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봉 추모사업 위치 부적정”…담양군 귀막았나
‘중복투자’, ‘명분없는 예산낭비’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담양군이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는 ‘제봉 고경명 선생 창의 기념사업’이 기념탑과 추모시설을 고집, 거센 비판이 일고 있다.<관련기사 4면>
더구나 의병창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관광지 죽향문화 체험마을 인근에 추모시설을 고집하고 있어 위치의 부적정성에 대한 논란마저 도마위에 오르고 있다.
지난 6일 오전 군청 영상회의실에서 열린 제봉 고경명선생 창의기념사업 연구용역 최종보고회에서는 당초 건립할 예정이었던 사당과 내외삼문을 없애고 ‘의향 담양’을 상징할 수 있는 기념탑을 세우기로 했다.
또 담장을 없애고 대신 시비를 설립하고 이를 따라 산책로를 개설하는 것을 포함, 임란당시 의병들의 집결지인 추성관을 복원하고 추성창의와 전라도 연합의병의 감동적인 스토리를 전할 수 있는 기념관을 건립키로 했다.
이로써 죽향(죽녹원), 예향(죽향문화체험마을), 의향(창의 기념공원) 등 3향으로 대표되는 담양정신을 모두 알릴 수 있는 명승지로 가꿔간다는 것이 담양군의 복안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담양군의 결정은 결국 창의사업이 추모시설을 건립하는 것으로 회귀했을 뿐만아니라 단순히 광산과 남원, 곡성 등지의 의병들이 담양에서 집결해 한양을 향해 북상했다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넉넉하지도 않은 재정형편에 많은 예산을 투입해 짝퉁 추모시설을 건립하는 것이어서 그 적정성에 대한 비판을 야기하고 있다.
특히 제봉 선생의 둘째 아들 ‘학봉’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창평을 놔두고 굳이 별다른 연관도 없는 담양읍에 현창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주민들은 곱지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주민 A(46·읍 백동리)씨는 “의병장의 고향도 아니고 주요 전투가 벌어졌던 곳도 아닌 단순한 집결지였던 담양군이 어려운 재정형편 속에서 구태여 많은 예산을 쏟아가며 현창사업을 해야할 필요성이 있는가”라고 반문한 뒤 “굳이 기념사업을 하고 싶다면 제봉 선생의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 창편면에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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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호남지방에서 최초로 의병 7천명을 모집하여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순절한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삼부자와 유팽노, 안영 등 5위(五位)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祠堂)이 광주시 대촌마을에 있다.

왜적과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 금산에 고경명 선생의 숭고한 죽음을 기리기 위해 조선 17대 효종 27년에 순절비를 세웠으나 일제강점기 때 없애 버려 해방후 후손들이 다시 세우고 1964년 비각을 건립했다.
담양군은 명분없는 제봉 창의사업 왜 고집할까
제봉 후손 집성촌 창평에 추진 바람직
추성관 위치는 본래 지금의 담양동초교 강당자리
죽향마을 인근 창의사업 지역은 의병 집결지와 무관
광산 대촌사람 고경명 장군이 양대박, 유팽로와 연락
각자의 근거지에서 병력을 모아 담양에 집결해 북상한 사실은
대촌·남원·곡성과 달리 담양 의병정신과의 연결은 무리
#제봉 고경명 선생은
지금은 광주시로 편입된 광산구 대촌사람이다. 본관은 장흥이며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이다.
1552년(명종 7) 진사가 되고, 1558년 식년문과에 장원했다. 공조좌랑·전적·정언 등을 거쳐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561년 사간원헌납이 된 뒤 사헌부지평·홍문관부교리를 거쳤다. 1563년 교리로 있을 때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인 이조판서 이양(李樑)의 전횡을 논하는데 참여하고 그 경위를 이양에게 알려준 사실이 드러나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곧 파직되었다.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에 다시 기용되고 승문원판교를 거쳐 1591년 동래부사가 되었으나 세자 책봉문제로 서인이 실각하자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金千鎰)·박광옥(朴光玉)과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고, 여러 마을에 격문을 돌려 6,000여 명의 의병을 담양에 모아 진용을 편성했다.
6월 1일 북상을 개시하여 6월 13일 전주, 22일 여산, 27일에는 은진에 도달했다.
그러나 왜적이 호남을 침범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자 북상계획을 바꾸어 7월 1일 연산으로 갔다.
7월 10일 곽영(郭嶸)의 관군과 합세, 금산(錦山)에서 왜적과 싸우기로 하고 800여명의 정예부대로 선제공격을 했다. 그러나 겁을 낸 관군은 싸울것을 포기하고 앞을 다투어 도망갔다. 이에 사기가 떨어진 의병군마저 붕괴되었으나, 그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적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아들 인후(仁厚)와 유팽로(柳彭老)·안영(安瑛) 등과 순절했다.
