셔놓고 우리 배우는 학생들 집에서 열흘이면 열흘, 보름이면 보름, 선생님 식사를 대접해 가면서 돌려감서 한 집이서 쭉 헌 것이 아니라 1년을 헐라하믄 돌려감서 해야 헐거 아녀? 돌려감서 쭉 허고 선생님 모셔 오는데 그 전에는 나락으로 하는데 학비를 줘야 될 거 아녀. 나락으로 몇 섬, 이렇게 처음에 딱 결정해서 와 갖고 그렇게 한문을 배왔지요.
저도 다닐 때 보므는 열 명인가 열 한명인가 했는디 지금은 일주일 잡고 못 잡고 허는디 그 전에는 장치기로 잡거든, 글믄 여기는 2, 5장인디 닷새 썩이지요?닷새씩 돌아감서 선생님 식사를 대접했지요. 그리고 선생님 성함은 다 까묵어 버렸어요.
무림동 마을 서당이 처음엔 저 우게가 김 복수씨댁이라고 거기 있었구요. 나중에는 장 윤근씨 댁에도 있었고, 김성모씨 댁에도 그렇게 있었어요. 그렇게 있으면서 공부를, 소학교를 졸업하고 한문을 쭉 배왔지요. 열세살, 열네살 그렇게 되지요. 그 뒤에부터 한문을 쭉 배우고 보통 3년 내지, 나이 잡순 양반들은 한 2년 배우고 우리 같이 나이 적은 사람들은 한 3년간 배우고…
(조사자 : 3년 배우고 더 높은 학교는 어디로 가요?)
거기서 몇 명 안 되지마는 늦게나마 눈을 뜨기 위해서 담양중학교를 갔었제. 담양중학교 가고 그 다음에 고등학교 간사람, 광주로 나간 사람, 그래서 우리 마을도 광고, 일고, 서고, 그렇게 다니고 대학교는 전대, 전대법과 출신들이 두분, 그 앞에 고려대학교 댕긴 분이 한분 계셔. 서울 가서 박종섭씨라고, 우수허니 졸업하고 6·25때 귀향을 해 가지고 집으로 오셨제. 그래갖고 집에 계시다 사회에 진출하시고…
(조사자 : 선생님은 한 분이 왔나요 돌아가면서 왔나요?)
다 틀리지요. 아까 김 복수 씨 댁에서 갈킨 분도 틀리고, 장 윤근씨 댁에서 갈킨 분도 틀리고, 김 성모씨 집에서 갈킨 분도 틀리고 다 틀려요. 주로 그 분들이 어서 왔는 고는 저 팔덕, 전라북도 쪽에서 많이 왔어요.
(조사자 : 공부가 마무리 되면 떡이라도 했나요?)
예를 들어서 제일 처음 추구를 배웁니다. 추구 한문을 딱 배우면 선생님들이고 학부모들이 다 배았다 하믄 와서 딱 안겄스므는 쭉 외아야 해. 인자, 쭉 외우고 그 다음에 선생님이 무슨 자하고 예를 들어 배울 학 하므는 배울 학자를 쓰고 받아쓰기를 쭉 해요. 그래서 합격하믄 떡을 한 시루씩 했어요. 그때는 술이 있었는가 없었는가는 잘 모르겄습니다마는 떡 한 시루씩 해 갖고 그때만 해도 떡 한 시루면 굉장히 귀헌 음식이었어요. 떡 한 시루 해 갖고 먹고 그랬어요. 시루떡, 그전에는 시루떡이제. 시루떡은 팥, 팥을 많이 넣제. 한 두름하고 그 다음에 팥 넣고, 또 한 두름하고 팥 넣고 해야 딱 안 붙으잖아요. 그래서 들금들금해서 한 밑둘금으로 해서 책 띨 때 마다 추구 띠믄 추구, 학어지 띠믄 학어지, 천자 띠믄 천자, 명심보감 띠믄 또 명심보감, 고 우게로 올라가서 소학, 대학, 이렇게 띤 사람들은 다 띨 때 마당 아까 그렇게 다 학부모들 모셔놓고 다 외우고 받아쓰기 하고 합격하면 졸업했다 해서 떡시루해서 먹고…
내가 알기론 열네 살, 3년 5년 했은 께 횟수는 잘 모르는데 내가 한 열일곱 살이나 되았을까? 그때가장 하고 그 나중에 학생들은 외부로 많이 나갔어요. 원율리로 나가고, 용면 원천리가 있고, 삼만리가 있어요. 우리 밑에 사람들은 동네에다 안 앉히고 삼만리까장 나가고 그러다 중간에 한번은 김정안씨 집이라고 서당을 한 2년 그 집서도 했어요. 그 뒤에는 폐사가 되어 부렀제 인자, 인자 한문공부는 그만하자, 중학교나 이런 데로 뛰자 해 갖고 그 때로 하고 종쳤죠.

꼭두마리 집 이야기
▲제보자= 정선조(남, 1935년생)
▲줄거리= 금성산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마을에서 의병들이 곡식을 시주할 것을 피하기위해 집을 작게 보이기 하는 꼭두마리 집을 지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꼭두마리 집은 기역자 식으로 지어놓으면 작게 보여. 금성산성서 이렇게 쳐다보고 큰집으로 보이면 와서 떨어가. 의병시절에. 저녁에.
옛날 의병시절에 산성서 살잖아. 의병. 성 쌓아놓고 살잖아. 의병들이 떨어간다고…그런디 워낙 묵을 것이 없으니까 시주한 것이여. 그때는 전화도 없고, 그저 쳐다보고 큰 집을 떨어갔지. 도림리가 주로 많았거든.. 도림리가 질로 많았어. 산성리도 그랬고. 이 마을도 한 열챈가 되었어. 많이 있었어. 그래서 길게 지으면 커보이니까 작게 보이게 할라구 그렇게 지었다 그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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