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한국전통식품 당류제조 명인 유영군 씨
창평쌀엿은 나의 분신, 명인의 길 가겠습니다.”
대민 최초 ‘당류제조 명인’ 소유자인 그는
400년 역사를 갖고 있는 창평쌀엿의 명성
천년만년 이어지게 하는 것이 의무라고 여겨죠
저를 당류제조 명인으로 지정해 준 것은
그 길을 지키라는 명령이 아니겠습니까?
창평의 호정식품주식회사 대표 유영군씨가 본격적으로 쌀엿 만들기를 시작한 지 35년이 되었다. 참으로 긴 세월 오로지 한 길을 달려왔다. 그런데 유영군씨가 만드는 창평쌀엿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더 길다. 창평쌀엿의 역사는 유씨의 할머니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제조법을 며느리(유씨의 어머니 고 박기순씨)가 이어받고, 이어서 손자 유영군씨로 전수된다. 어림잡아도 60년이 넘는 세월이다.
유씨가 가업을 이어받기 위해 본격적으로 쌀엿 만들기를 시작한 것은 스물다섯 살 때이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는 꽤 규모가 크게 축사를 짓고 소를 길렀다. 그러다가 어느날 그 일을 접고 쌀엿 만들기로 돌아선다. 그런데 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사회적 여건이 아주 안 좋았다. 쌀엿을 만드는 자체가 불법이었다.
90년대 이전은 식량이 부족한 때였다. 그래서 집에서 가용주(家用酒) 술 담그던 일도 비밀리에 했다. 걸리면 엄청난 벌금을 물었다. 그래서 가용주를 밀주(密酒)라고 했다. 쌀엿 만들기도 그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90년대 이후 ‘통일벼’가 등장해 쌀 생산량이 많아지면서 이번에는 넘쳐나는 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쌀 소비를 권장하게 된다. 그렇게 되자 유씨는 1990년 ‘호정식품’을 설립한다.
호정식품 설립 후 유씨는 지금까지 가내 수공업 형태의 쌀엿 만들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1992년 한국식품개발연구원에 ‘창평쌀엿 제조에 관한 연구’ 용역을 의뢰하고, 창평의 30여 호 농가들과 함께 ‘쌀엿특품사업단’을 만든다. 그리고 1993년에는 독일 베를린 국제농업박람회에도 참가하고, 미국 LA 현지 백화점에 창평쌀엿 40톤을 납품한다. 아울러 서울의 롯데, 신세계 등 굴지의 백화점에도 진출한다. 그 후 1996년과 1997년은 최대 호황을 누리는데 쌀엿 만드는데 드는 쌀이 연간 400톤을 웃돈다. 그리고 백화점의 요구에 따라 한과도 만들기 시작한다.
“창평의 쌀엿은 한 평생 같이 가야할 제 분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쌀엿은 제조 특성상 거의 수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노령인구가 많은 시골에서 유휴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고, 공해를 일으키는 오폐수가 전혀 발생되지 않으며, 기술이 없어도 누구나 손쉽게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지역에서 생산되는 원료를 소비해 주니까 지역 농민들에게도 도움을 주게 됩니다. 또 허준 선생의 동의보감에도 우리 몸에 이로움을 주는 식품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 쌀엿에 대한 기록이 있다는 것은 유씨를 통해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이다. 동의보감에는 “쌀엿은 폐와 지라를 윤택하게 해주고 가래를 삭혀주며 만복(滿腹)하면 쉬었다 먹어라”라고 기록되었다고 한다. 만복, 즉 배가 부르면 쉬었다 먹으라고 했으니까 많이 먹어도 괜찮다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 젊은 세대들이 쌀엿을 별로 선호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고 말한다.
그래서 유씨는 쌀엿 대중화도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쌀엿 제조기술을 알려주고, 새로운 공장을 짓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전국 어디든 달려간다. 지금까지 유씨가 제조기술을 전수하고 신규공장 제조시설 지원을 해준 곳은 경상남도 의령, 전라북도 완주, 임실 등 여러 곳이다.
2000년, 유씨는 한국전통식품 명인 제21호로 지정 받는다. 명인 중에서도 유씨는 ‘당류제조 명인’이다. 이 당류제조 명인은 유씨가 처음이었고, 이후로도 당류명인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오랜 동안 당류제조 명인은 유씨가 유일했다. 이 분야에 대한 역사적 증거를 밝히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최근 식품명인 지정에 대하 규정이 다소 완화되면서 한 사람이 더 생겼다.
그렇다면 창평쌀엿의 역사는 어느 정도나 될까. 유씨는 대략 400년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조선조 역사에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기록되는 사건이 있다. 인조가 거사를 계획하고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담양 고서 후산리에 살고 있는 오희도를 찾아온다. 오희도는 고서 ‘명옥헌(鳴玉軒)’의 주인이다. 오희도의 옛집 앞에는 인조가 말을 맸다는 은행나무가 있는데 이를 ‘계마목(繫馬木)’이라고 한다. 그런데 오희도를 만나러 온 인조가 창평을 들렀는데 이곳의 넓은 들을 보고 곡물이 많이 나오니 엿을 만들어 먹어도 좋겠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때부터 창평쌀엿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4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창평쌀엿의 명성을 천년 만년 이어지게 하는 것이 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당류제조 명인으로 지정해 준 것은 그 길을 지키라는 명령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분신과 같은 쌀엿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어떠한 희생을 감수할 각오도 되어 있습니다.”
유씨는 실제로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다. 그래서 전국 판매장에 진열된 잘못 만들어진 엿을 모두 수거해야 했고, 손해도 만만치 않았다.
“창평쌀엿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나가는데 금전적인 손실이 문제입니까?”
유씨의 이 반문이 그가 올곧은 명인임을 확실하게 반증해 준다.
당류제조 명인 유씨는 2003년 ‘(주)대나무건강나라 법인’을 설립 대나무차를 생산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 유씨는 하소연하고 싶은 말이 많다.
“사실 차를 제조하는 일은 경영상 위험이 많습니다. 기호식품이기 때문에 대중성을 확보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는 담양은 대나무를 앞세워야 지역이 활성화된다는 생각에서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는 걸 예견하면서도 뛰어들었습니다. 지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군 최고결재권자가 바뀌면서 하루아침에 찬밥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적어도 지속성이 보장되어야 기업하는 사람들이 마음놓고 투자를 할 것 아닙니까?”
툭 터놓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데 유씨는 애써 말을 아낀다.
유씨는 주위로부터 봉사정신이 투철한 지역일꾼으로 평가받고 있다. ‘창평자치발전협의회’와 ‘담양관광발전협의회’ 회장을 맡아 많은 일을 했다.
이렇게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유씨에게 주위에서는 이런저런 권유를 하기도 한다.
“선거 때가 되면 군의원에 출마하라, 도의원에 출마하라 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저에게는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저는 오로지 앞만 보고 과분하게 얻은 명인의 명예를 지키며 살아갈 것입니다.”
/정리=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