시·글씨·그림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시문집인 제봉집, 무등산 기행물인 서석록(瑞石錄), 각처에 보낸 격문을 모은 정기록(正氣錄)등이 있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광주 포충사(褒忠祠), 금산 성곡서원(星谷書院)·종용사(從容祠), 순창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담양군의 창의사업 계획
당초 담양군은 사업을 추진하면서 제봉 고경명 의병장의 순국정신을 기리고자 ‘제봉 고경명 선생 창의기념사업회 이사회(이사장 문경규)’를 구성했다.
이후 임진·병자 의병과 구한말 의병, 민족운동가까지 아우르는 기념관 건립사업으로 사업을 크게 확대시켰다.
확대된 사업 내용으로는 국비 33억원과 군비 25억원을 투입, 죽향문화체험마을과 바로 연접한 담양읍 운교리 100번지 일대에 사당인 창의사와 전시관인 추성관, 강당인 경의당 등 기념시설을 짓고, 부대시설로 기념탑비, 내·외삼문, 관리사, 주차장 조성 등이 포함됐다.
하지만 고경명 선생의 고향인 광주 광산구 대촌의 포충사와 왜적과의 전투에서 선생이 순절한 충남 금산의 중용사 등지에 고경명 선생을 기리는 사당과 충혼탑 및 동상 등이 이미 건립돼 있다.
또 고경명 선생과 함께 거병·순절한 양대박(남원)·유팽로(곡성) 등 의병장이 담양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어 굳이 막대한 예산을 들여 사당형식의 추모시설을 짓는 것에 대해 ‘예산낭비’, ‘중복투자’ 등의 비판여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러한 비판을 희석시키기 위해 담양군과 기념사업이사회는 수 차례 회의를 열어 사업내용을 보완하는 과정을 거치고 지난 7일 최종용역결과 보고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최종 연구용역 보고회를 마친 담양군은 “기존의 사당개념을 탈피하고 의향담양을 널리 알리고 주변 환경과도 조화를 이루는 기념공원으로 개발할 것”이라며 “건축물 위주의 정적인 공간배치 보다는 기념탑, 시비 등 조형물 위주의 동적인 활동공간을 지향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당초 건립코자 했던 내외삼문을 없애고 의향담양을 상징할 수 있는 기념탑을 건립하고 부지 경계도 담장을 두르지 않고 25개의 시비를 설치해 (죽향문화체험마을을 찾는)관광객의 왕래를 자유롭게 하며 시비를 따라 산책로를 개설해 시비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
또 임진왜란 당시 전국 유일의 거도적인 연합의병 정신을 기리고자 연합의병을 창의했던 추성관을 복원하고 고경명 대장과 부장 유팽로·양대박·안영 등과 6천여명의 유무명 의병들의 신위를 봉안하고 참배시설을 세우기로 했다.
아울러 탐방객의 이해와 학생들의 교육에 필요한 자료 등을 비치한 기념관 한 동도 추가로 건립할 계획이다.
이와함께 임진왜란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표현한 팔상도상과 제봉 선생이 말 위에서 격문을 작성하던 마상격문상 등이 유력시 되고 있다.
담양군은 이를 통하여 제봉 선생 등의 근왕정신을 기리고 소중한 역사문화자원을 문화관광자원화 및 교육자료로 삼아 후손들에게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킬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다.
#창의기념사업의 문제점
연구용역 결과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담양군의 주된 정신력은 사림(士林)이 중심이 된 시가문학과 사림·백성이 중심이 된 의병운동이라고 한다.
그 예로 1592년 바다를 건너온 왜구들의 분탕질로 나라가 유린되고 어가는 의주로 피난을 떠나 백성들이 갈 곳을 몰라 몸부림칠 때 60세 노구의 선비인 제봉 고경명은 담양 추성관에서 전국 최초로 전라도를 망라한 거도적인 연합의병을 들고 일어났다는 것.
또 유팽로, 양대박, 안영 등으로부터 연합 의병대장에 추대돼 근왕(勤王)의 기치아래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왜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다가 금산 와평(臥坪)에서 3부자가 장렬하게 최후를 맞음으로써 다시 한 번 담양의 구국과 정의의 정신을 천하에 드날렸다고 한다.
따라서 전국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거도적인 연합의병 정신을 맘껏 드러내고 기리기 위해서는 임진왜란 당시 회맹의 장소였던 추성관을 재건하지 않을 수 없고 추성관에는 고경명 대장, 부장 양대박·유팽로·안영 등과 6천여명의 유무명 의병들의 신위를 봉안하고 참배하는 시설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사림이 중심이 된 시가문학은 담양과 연관이 있지만 임진왜란 당시 사림과 백성이 중심이 된 의병운동은 담양과 직접적인 연관을 찾기가 힘들다.
광산 대촌사람 고경명 장군이 남원의 양대박, 곡성의 유팽로 등과 연락하여 위기에 빠진 한양성을 구하기 위해 각자의 근거지에서 병력을 모아 담양에 집결해 북상했다는 사실은 광산 대촌이나 남원, 곡성과는 연관이 있을지언정 담양의 의병정신과 직접 연결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조형물을 세운다고 뭐가 달라지나
추성관을 복원하는 문제도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추성관은 본래 지금의 담양동초교 강당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월산면 화방리로 옮겨져 황폐화되고 있다.
