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무연고 묘 500여기 관리해 온 김원기씨
“돈은 개 같이 벌어 정승 같이 써야 합니다” 30여년째 만성리 공동묘지 무연고 묘 관리 300여차례 어려운 집 장례비용 일체 부담 대충 계산해도 10억원이 넘는 거액 기부한 셈 경로당에 텔레비전 사

“돈은 개 같이 벌어 정승 같이 써야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하는 일이 궂은 일 아닙니까? 궂은 일을 해서 번 돈이라도 값있게 쓰면 진짜 돈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담양에서 30여년째 장의사업(葬儀事業)을 해오고 있는 새마을장례예식장 대표 김원기씨는 말한다.
“설령 과거가 부끄러웠다고 하더라도 현실이 당당하면 떳떳한 인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그는 자신의 부적절했던 젊은 날의 삶을 당당하게 털어놓기도 한다. 현재의 삶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자부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독하게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학력이라고 해야 재건중학교 1학년 중퇴가 전부입니다. 차비가 없어 순창 복흥면 답동에서 담양까지 걸어서 왔습니다.”
김씨의 원래 태생지는 금성면 원천리다. 6?25 당시 의경이던 아버지를 따라 답동에 가서 살다가 열여섯 살이 되어 다시 담양으로 왔다. 그러나 집안이 완전히 몰락해 담양읍 양각리에 있는 고아원에 들어가 살았다.
“성인이 되자 고아원에서 나와 갈빗집 덕인관에서 3년간 종업원 생활을 하다가 그 뒤 읍내 버스정류소에서 매표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매표원 월급이 너무나 적어 한 삼년 하다가 무작정 그만 두었습니다. 이때부터 상갓집을 찾아다니며 윷과 화투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나쳐 결국에는 자살까지 기도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는 노름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 몰래 벼를 추수한다. 그리고 그 돈을 몽땅 날려버린다. 그래서 죽으려고 저수지에 뛰어들었는데 죽지는 못했다. 그는 우스갯소리로 말한다. 수영 실력이 뛰어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저수지 밖으로 헤엄쳐 나오고 말았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모든 걸 용서하시면서 부모 앞에서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은 가장 큰 불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도박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수년동안 상갓집을 찾아다니며 어깨너머로 보았던 장의일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장의일을 해보니까 천직(天職)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으로 시신의 염(殮)을 했는데 역겨운 생각은 들지 않고 아주 기분이 상쾌하고 밥맛도 좋았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한 결과 그는 담양, 장성, 곡성, 순창, 정읍 등 5개 지역에서 최고의 장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장의일과 관련하여 그는 많은 기록을 갖고 있다. 도립대학 부지로 선정된 향교리 공동묘지에서 하루 220구의 유해를 처리했다. 하루에 상여를 11채 만든 적도 있다. 그리고 장의일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만성리 공동묘지 등에 방치되어 있는 무연고(無緣故) 묘 500여기를 관리했다. 어려운 집에 초상이 나면 비용일체를 대 장례를 치른 것도 300여 차례나 된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무연고묘 한기 처리하는데 드는 비용이 대략 200만~300만원은 소요된다고 한다. 일꾼도 필요하고 봉분을 조성하는 데도 잔디값 등 적잖은 돈이 든다. 대충 계산해도 10억원이 넘는다. 이 많은 비용을 김씨가 부담했다.
조선조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이른바 ‘상갓집 개’로 생활한 적이 있다. 그 모멸의 세월을 견디고 마침내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새마을장례예식장 대표 김원기씨도 가난을 떨쳐버리기 위해 상갓집을 전전한 적이 있다. 그 어려운 세월을 견디고 이제는 돈을 꽤나 많이 모은 부자가 되었다. 그의 두 아들 대영이와 대철이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장의사업을 잘 하고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장의사업을 안좋은 직업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이야 어떻게 보든 저는 정당한 방법으로 사업을 하고 거기에서 발생되는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습니다. 내 소싯적 과거를 잘 아는 사람들은 내가 소년소녀가장을 돕고, 경로당에 텔레비전을 사주고 겨울이면 난방용 기름을 넣어주고 하는 것을 보면 속으로 비웃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개 같이 벌어서 정승 같이 쓰겠다는 신념으로 사니까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돈은 버는 사람이 쓰는 것이 정답 아닙니까?”
그는 드러나지 않은 기부천사다. 담양읍에서 관리하고 있는 그의 기부 내력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리고 그 대상도 여러 계층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소년소녀가장과 기초생활수급자에 대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어린 시절의 가난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미미하나마 봉사활동을 하니까 주위에서는 지방선거에 출마하라고 권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저 역시 지금보다 젊었을 때는 그래볼까 하는 생각도 조금 가져본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절대 그런 생각 안합니다. 두 아들에게도 현실에 충실하라고 늘 강조합니다. 다행히도 큰 아들 대영이는 내 뜻을 잘 따르고 있습니다. 지금 대영이가 하는 걸 보면 나중에 나보다 더 잘 하고 살 것 같다는 믿음이 갑니다.”
그렇다면 김원기씨는 장의사업을 통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을까?
“벌긴 많이 벌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사업한 실적으로 보면 500억원은 모았을 겁니다. 그렇지만 현재 수중에 있는 돈은 10분의 1도 안됩니다. 그러나 돈은 그냥 벌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리고 무식하다는 소리 안 들으려고 2년 동안 전남대학교 행정대학원에 다녔고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습니다.”
장의사업자 김원기씨에게는 색다른 이력이 또 하나 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거나 익사자의 시신을 처리한 일이 스무 차례나 된다.
“한 20년 전쯤 일입니다. 그때 엄청난 비가 와서 관방천 물이 불었는데 물살에 인형 같은 것이 떠내려가고 있는데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앞뒤 재지 않고 뛰어들었는데 여섯살 난 사내아이였습니다. 이미 숨이 멎었는데 인공호흡을 했습니다. 아이가 기적처럼 살아났습니다. 그 아이가 어른이 되어 지금도 절 찾아옵니다.”
그는 농담도 곧잘 한다. 부끄러운 과거사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필자는 지금까지 김원기씨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다. 젊은 날 그가 잠시 일정한 직업 없이 거들먹거리고 살았다는 것과 그 뒤 장의사업을 통해 꽤나 많은 재산을 모았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김원기씨는 요즘 담양읍 이장단장과 담양군 이장단연합회 회장을 맡아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