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추억의 관방천’ 부른 담양 원조 연예인 조규선씨
‘추억의 관방천’, 영원히 기억될 노래로 만들고 싶습니다” 1960년 담양에 온 작곡가 김초송씨와 인연 전두옥 작사, 김초송 작곡의 ‘추억의 관방천’ 탄생 실버악단서 기타·노래…공연때마다 관방천 노래

‘한량(閑良)’으로 불리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본래의 뜻은 현직(現職)이 없어서 놀던 벼슬아치나 활을 잘 쏘는 사람, 그리고 놀기를 좋아하고 돈을 잘 쓰는 사람을 말한다. 요즘에는 본래의 뜻이 확대되어 매사에 느긋하고 유유자적하는 사람, 친구들이 많은 사람, 호방한 사람, 나름으로 삶의 멋을 찾는 사람도 한량이라고 한다. 결코 나쁜 의미로 쓰이는 말은 아니다. 오늘날의 한량은 로맨티스트라고도 할 수 있다.
필자는 조규선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모처럼만에 오래 된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훈훈한 정감을 느꼈다. 조씨야말로 이 시대의 한량이 아닐까 싶다.
조씨는 6·25 직후에 ‘유엔 위문협회’라는 악극단(樂劇團) 단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이때 담양읍에서 이발소를 운영하고 있던 전두옥씨도 같은 단원이었다. 전씨는 기타를 쳤고, 조씨는 노래와 연극을 했다. 전씨와 조씨는 담양의 원조 연예인이 되는 셈이다.
“국채수씨가 돈을 대서 악극단을 만들었습니다. 순천, 벌교, 순창 같은 곳으로 순회공연도 다녔습니다. 한 2년 정도 활동했는데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전두옥씨는 본래의 직업으로 돌아가 이발일을 했고, 나는 무위도식하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경찰학교가 생겨 그곳을 수료한 후 곧바로 경찰관이 되었고 그 후 12년 동안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5·16이 일어나자 군 미필자라는 이유로 옷을 벗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대중가요 작곡자 김초송씨를 만나게 된 것이다. 김초송씨는 1960년대에 ‘타향설’ 등 히트곡을 내면서 꽤나 이름을 날렸던 대중가요 작곡가다.
1960년 5월초 김초송씨가 악단장을 맡고 있는 악극단이 담양에 들어왔다. 그리고 공연준비를 하고 있는데 5·16일 일어났다. 전국에 계엄령이 내려지고 모든 집회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보름을 기다렸으나 공연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악극단은 해체되고 단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김초송씨는 딱히 갈곳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전두옥씨 집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꽤 여러 달을 지냈습니다. 이때 전두옥 작사, 김초송 작곡의 ‘추억의 관방천’이 만들어졌습니다.”
현재 담양읍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최 아무개씨가 처음 노래를 불렀다. 작곡가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담양의 한량으로 소문난 국 아무개씨에게 노래를 시켰다. 이 역시 맘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조규선씨가 곡을 받게 된 것이다.
“우리 세 사람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서로 만나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팔십이 넘은 전두옥씨는 건강이 악화되어 제주도 큰아들 집으로 갔습니다. 또 구십 중반이 넘은 김초송씨는 충북 제천 치매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만 들었습니다. 그 시절이 그립고, 그 분들이 보고 싶을 때면 추억의 관방천을 불러보기도 합니다.”
조각달이 추월산에 외로이 뜨고/관방천의 물소리는 처량도 한데/님 가시고 소식 없는 관방천에서/나와 같이 홀로 섰는 종대가 섧다(1절)
풍경소리 양각산에 적막을 깨고/우거진 대밭 속에 뻐꾹새 울면/정만 두고 떠나버린 관방천에서/바람 따라 같이 우는 고목이 섧다(2절)
구부러진 황새목길 홀로 거니는/이 한밤의 하소연을 그 누가 알리/내 청춘이 시들어진 관방천에서/주막집의 깜박이는 들불이 섧다(3절)

광주전남의 원로 대중음악인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가연회(歌演會)라는 모임이 있다. 가연회는 매월 16일 모임을 갖는데 아침부터 오후까지 연주하고 노래하며 시간을 보낸다. 담양에서는 조씨 한명 뿐이다. 조씨는 담양의 원로 대중음악인들의 모임도 주도하고 있다. 담양문화원은 12명의 원로들을 모아 ‘실버악단’을 창단했다. 조씨는 기타와 노래를 맡고 있다. 공연때마다 그는 추억의 관방천을 부른다.
“나는 추억의 관방천을 부른 가수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추억의 관방천을 영원히 남는 노래로 만들고 싶습니다. 영원히 남는 노래를 만들기 위해 노래방 음향기기에 등재하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음향기기에 등재하기 위해서는 작사자와 작곡가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경비도 대략 300만원 정도가 든다. 2008년 담양군은 관방천과 연계한 조각공원 안에 ‘추억의 관방천’ 노래비를 세웠다. 문화의 세기를 맞아 매우 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노래방 음향기기에 ‘추억의 관방천’을 등재하고 싶다는 조씨의 말을 귀담아 들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조규선씨는 또 다른 이력도 갖고 있다. 그가 젊은 시절 권투선수로 활동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권투를 시작했다. 그에게 권투를 가르쳐 준 사람은 ‘김광수’라고 하는 사람이다. 필자도 어렸을 때 담양출신 권투선수 김광수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김광수는 일제 때부터 권투를 했다. 그런데 운동하다 귀를 다쳐 청력을 잃었다. 그래서 그는 이름 대신 ‘먹보(귀먹보, 귀머거리)’라는 별명으로 더 알려졌다. 김광수는 해방이 되고 나서 권투를 접었다. 나이가 들어 선수생활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신 구두 만드는 기술을 익혀 읍내에 구두방을 열었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 구두방을 ‘먹보구두방’이라고 불렀다.
“권투를 하고 싶어서 제 발로 먹보를 찾아갔습니다. 권투를 익혀 대회에도 출전했습니다. 체급은 주니어플라이급이었는데 6.25가 나자 그만 두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내가 남보다 모험심도 많고, 놀기도 좋아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요즘도 술을 잘 마시고, 친구들도 많습니다. 나는 이것저것 따지면서 계산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따지거나 계산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삽니다. 남이 하자는 대로 하고, 좋다고 하는 대로 따릅니다. 그러면 즐겁습니다. 한 마디로 도처춘풍입니다.”
도처춘풍(到處春風)이란 누구에게나 좋게 대하는 일, 또는 그렇게 사람을 말한다. 조씨는 1931년생이다. 나이 팔십이 다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 팔십 나이로 보이지 않는다. 음악과 운동, 그리고 낙천적인 생활태도가 젊어 보이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
젊은 시절 조씨는 이른바 연예활동을 하면서 살았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갈채를 받았다. 때문에 팬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여성팬들에 대해서,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났을 법한 미묘한 사건 등 조금은 답변하고 곤란한 질문을 했다.
“밖에 나가 바람 피다 들켜서 아내 속상하게 하면 못난 남자지요. 안 들켜야 가정이 행복하지요. 나는 아직까지 절대로 바람 안 핀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