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48
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48
  • 자료제공=담양문화원
  • 승인 2021.08.27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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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면 봉곡마을 버드나무 숲

금성면 봉곡마을 유래

제보자= 김영권), 1947년생)

줄거리= 원율현이 폐현되기 전에 봉곡마을에 향교 대성전이 있어서 대성리라고 했다고 하며, 앞산이 벌 형국이라 버실이라고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이 마을이 향교마을이었어요. 원율현이 폐현되기 전에 봉곡마을에 향교 대성전이 있어서 대성리라고 했다고 어른들이 그래요. 앞산이 벌 형국이라 버실이라고 했다고 해요. 고려 경종 때 980년경 청주 한씨 등이 개척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1914년부터 금성면 대성리 봉곡마을로 불리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때 한봉도 했습니다만 1980년대 전후 부업으로 싸리제품 채반을 많이 생산하는 마을로 유명했습니다. 지금은 딸기 등 작물 재배에 주력하여 소득을 올리고 있습니다.

(조사자 : 왕버드나무 심어진 유래를 좀 말해주세요.)

(임영자 : 나 시집오니까 심어져 있드라구요. 자꾸 어르신들이 하는 말이 알바우, 알바우 하더라고요. 어르신들이 말씀하시기를 그 바위 때문에 바람난 사람들이 많았대요. 그래서 그 바위가 안 보이게 하기 위해서 심었다고 하더라고 그러더라구요.)

(조사자 : 그럼 그 바위를 심고 나서 그런 일이 없었대요?)

(임영자 : 나 시집와서 50년이 지났는데 그런 일 없었어요.)

(조사자 : 그럼 왕버드나무 심은 효력이 있었네요?)

(임영자 : 몰라요. 그래서 그런가~(웃음))

 

금성면 오평마을 지형전설

제보자= 윤송천(, 1940년생)

줄거리= 오평마을은 자라가 알을 까놓고 바라보고 있는 형국으로 마을 동산을 자라등이라 하며, 마을 방죽에 항상 물이 고여 있어야 한다는 전설이 내려왔다고 한다.

이야기= 오평이라는 마을 이름은 한자로 자라 오(), 들 평(), 마을리자 이렇게 해서 오평리라 했는데, 유래를 옛날 어르신들한테 들어보며는 마을이 형성 되아갖고 있는 집터를 자라알, 자라가 알을 까놓고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오평마을은 동산이 있는데 저 숲속형으로 마을회관서 약 150메타, 200메카 이 정도에 동산 있는데 그 밑에는 방죽이 있어요.

동산을 자라등이라고 얘기를 하고 그 방죽에 자라가 살고 있는 물이 없으며는, 마을이 좀 가난하게 산다. 옛날 말로 가난하게 산께 방죽의 물은 항시 고여 있어야 한다. 그런 전설이 있었어요. 그래가지고 오평리라고 이렇게 부른대요.

 

담양향교 옛터 이야기

제보자= 정선조(, 1935년생)

줄거리= 담양향교 옛터가 남아 있는 산을 제보자가 사서 명당자리라고 소문이 나서 찾으려고 풍수를 데리고 가도 보고 그랬는데 아직 못 찾았다고 한다. 옛 향교 건물은 담양전씨 전녹생이 회사한 현재 담양향교 자리로 뜯어가 옮겼다고 한다.

이야기= 저기가 담양 장.(손가락으로 멀리 터를 가리키면서)여기가 담양향교. 향교 산을 내가 샀거든. 신사당 맹이로 으리아리하게 집이 지어졌었어. 그전에 향교에 다닐라믄 최하가 논 서마지기, 닷 마지기 열 마지기는 내야 다녔어. 밭 전()자 전씨가(담양전씨 전녹생) 담양읍의 땅이 있다고 희사를 했어. 그것을 뜯어다가 그래서 죽녹원 근처로 향교가 옮겨갔어.

(조사자 : 옮겨간 게 얼마나 된 거에요?)

옮겨 간 지가 백 한 구십년 되었을 거야.

(조사자 : 그러면 1,900년 전에는 여기가 굉장히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나요?)향교가 있을 정도면?)

그러제. 저기 산이 명당자리라고 소문이 나서, 책자에 나왔어. 내가 명당자리를 찾을라고 풍수를 데리고 가도 보고 그랬는디 못 찾았어.