따라서 추성관을 재건 또는 복원을 하려면 화방리에 있는 원본을 본래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거나 아니면 현재의 자리에 그대로 두고 다시 복원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다.
다시 말하면 담양군처럼 전혀 관계도 없는 장소에 버젓이 있는 원본을 놔두고 짝퉁시설을 짓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 기존 현창시설들과는 달리 건축물을 위주로 하는 정적인 공간배치를 피하고 조형물 위주의 동적인 활동을 지향한다는 말도 부자연스럽다.
추모공간이 들어설 부지에 마상격문상과 추모기념탑, 다수의 시비, 팔상도상 등 조형물들을 세운다고 해서 동적인 공간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당과 내외삼문이 돌조각과 비석 몇 개로 바뀌는 것만으로 추모시설이 공원으로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후세들이 각별하게 역사의식과 자긍심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특히 추성관을 재건하고 의병활동에 가담했던 분들의 신위를 봉안하고 참배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사당과 다를 바가 없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관광지 옆에 사당을 짓는다는 지역여론의 반발로 사당을 짓지 않겠다고 했던 것과는 달리 결국 사당으로 회귀하고 만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또 “본래부터 하지 말아야 할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해 놓고 지역민의 반발에 부딪힌 담양군이 사업을 포기하기 어려운 속사정 때문에 억지로 늘어 놓는 궁색한 괘변일 뿐”이라며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차라리 창평으로 이전해라
하지만 담양군은 관광지인 죽향문화체험마을 바로 옆에 추성창의 기념공원을 조성함으로써 죽향, 의향, 예향 등 3향으로 대표되는 담양의 정신을 상징할 수 있는 명승지로 가꾸어 가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죽녹원의 대나무가 竹鄕이며 담양의 누정이 옴니버스식으로 재현된 죽향문화체험마을이 藝鄕을, 그리고 추성창의 기념공원이 義鄕을 상징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 방증.
하지만 담양군이 말하는 ‘3향’은 궁여지책으로 조합해낸 억지스러운 단어라는 느낌을 준다.
죽녹원의 대나무는 죽향과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죽향문화체험마을의 짝퉁 누정들이 예향을 나타낸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굳이 예향을 말하고자 한다면 면앙정을 출발해서 송강정, 식영정, 소쇄원 등지로 이어지는 원본 정자들과 그 속에서 이뤄진 가사문학 작품들을 보관하고 있는 가사문학관을 이야기하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
특히 ‘의향’과 죽향문화체험마을은 인적으로나 장소적으로 아무런 연관성을 찾을 수도 없고 관광지라는 컨셉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뜻있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추성창의를 기념하고 싶다면 죽향문화체험마을로 하지 말고 고경명 선생의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녹천 기념관이 있는 창평면으로 장소를 옮겨 두 의병장을 함께 모시고 기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제봉의 둘째아들 학봉 고인후의 후손들은 학봉의 처가인 창평에 대대로 거주하며 자손이 번창, ‘창평 고씨’로 불리우고 있다.
학봉의 11대 후손 가운데 구한말 일제에 대항에 호남의병의 중심으로서 1907년 구례 연곡사에서 치열하게 싸우다 순절한 녹천 고광순 선생과 12명의 동지들 대부분도 고씨 집안 사람들이었으며 고광순을 도와 일체의 경비를 댄 고광수도 창평고씨다.
이와함께 고광순과는 달리 창평초교의 전신인 창흥의숙(昌興義塾)을 세우고 교사들의 급료와 학생들의 공부에 필요한 일체의 비용을 대며 신학문을 가르쳐 후진양성에 전력, 고하 송진우, 인촌 김성수, 가인 김병노를 배출하는 등 일제에 대해 온건한 방식으로 저항한 춘강 고정주도 고씨문중 사람이다.
이외에도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고재욱은 학봉의 12대 후손으로 고정주의 손자이고, 70년대 보사부장관을 지낸 고재필, 대법관을 지낸 고재호 모두 재(在)자 항렬이다.
재자에 이어지는 석(錫)자 항렬에는 서울대 부총장을 지낸 고윤석, 헌법재판소 판사를 역임한 고중석, 무등양말의 창업자로 창평중과 창평고를 설립한 고일석이 해당된다.
이처럼 창평 고씨문중 사람들은 제봉 고경명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 뿐만아니라 선조들을 본받아 의병과 후진양성으로 치열하게 일제에 대항한 명문의 후예들이다.
주민들은 “추성의병 현창사업이라는 본래의 취지와도 맞지 않는 죽향문화체험마을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대상지를 창평면으로 변경해야 한다”며 “임란 고경명·구한말 고광순으로 이어지는 의병정신을 기리는 것이 합리적인 행정”이라고 조언하고 있다.
/김정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