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담양의 살아있는 역사책 향토사학가 이해섭 씨

“담양사람이 담양을 모른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술지가 추성·담주가 되고 또 담양이 되고… 천년의 긴 세월 속에서 담양이 만들어져 광주와 통합, 담양의 역사를 생각하며 접근해야 30대 초반부터

2009-06-19     마스터





여러가지 설명을 접어두고, 담양의 향토사학가 이해섭씨가 펴낸 담양과 관련한 책의 분량만 헤아려 보더라도 그의 업적은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다. 때문에 그를 향토사학가로 지칭하는 데 있어서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30대 초반부터 여든을 넘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가 펴낸 책은 40여권이나 된다. 그런데 그가 펴낸 책들은 한결같이 쪽수가 많다. 일반적으로 대하는 단행본 서너권에 맞먹는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대하는 단행본으로 치자면 100권이 훨씬 넘는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담양의 역사를 알고 싶다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해방되고 얼마 안 된 때라 세상이 어수선하고 모두들 하루 살아가는 것이 힘든 때라 이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도 없었고, 자료가 될 만한 고서(古書) 한 권 구하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향교(鄕校)에 가면 뭔가 자료가 있을 것 같아서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이때가 군대에서 제대하던 무렵이다. 그는 열아홉 살에 입대해 스물아홉 살에 제대를 한다. 10년 군복무 동안 6·25도 겪는다.


향교를 찾아갔지만 자료를 얻기는 힘들었다. 고서 몇 권이 있었지만 온통 한자로 되어 있고, 글씨들이 시쳇말로 갈겨써놓은 초서(草書)라서 읽을 수도 없었다. 담양의 내력을 알고 싶다는 그의 호기심은 첫걸음부터 어려움에 부딪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당시 월산면에 거주하는 이상운씨로부터 남경희씨를 소개받는다. 남씨는 당시 산감(山監)이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는데 시골에서는 비교적 식견이 넓은 사람이었다.


“남경희씨가 향교에 가서 ‘추성지(秋成誌)’라는 책을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 역시도 한자로 되어 있어서 해독할 능력이 없어 한문을 많이 아는 분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옥편(玉篇)을 끼고 살았습니다. 지금도 옥편을 늘 내 곁에 두고 삽니다.”
여러 달이 걸려 추성지의 내용을 해독한 이씨는 이 책을 국역(國譯)하여 펴낸다.
“반응은 별로였습니다. 게다가 이해섭이가 뭔데 책을 내느냐며 우습게 보는 사람들도 많아서 속이 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결혼한지 얼마 안 된 때였는데 아내 역시도 밥이 나오나 옷이 나오나 불만이었습니다.”


이 무렵 그는 전남일보(광주일보 전신) 공채 시험에 합격해 기자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기자생활과 담양의 역사 공부를 겸하게 된다. 틈만 나면 담양의 구석구석을 더듬고, 대학의 도서관을 찾아다닌다. 그때는 자동차가 별로 없던 때라서 자전거로 다녔다.


이런 결과로 엮어진 책이 ‘청죽골의 비망록’이다. 상중하 세 권으로 된 이 책이 나오는 데는 10년이 걸린다. 청죽골의 비망록 상권에는 1914년부터 1969년까지, 중권에는 1970년부터 1979년까지, 하권에는 1980년부터 1989년까지의 담양의 크고 작은 사건을 담았다.
청죽골의 비망록 상중하 세 권은 이씨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저서이다. 그러나 이씨가 펴낸 ‘담양 창평 한말의병사료집’ ‘담양 옛땅 옛터 옛이름’ ‘담양설화’ ‘금성산성’ ‘담양이야기’ 등 수많은 책들은 담양사람들이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재산이다.

삼십대 초반에 시작하여 여든을 넘긴 이날까지 그는 걷고 또 걸었고, 쓰고 또 썼다. 반세기 동안 오로지 그 일에만 매달렸다.
“한창 원고를 쓸 때는 하루에 200자 원고 칠팔십장을 썼습니다. 그런데 원고는 연필로 썼습니다. 볼펜으로 쓰면 지우고 고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에 미쳐서 살 때는 서울대 규장각을 이웃집 드나들 듯 했는데, 서울대 부근에는 내가 고정적으로 투숙하는 내 집 같은 하숙집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인터뷰 도중 조금은 섭섭한 속내를 털어놓는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며 비난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는 섭섭함이다.
“이해섭이가 관청에서 예산이나 타 쓰려고 책을 낸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제발 그런 오해는 버렸으면 합니다. 이걸 가지고 이해섭이가 치부하는 것으로 오해하는데 내 진정성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담양의 향토사학가 이해섭씨를 이야기할 때 금성산성(金城山城))을 빼놓을 수는 없다. 담양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잡은 금성산성이 오늘의 모습을 보이게 된 데는 이씨의 숨은 공이 크다.
“어느 날 금성산성 산행을 하다가 성터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그걸 발견한 순간 산성의 내력이 궁금해졌습니다.”
이때부터 이씨는 서울대 규장각 등지를 찾아다니며 문헌을 뒤적인다. 그리고 담양 고지도(古地圖)를 찾아낸다. 채색물감으로 그린 그 고지도에 금성산성이 분명히 명기돼 있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저 막연하게 금성산성 복원을 생각했었다. 사회적 인식도 뒤따르지 않았고, 행정관서에서도 재정이 넉넉지 못해 이에 대한 예산을 세울 수 없었다.


“관선시대 때 군수들은 발령이 나면 내일이라도 자리를 옮기면 그만이고, 자기의 고향도 아니기 때문에 지역의 문화와 역사 같은 데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민선시대가 되자 군수를 면담하는 자리에서 금성산성 복원의 필요성을 건의했습니다. 다행히도 민선 1, 2기 군수가 이를 수용해 주었고, 때마침 서울대 박병호 교수도 여러가지로 협조를 해 준 덕분에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서울대 박병호 교수는 이씨와 담양동초등학교 동창생이었다.
“민선3기 때 죽녹원을 만들어 담양의 명소로 자리잡아 지역발전에 적잖은 보탬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21세기가 문화의 세기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금성산성이 온전히 그 위용을 드러낸다면 담양의 지역발전에 엄청난 보탬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2017년. 바야흐로 담양의 역사가 시작된지 천년이 된다. 누구보다도 담양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살아온 이씨에게 2017년은 각별한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
“천년의 세월이 결코 짧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담양의 역사는 이 천년에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천년이 거듭 이어질 것입니다. 저는 담양의 젊은이들이 담양의 역사와 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담양의 역사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요즘 광주와의 통합문제가 거론되고 있는데, 담양 천년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아주 조심스럽고 진지하게 이 문제에 접근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술지(述只)가 추성(秋城)이 되었고, 추성이 담주(潭州)가 되고 또 담양(潭陽)이 되었다. 이 세월이 천년이다. 천년의 긴 세월 속에서 담양은 만들어졌다.

/설재기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