(조사자 : 선생님이 산 산 이름이 뭐에요?)

이름은 없어. 향교만 거가 있었다는 것만 알제. 기왓장이 사각으로 다음어져가지고 아직도 뜨어간 자리가 있어.

 

금성면 정각마을 신선바위 전설

제보자= 정성조(, 1933년생)

줄거리= 정각마을 신선바위는 애기바위라고도 하는데 바위가 걸어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아낙네가 깜짝 놀라서 워메 뭔 바위가 걸어온다냐?”라고 말해버리니까, 바위가 걸음을 멈춰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신전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는디 아이를 갖지 못한 여자들은 이 바위 앞에 아이 갖기를 빌면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애기바위라고도 하는디 입을 꽉 다물고 빌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는 알 바위가 걸어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아낙네가 깜짝 놀라서 워메 뭔 바위가 걸어온다냐?”라고 말해버리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온 산이 흔들리면서 바위가 걸음을 멈춰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도 갖지 못하게 되버렸습니다. 그 바위가 대성리까지 왔으면 대성리가 서울이 되었을텐디 거기서 멈춰서 마을이 발전을 못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금성면 대성리 무너미 고개 전설

제보자= 김정태()

줄거리= 무너미 고개로 물이 넘어가야 대성리 마을이 잘 살 수 있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담양호가 생기면서 그 산고개도 경지정리로 논으로 변했고 그 고개로 배수로가 생겨 현마을이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우리 마을이 그전에 요렇게 들도 좋고 요런디 물이 귀혀. 물이 귀해갖고 벼농사를 제대로 못해요. 그런게 인자 무넘이 고개로 물이 넘어가야 우리 대성리가 부자로 밥묵고 부자로 산다. 고렇게 전설이그래갔고 인자 말허 자면 땜이 안 생겼습니까?

그래갔고 무넘이 고개가 그전에 산이 있어요. 그런게 산고갠디 그 무넘이 고개가 없어져 부렸어. 지금 밀어갔고 논 돼야 부렀어 말하자면그래갔고 우리 대성리 동네도 현재 딸기를 해갔고 참 부자 마을이 되았다. 이렇게 말하자면 고렇게 말이 있어요.

긍게 언제든지 그전 어르신들이 말씀 허시기를 무넘이 고개로 물이 넘어가야 우리 대성리가 부자로 밥먹게 산다. 그런디 현재 그렇게 돼야 그렇게 되았어요. 넘어가 부렀어 물이 넘어가고 있잖아요. 부자는 안 되았어도 밥은 묵고 산다. 그 전에보다 밥 묵고 산다 그말이제.

 

금성면 원율마을 유래

제보자= 송금표(, 1944년생)

줄거리= 원율리는 전북 남원부에 속했으며, 금성면에서 석현리 다음으로 큰 마을로 근방 일대에서 가장 늦게까지 한문서당이 열린 곳이다. 밤나무가 많은 언덕이 있다하여 원율리라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이 마을이 전라북도하고 한 마을이었어. 그래가지고 또 학교도 원율 리가 있었어. 학교 이름이 인자 이름도 잊어 부렀네. 거기 학교도 원율 가서 있었고, 원율이 소재지가 되었고, 남원으로 속한 남원고을, 그래가지고 학교도 모다 다니고, 일제까지도 서당, 학문 배운 서당이 금성면서 제일 늦게까정 오래 지속이 되었어. 그래가꼬 금성면서 관내에서 다 각 마을에서 한문을 배울라며는 원율로 와 다. 지금 군청이고 어디고 근무하고, 정년퇴직하고 조합장 정년해서 뭣 허고 헌 사람들도 다 우리 마을에 와서 한문을 배와.

원률리는 저 야기(이야기)가 언덕이 있어가지고 어덕원()자 원율, 글고 밤이 여그가 들판이 전부 밤나무이고, 우리 어렸을 때도 싹 또 밤나무여. 밤 율()자 그랴꼬 원율 리가 그렇게 이름이 지어졌어. 어덕 원자 하고 밤 율자하고

요부락(석현리)빼고는 지금 소재지 제일 요 부락이 커져서 요 부락 빼고는 둘째번으로 일단 크제. 모냐는 100호가 넘게 살았는데, 지금은 많이 이사 가 불고 뜯어 불고 뭣 허고 해가지고 70호나 80호 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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