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정구선씨

밀알과 함께 살아온 청년 정구선씨 “백성이 깨야 나라가 삽니다” 광주 본부 밀알회 창립 주도하고 한평생 환경을 지키고 봉사하고… “베풀지도 못했는데 착하게나 살아야지요” ‘鄭求宣→鄭求善’ 이름

2009-03-10     마스터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말이 있다. 사람의 수명이 길지 않았던 그 옛날 일흔 살을 넘기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인생 칠십은 매우 드문 일(人生七十古來稀)이라고 했다. 요즘은 나이 칠십은 보통이다. 그리고 사람의 건강상태가 대체적으로 좋아졌다. 그렇지만 칠십 나이는 어쩔 수 없는 노년이다. 그런데 올해 일흔 한 살인 정구선 씨에게는 ‘청년(靑年)’이라는 표현이 아주 적절할 것 같다.

정씨는 참으로 많은 일을 했다. 다시 말해서 수많은 직업을 바꾸면서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그의 일관된 삶은 ‘밀알’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른바 광주 명문중학교와 고등학교 출신이다. 당시 그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서울대에 진학을 많이 했다. 그런데 그는 전남대학교 농대 임학과를 졸업했다. 이 점에 대해서 그는 고등학교 다닐 때 공부를 소홀히 했다고 실토한다.


정씨는 농대생을 주축으로 ‘밀알’ 모임을 갖게 된다. 각자가 거듭나서 세상을 위한 밀알이 되고 대학을 졸업하면 농촌으로 돌아가자는 다짐을 했다. 여름방학이면 농촌봉사활동도 폈다. ‘농촌봉사활동’이라는 말은 밀알이 처음 사용한 말이라고 한다.
대학 졸업 후 농촌지도소 공무원이 된다. 농촌으로 돌아가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새로운 정부기관 산림청이 생기면서 군청 산림과로 옮긴다. 이때는 ‘산감’들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이다. 죄 없는 서민들을 닦달하는 일이 싫어 사표를 쓴다.


퇴직 후 ‘밀알화원’을 개업한다. 이때 세사람이 동업을 했는데 별 재미도 못보고 화원 일을 그만 둔다. 그 일을 그만 두고 나자 모 병원 원장의 요청으로 ‘산지농업연구소’라는 사무실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전라남도기업축산협회(전남낙농협회 전신)’를 발족하고 간사로 일하게 된다. 기업축산협회 간사의 일을 맡고 있는데 당시 광주 YMCA 총무였던 김천배 선생으로부터 YMCA 일을 같이 하자는 제의를 받는다. 김천배 선생은 그 당시 한국 YMCA의 가장 뛰어난 이론가였다.


정씨는 밀알운동을 세계화하겠다는 구상도 했다. 그러면서 1969년 3월 1일 ‘광주밀알회’를 창립하고, 순천, 광양, 보성, 완도 등 지역 밀알도 창립했다. 그리고 1972년 밀알중앙회가 결성되는데 본부를 광주에 두었다. 모든 단체의 중앙회가 서울에 모여 있는데 밀알회는 그 본부를 광주에 두었던 것이다.


정씨는 신협을 태동하는데도 앞장선다. 1971년 6월 28일, 광주 YMCA, 광주 YWCA, 밀알회 등 세개의 신협이 창립된다. 세개의 신협이 같은 날 창립된 것은 대한민국 신협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당시 밀알회 신협 출자금은 2,800원이었다.

정씨의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를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1972년 고교 1년 선배인 심상우씨의 식품회사 근무. 1973년부터 1976년까지 전남매일 광고국장으로 근무. 1976년 9월부터 1983년까지 삼보증권 호남지역 업무추진본부장으로 근무.


그리고 삼보증권 퇴직 후 동생, 친구와 함께 건설회사를 설립한다.


“건설회사를 설립한 후 1984년 광주에서 가장 높은 13층짜리 빌딩을 준공했습니다. 가사 작품 성산별곡을 생각하며 성산타운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매도과정이 차질이 생겨 자금 압박이 심해지고 결국 부도가 나고 말았습니다.”
정씨는 3년 동안 서울에서 지내다가 1998년 광주로 내려온다. 그리고 밀알회 중앙회 사무총장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물론 무급 사무총장 자리입니다. 나는 수도 없이 밀알회 사무국장을 맡았고, 신협 이사장도 여러차례 했습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 직을 맡았는데 그걸 합쳐 놓으면 40년 정도는 될 겁니다.”

그 후로 정씨는 고려증권, 일신금고 등에서 중책을 맡아 일한다.


그리고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풀뿌리민주주의가 부활되고 지방선거 출마권유를 받는다. 공천이 곧 당선이던 때였다.


“한 마디로 거절했습니다. 시민운동은 그 시대의 요구를 따라야 합니다. 이미 민주화운동은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1990년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환경운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때부터 정씨는 환경운동가로서 또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1992년 광주전남 유엔 환경회의 추진위원회 위원장, 1993년 광주전남 환경운동 연합 상임의장을 맡아 환경운동 일선에 나선다. 그리고 무등산보호단체 협의회 상임의장을 맡기도 한다. 또한 재단법인 무등산공유화운동재단을 발족하여 무등산이 사유화되어 무분별하게 개발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무등산 60만㎡(약 20만평)를 매입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리고 환경과 무등산 보호운동에 관여하던 1998년, 광주광역시 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장이라는 중책을 맡는다.




정씨는 2002년 지방선거때 광주광역시 시장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기도 한다. 낙선이란 것을 빤히 알면서도 선거전을 빌어 하고 싶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선거전을 통해 할 말을 다 쏟아냈다. 그리고 그가 평소에 즐겨하는 말처럼, ‘최선을 다하고 멋지게 패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패배한 뒤 곧바로 고향 지실로 돌아왔다. 주민등록도 옮겼다. 그러나 광주광역시는 그에게 광주광역시 환경관리공단 이사장의 중책을 맡긴다.

2005년에 ‘자연환경국민신탁법’이 발효되었다. 그러자 정씨는 자신과 연관이 있는 지실의 땅과 건물을 모두 국가에 신탁한다.


“담양은 앞으로 지역발전을 위해 송강을, 다시 말해서 가사문학을 파는 방안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제 재산을 신탁한 것입니다.”
밀알과 함께 살아온 청년 정구선씨. 지금도 그는 15개 단체의 책임을 갖고 있다. 올해 일흔 한살인 정씨는 앞으로도 30년 세월을 설계하고 있다. 그 세월 동안 환경을 지키고 봉사하고 싶다고 말한다. 한 알의 밀알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정씨는 최근 이름을 바꾸었다. 원래는 ‘鄭求宣’인데 ‘鄭求善’으로 바꾼 것이다.


“이름대로 베풀지(베풀 宣)도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랬으면 앞으로는 착하게(착할 善)나 살아가라고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