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명문 창평고등학교에서 교직 평생을 마친 박형선 씨
“희망을 갖게 되면 마침내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잘 가르치는 것은 두 번째이고 꿈을 갖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첫걸음 39년 교직생활중 30년을 창평고에서 근무 정년퇴임때 전교생이 준 쪽지편지 액자 만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구에 널리 회자(膾炙)되는 말이다. 따로 설명이 필요치 않은 금언(金言)이다. 오늘날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명문 창평고등학교 역시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이제 창평고등학교는 개교 1세기가 넘는 다른 명문고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이처럼 놀라운 역사속에 평생을 교직에 몸 바친 박형선씨가 있다. 물론 창평고등학교가 오늘날 명문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노심초사(勞心焦思)했고, 열정을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평고의 이야기를 박형선씨를 통해 듣는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광주시내 사립중고등학교에서 근무하다가 1980년 창평고등학교 설립멤버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담양은 제 고향이기도 하고 설립자의 뜻이 좋았기 때문에 선뜻 학교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창평고등학교의 설립자는 지역출신 사업가 고일석(작고)씨다. 고씨는 무등양말 창업주인데, 대창석유, 대창운수 등 탄탄한 계열기업을 경영하는 재력가였다.
“설립자께서는 개교 당시 오늘날과 같은 명문고등학교를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면학의 기회를 주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갖고 계셨습니다. 사실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신입생 자원들이라고 해야 일차에서 불합격한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이 삼년이 지나고 나서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것입니다.”
시쳇말로 ‘맨땅에 해딩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 속에는 ‘무모하다’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어렵게 첫 신입생을 모아 시작한 창평고등학교 학생들과 교직원들의 생활을 되돌아보면 그야말로 ‘맨땅에 해딩’이라고 할 수 있다.
첫 신입생 정원은 360명이었다. 정원 채우기가 쉽지 않았다. 창평중학교와 고서중학교를 찾아가 진학하지 못한 졸업생들의 명단을 입수해 집집을 찾아가 진학을 설득했다. 고서에 위치한 섬유회사 ‘전방군제’에 근무하는 근로자들에게도 진학을 권유하고, 광주시내 인문계와 실업계 고등학교 불합격자들도 찾아다녔다. 그렇게 해서 신입생 330명을 모았다. 그리고 이들을 상대로 입시를 치렀다.
“미달인데 무슨 시험이냐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그들에게 당당히 입시를 치르고 들어왔다는 자부심을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시험점수가 너무 낮았습니다. 200점 만점에서 겨우 100점을 넘은 학생이 3명이었습니다. 설립자는 30명에게 전달하도록 장학금을 주었지만 3명에게만 주었습니다. 최소한 200점 만점의 절반인 100점을 넘는 학생에게 준다는 방침을 세우고 특단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특단의 조치란 국어, 영어, 수학 등 세 과목 교과서를 아예 덮어놓고 기초부터 가르치기로 한 것을 말한다. 100점이 넘은 3명의 학생은 따로 교장실에서 교과서 수업을 했고, 글자를 못 읽는 학생들은 만화책 보는 것을 수업으로 대신했다.
“지나간 이야기니까 이제 웃으면서 할 수 있지만 개교 초기 교직원들은 가정도 버리고 학교에 매달릴 정도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박씨의 이 말에 동석하고 있던 부인이 한 마디 덧붙인다.
“빵점짜리 가장입니다.”
학교생활을 최우선으로 여겼던 그는 지금도 아내에 대한 깊은 미안함 하나를 간직하고 있다. 어느날 새벽 다섯시 아내가 천식으로 고통을 호소했다. 그 길로 아내는 응급실로 실려갔다. 그런데 아침 여섯시에 그는 응급실 병상에 누워있는 아내를 그대로 두고 통학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고 만 것이다.
학교에 미친, 아니 오로지 아이들의 실력향상만을 생각하며 온통 매달린 보람은 1회 졸업생들의 대학입시에서 괄목(刮目)할 만한 결과로 나타난다. 1회 졸업생은 290명이었는데, 이중 69명이 4년제 대학에 합격한 것이다. 1회 졸업생 중에서 서울대 합격생이 나왔다. 육군 공군 사관학교도 합격하고 교육대학에도 다섯명이 합격했다. 그리고 전남대, 조선대에도 다수 학생이 합격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2회 졸업생 중에서는 그 어렵다는 서울대 법대 합격자와 전남대 공대 수석합격자가 나왔다.
그런데 박씨는 학생들을 열성적으로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
“잘 아시다시피 초창기 우리 학교 학생들은 일차로 고교입시에서 실패한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 스스로가 위축이 되어 꿈마저도 낮게 설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와 우리 교직원들은 이 점에 대해서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학생들이 꿈을 높게 갖게 하는, 다시 말해서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와 하면 된다는 희망을 갖도록 정신교육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것은 두 번째이고, 꿈을 갖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첫걸음입니다.”
이제 그는 천직(天職)으로 여기던 교직에서 은퇴했다. 39년 교직생활 중 30년을 창평고등학교에서 근무했다. 그 30여년중 평교사로 2년, 교감으로 21년, 교장으로 7년 근무했다.
이제 그는 파릇한 젊음과 뜨거운 열정, 그리고 한없이 따사로운 사랑을 쏟았던 창평고등학교를 떠났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창평고등학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현재 졸업생이 2만명 정도 됩니다. 그 학생들이 모교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여러가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2003년도부터는 홈 컴잉 데이를 정해 기수별로 모교를 방문해 나름의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명문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조건이 따라야 합니다. 재학생이나 졸업생이 모교에 대해서 얼마만큼 자긍심을 갖느냐 하는 것도 명문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라고 봅니다.”
퇴임 후 그는 전남대 평생교육원에 나가 새로운 공부도 하고, 독서, 종교활동, 가벼운 운동 등을 하면서 비교적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아침 여섯시가 되면 출근해야 하는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지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지금이라도 단 며칠만이라도 아이들과 생활하고 싶은 충동이 가시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새로 생긴 가보(家寶) 1호를 들여다보면서 위안을 삼습니다.”
그는 정년퇴임 때 전교 학생들로부터 쪽지편지를 받았다. 전교생이 정성들여 만들어준 쪽지편지를 조각보처럼 한데 묶어 액자로 만들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굳세게 살아가겠습니다.”
액자를 다시 들여다보는 박형선씨의 얼굴은 그지없이 평온해 보인다.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