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남면 풍암리 2구 여든두살의 이장 이철우씨

마을이 작아 이장 일을 쉬엄쉬엄 해도 됩니다” 누에치기는 화암마을 사람들의 주 소득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었던 것도 누에 덕분 80년대초 30여세대에 200명이 넘었던 마을이 지금은 15세대에 남자

2010-01-26     마스터

대덕면 면사무소에서 운암리를 지나 인적이 드문 산길을 달리다 보면 입석(立石)고개에 이른다. 그리고 고개를 넘어 얼마간 더 화순 쪽으로 달리면 남면 풍암리가 나온다.
필자가 찾아간 곳은 행정구역상 풍암리 2구이다. 자연마을로는 ‘화암(花巖)’이라고 한다. 마을 뒤편 산에 ‘꽃바위’가 있어서 화암마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곳 마을은 또 ‘접실(蝶谷)’이라고 부른다. 나비마을이라는 뜻이다. 꽃바위가 있어서 나비가 날아들었던 모양이다.
“우리 마을의 성(性) 받이는 김, 이, 박 셋입니다. 임진왜란 때 경주 김씨 성을 가진 분이 난을 피해 들어와 처음 터를 잡았다고 합니다. 큰 길이 나기 전에는 첩첩산골이었지요. 들어오시면서 느끼셨겠지만 우리 마을은 소쿠리 속에 들어 있습니다. 최근에 어떤 교수님이 마을에 들렀다가 ‘국원(國園)’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나라의 정원이라는 뜻이 있는데 글자를 보면 ‘국(國)’ 자나 ‘원(園)’ 자가 사각형으로 둘러싸여 있지 않습니까? 마을의 형국을 네모 상자로 보고 그런 멋있는 이름을 붙여준 것입니다. 마을 뒷산은 무등산 뒤편에 해당되고 마을 앞산은 ‘장구맥’이라고 하는데 장구맥 이쪽은 담양이고 저쪽은 화순입니다.”

이곳은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30여 세대에 200명이 넘게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15세대에 19명이 살고 있다. 남자가 4명이고 여자가 15명이다. 이 가운데서 늙은 내외가 노모를 모시고 사는 집이 한곳이고 늙은 내외가 사는 집이 두곳이며, 나머지 12세대는 이른바 독거노인(獨居老人) 세대다. 이 마을의 이장 이철우씨도 10여년전에 부인과 사별(死別)을 하고 혼자 살고 있다. 슬하에 5남 4녀를 두었는데 모두 외지에 나가 살고 있다.
“광주에서 살고 있는 아들과 딸들이 번갈아 가며 반찬을 해다 줍니다. 밥은 전기밥솥이 알아서 해주니까 자식들이 갖다준 반찬에다 식사는 거르지 않고 합니다.”
마을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75세가 넘는다. 90세 할머니가 최고령자이고 박정원 할아버지가 69세로 가장 나이가 어리다. 69세를 어리다고 표현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 69세는 어린 나이에 해당한다.
“저는 아직 젊으니까 개인적으로 나다니면서 할 일이 많습니다. 이철우 이장님은 하다가 쉬다가 다시 한 햇수가 한 30년은 될 겁니다. 우리 마을의 보배입니다. 우리 이장님이 젊었을 때는 기골이 장대하고 힘도 셌기 때문에 마을의 군기반장 노릇도 했습니다. 마을을 위해 일도 많이 하시고, 그래서 상도 많이 받으시고 훌륭한 이장님이십니다.”

