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박용훈-(사) 담양대나무축제 이사장

“남을 탓해서는 안 됩니다” 직원 350명 근무 견실한 남일피혁 경영 신양파크·무등산관광호텔 IMF 치명타 13대 총선때 거센 황색바람에 패배 쓴맛 노인아카데미가 제 생애 마지막 사업 꿈 대나무축제-관

2009-04-08     마스터



수북면 한적한 시골집 텃밭에서 봄 채비를 하고 있는 사단법인 담양대나무축제 박용훈 이사장을 만났다. 박씨는 요 근래 아주 느긋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외출도 별로 하지 않고 텃밭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한마디로 ‘슬로 라이프’인 것이다. 예전 같았다면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박씨는 시쳇말로 한 때 잘 나가던 기업인이었다. 박씨가 한때 경영했던 대표적인 기업체는 담양 고서 남일피혁, 광주 신양파크호텔과 무등산호텔 등이다. 그런데 그 탄탄하던 기업들이 하루아침에 부도를 맞았다. IMF 때문이다. 그런데 박씨는 부도의 가장 큰 원인은 자신이라고 말한다.
“남을 탓해서는 안 됩니다.”
부도를 맞고 나서, 다시 말해서 기업이 망하고 나서 박씨는 모든 잘못은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을 터득했다고 말한다.

박용훈씨는 창평면 의향리에서 태어났다. 박씨의 아버지(작고, 박명성)는 천재로 소문이 났는데 서울 중앙고보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서울에서 생활하던 아버지는 할아버지께서 별세하자 창평으로 내려오셨는데 때마침 면장이 공석이어서 열아홉 나이로 창평면장 직무대행을 하셨습니다. 그 뒤에 동아일보에 근무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다른 사람보다 생각이 진취적이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두 살 때 광주로 이사를 한뒤 만주로 건너가 사업도 벌이셨습니다. 부모님께서 만주에서 사업을 하시니까 할머니와 함께 생활했는데 부모 없는 아이라고 놀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만주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하던 사람이 잠시 귀국을 한다. 그리고 박씨는 그 사람 뒤를 밟아 몰래 만주행 기차에 오른다. 여섯 살 때 일이다.
“결국 기차 안에서 검표원에게 발각되었지만 그 길로 부모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주에서 일년반 동안 학교에 다녔습니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아버지께서 독립자금을 대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곧 독립한다는 정세를 알고 계셨던지 나를 귀국시키셨습니다.”


만주에서 돌아온 후 박씨는 수창초등학교에 입학하고 3학년때 해방을 맞는다. 그리고 서중, 일고를 거쳐 전남대학교 법대에 진학한다. 법관이 되기 위해 고시공부도 한다. 그러다가 꿈을 접고 1961년 조폐공사에 들어가 1971년까지 근무한다. 그리고 퇴직후 곧바로 시작한 사업이 ‘남일피혁’이다. 원래 광주 학동에 있었던 남일피혁은 일제때부터 내려온 회사이다. 박씨가 이 사업에 손을 대던 당시는 나일론 등 새로운 소재의 옷감이 등장하면서 피혁사업은 내리막길이었다.


그런데 남일피혁은 고서면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고서면으로 회사를 옮기던 당시 공장부지가 1천700평이었는데 그후 2만평으로 확장된다. 박씨는 회사 이전과 함께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기술제휴를 한다. 그리고 조폐공사 시절 수출업무를 담당한 ‘외자과’에 근무했던 노하우를 살려 수출에도 눈을 돌린다.
“사업이 한창 잘될때 직원이 350명이 넘었습니다. 당시 우리 회사에서는 인근 지역민들을 직원으로 충당했습니다. 1983년 남일피혁은 광주전남 최초로 1천만불 수출탑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1천만불 수출탑 상을 받을 당시 남일피혁의 생산량은 전국 3위였고 아디다스, 리복 등 다국적 스포츠의류 업체에서는 최고의 품질로 선정한다. 아디다스나 리복 등은 남일피혁의 가죽만을 사용했으므로 공급물량이 딸린다.


이 무렵 박씨는 우연한 기회에 신양파크호텔을 인수하게 된다.


1980년 5·18 이후 신군부는 지역민심을 달래는 차원에서 광주에 호텔 건립을 추진했는데, 이 호텔은 준공 5개월만에 부도 위기를 맞는다. 그렇게 되자 당시 전남지사가 박씨에게 호텔 인수를 권한 것이다.
“사실 호텔사업은 꿈도 꾸어보지 않았는데 우리 남일피혁이 대주주가 되서 몇몇 광주 경제인들과 공동으로 인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14년만에 호텔수지가 흑자로 돌아섰습니다. 인수하던 초창기부터 경영자 조찬회를 가졌는데 제가 대표로 있으면서 780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1997년 박씨는 또다시 무등산관광호텔을 인수하게 된다. 인수하고 나서 100억원을 들여 리모델링을 한다. 그런데 무등산관광호텔이 박씨에게 치명타를 날린 것이다.
“1997년 11년 23일 IMF가 터집니다. 인수 당시 7%였던 금리가 33%로 급등을 했습니다. 결국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모기업인 남일피혁까지 무너지고 만 겁니다. 이 일을 당하고 나서는 참으로 맘고생이 컸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모두가 내 탓이지요.”

박용훈씨의 인생역정 중에서 정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1970년대 고서면 통대에 출마를 하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별로 내키지 않아 고사를 했는데 정보기관에 찍힌다며 반드시 출마를 하라고 반 협박을 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후보등록을 했는데 그래도 하기 싫어서 선거전이 시작되고 3일째 되는 날 면장을 비롯한 지역 유지들을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당시 돈 500만원을 내놓으면서 지역을 위해 보람있게 써달라며 후보사퇴를 했습니다.”


그 돈으로 ‘고서장학답’이 마련되고 고서중학교 테니스부가 창설된다. 이후 고서중학교 테니스부는 전국을 제패하고 국가대표 선수도 배출하게 된다.
그후 11대 총선 때부터서 여당의 부위원장을 맡아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12대 때 공천을 받는다. 그런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하룻밤 사이에 화순의 구 아무개 후보로 바뀐다. 구 아무개 씨는 1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3대 총선에서는 후보자로 나섰다. 황색바람이 거세게 불던 때였습니다. 결과는 패배였습니다.

이제 그는 화려했던 옛 일을 가슴에 묻어둔 채로 흙에 묻혀 살고 있다. 그러면서 또 하나의 소박한 꿈을 키워가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습니다. 앞으로는 노인인구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지역의 성패가 가늠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 생애 마지막 사업으로 노인아카데미를 만들고 싶습니다. 요즘 70대는 노인이 아닙니다.”
실제로 박씨는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호남대학교 초빙교수로 5년째 관광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박씨는 관광이 21세기 최고의 고부가가치산업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대나무축제도 관광에 관심을 가져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