남면초등학교 졸업이 이철우 이장의 최종학력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마을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다.
“남들이 마을을 지켰다고 칭찬의 말을 합니다만 제 마음은 다릅니다. 못 생긴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습니다. 제가 잘났으면 이미 대처에 나가 살았지 이런 촌구석에 처박혀 있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까 나이가 들고 마을을 맡겨주고 해서 이장을 30년이 넘게 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이장이 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노인들만 모여 사는 마을이기 때문에 이장 일도 쉬엄쉬엄 합니다.”
이철우 이장은 여든두살 이다. 그런데 처음 보았을 때 환갑을 지난지 얼마 안 되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이것은 듣기 좋아라고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다. 젊어 보이는 것에 대해서 본인도 인정을 하고 마을회관에 모인 마을사람들도 인정을 했다.
“제가 건강하다는 것은 스스로도 인정을 합니다. 건강은 무엇보다도 타고 나야 합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부모님께 고마워합니다. 저는 건강비결을 매사에 욕심내지 않고, 어떤 일이 벌어지면 숨거나 피하려 하지 말고 달려들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팔십 넘게 살아오면서 해방도 맞고, 6.25난리도 겪었습니다. 인민군이 들이닥쳐 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하면 내 주었습니다. 당시에는 시키는 대로 안하면 목숨이 날아가는데 어떻게 안하고 배기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근동의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지만 우리 접실에서는 한명도 죽지 않았습니다.”

84세의 할머니가 대화속에 끼어들었다.
“옛날에는 우리 마을이 정말 살기 좋았습니다. 봄이면 마을 뒤 까끔(비탈진 등성이)이 고사리와 취나물 천지였습니다. 취나물이 어찌나 많던지 상추밭 같았습니다. 요즘은 산도 우거졌고, 또 모두들 힘없는 노인네들이라서 까끔에 올라갈 엄두를 못 냅니다. 그리고 내가 시집왔을 때만 해도 벼농사 외에 담배농사도 짓고, 집집마다 누에를 쳤지요. 동네 산밭이 거의 뽕나무밭이었지요. 이제는 뽕나무밭도 없어지고 묵정밭도 많아요. 그리고 멧돼지들이 내려와서 뒤집어 놓으니까 농사도 맘대로 지을 수 없답니다.”
누에치기는 화암마을 사람들의 주 소득원이었다고 한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었던 것도 누에 때문이었다고 한다. 마을이 생긴 이후 4명의 대학생이 나왔다. 가장 출세한 사람이 누구냐고 다소 생뚱맞은 질문을 했다. 정수기 만드는 회사의 과장이라고 했다.
또 다른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뭐니 뭐니 해도 젊고 건강한 것이 최고지요. 젊었을 때 걸어서 창평장에 다녔습니다. 외동고개를 넘어서 걸어 다녔는데 멀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솔가지를 꺾어 그 위에다 짐을 얹어 끌고 왔습니다. 추워도 추운줄 모르고 더워도 더운줄 모르고 애기들 키우는 재미로 살림 불어나는 재미로 죽어라 일만 했지요. 그때로 다시 가라면 있는 것 다주고 바꾸겠네요.”
또 다른 할머니가 앞 사람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쳤다.
“젊었을 때는 욕심도 많아서 남이 나보다 더 일찍 일어나 들에 나가고, 또 들어올 때는 남보다 늦게 들어 왔지요. 젊었으니까 그랬겠지요. 나도 젊음하고 다 바꾸고 싶소.”

어두워지기 전에 마을사람들이 모여 기념촬영을 하기로 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금방 모여 마을 정자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촬영이 끝나자 이철우 이장이 담배를 피웠다. 의외의 모습이었다. 너무도 젊어 보여 담배를 안 피우는 줄 알았다.
“술은 일생 동안 한 모금도 안했습니다. 그런데 담배는 못끊겠어요. 긴 겨울 밤 담배가 친구가 되어 줍니다. 자식들이 건강에 안좋다고 성화를 대기 때문에 아이들 앞에서는 안피우는 것 같이 합니다. 그래도 담배를 안피우면 너무도 적적할 것 같습니다. 아내가 죽고 나서는 더욱 그렇고, 밤이 긴 겨울에는 더욱 담배 생각이 납니다.”
담배는 백해무익(百害無益)이라고 했다. 담배는 건강의 최대 적이며 모든 암(癌)의 발생 요인이라고 한다. 더군다나 요즘은 흡연을 죄악시 하는 사회풍조도 있다. 그런데 화암마을 여든두 살의 이장 이철우 씨에게는 선뜻 금연을 권하기 어려웠다.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