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광주지방변호사회 최연소 회장을 지낸 국중돈씨

2010-01-29     마스터

“변호사의 본분은 정의사회의 구현입니다”

고등학생 다섯명이 저지른 강도상해사건 변론
무죄와 다름없는 ‘선도조건부 기소유예’로 판결
20년 넘는 변호사 생활 동안 가장 기억에 남아

변호사회장 재임시 개인파산·회생 일괄접수 처리
파산 신청자에게 덤핑아닌 도움을 주려는 것
거액 경비 요구는 돕는 게 아니라 어렵게 만드는 꼴

절대 정치를 안하겠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지역정서 대변보다 변화시키는 정치인이 돼야


2009년 광주전남기자협회와 광주전남시사만화가회에서 ‘광주전남 오피니언 리더 100인’을 선정하여 캐리커처 전(展)를 열었다. 오피니언 리더를 굳이 우리 말로 바꾸어 본다면 ‘여론 주도층’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이 100사람 중에 우리 담양에서는 최형식 전 담양군수, 국중돈 변호사가 선정되었다.
그는 월산면 오성리 내동마을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굳이 그의 학력을 밝히는 까닭은 그의 장형이 연세대학교 법과대학을 나왔기 때문이다. 형제들이 공부를 잘 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시골 살림으로 서울의 사립대에 두 명씩이나 보낸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부모의 교육열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부모님의 교육열에 보답하기 위해 그는 대학 1학년 때부터 사법시험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때가 유신 말기였습니다. 대학가에서 유신체제 반대 시위가 끊이지 않던 때였습니다. 저 역시 적극적으로 시위에 가담했습니다. 그러다가 붙잡혀 한 달간 구류를 살았습니다. 한 달간 살고 나왔는데 나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암담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위 전력이 사법시험에서 걸림돌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사실 대학 1학년생이었으니까 그런 고민을 감당하기는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일단 군대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에 입대했습니다. 그리고 제대 후 복학하여 다시 사시를 준비했는데 시위 전력, 쉽게 말해서 연좌제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1982년 전두환 대통령때 대국민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전력자들에 대한 연좌제가 폐지되었습니다.”

그는 1985년 제27회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그리고 연수원을 수료하고 곧바로 변호사의 길로 들어선다. 그 세월이 20년이 넘었다. 그리고 2007년에 광주지방변호사회 제49대 회장에 당선된다. 역대회장 가운데 최연소였고, 단독후보로서 무투표 당선이었다.
“사실 역대 회장선거의 열기는 대단했었죠. 그런데 제가 뜻을 밝히니까 다른 분이 후보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제가 오랜 동안 변호사 일에 관여를 했는데 그 점이 장점으로 비쳐진 모양입니다. 아마도 제가 회장을 맡으면 회무(會務)를 잘할 거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회장을 맡고 나서 광주지방변호사회에서는 시민을 위한 공익사업에 주력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법률지원단을 구성하여 운영한 것이다. 그 주요 사업들은 개인회생 및 파산사건 지원, 중소기업 법률지원, 새터민(탈북이주자) 및 다문화이주여성 법률지원 등이다.
“제가 회장을 맡았던 때 특히 많았던 개인회생과 파산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그 비용이 300만원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파산사건은 60만원, 회생사건은 50만원으로 정하고 변호사회에서 일괄 접수하여 처리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법무사 쪽에서 덤핑을 한다고 불만의 소리를 냈고, 변호사 가운데서도 제살 깎아먹기라며 찬성하지 않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려워서 회생이나 파산을 신청하는 사람들에게 거액의 경비를 요구하는 것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꼴이지요.”

국중돈 변호사가 광주지방변호사회장을 지내고 난 다음 일부 담양 사람들은 혹시나 그가 정치적 행보를 하지는 않을까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의 생각은 어떨까? 인간을 학명(學名)으로 ‘호모 폴리티구스(Homo Politicus)’라고 한다. ‘정치적 인간’, 또는 ‘정치적 동물’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정치를 통하여 사회생활을 이루는 특질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대적으로 정치를 안하겠다고 답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렇다고 당장 정치행보를 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정치인들을 보면 지역정서를 대변하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만약 지역정서를 대변하는 정치인 노릇만 한다면 호남은 영원히 소외지역으로 남을 겁니다. 지역정서를 변화시키는 정치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정치구도가 혁신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요원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언젠가는 혁신이 되겠지요. 할 수만 있다면 정치해야 합니다. 그래야 국민을 위해 큰 봉사를 할 수 있으니까요.”
국 씨의 이 말은 반드시 정치를 하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국가의 발전을 위해 우리의 정치구도가 혁신되어야 한다는 의견으로 들렸다.

20년 넘게 변호사 일을 하는 동안 기억에 남은 사건은 어떤 것일까?
“일을 시작한 초기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등학생 다섯명이 집단으로 저지른 강도상해사건의 변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선도조건부 기소유예’로 재판이 끝났습니다. 글자 그대로 선도하겠다는 조건부로 기소를 유예하는 겁니다. 겉으로 보면 무죄 석방이나 다름없지요. 그런데 이 선도조건부 기소유예라는 제도가 전국 최초로 광주검찰청에서 제도화 되었던 겁니다. 그 후로 전국 검찰청에서 이 제도를 운용하게 되었는데, 청소년들을 전과자로 만들지 않고 선도하는 효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제도가 생긴데는 우리 담양분의 공이 지대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 인물이 바로 국승준씨라는 것이다. 당시 광주검찰청장은 초대 헌법재판관을 지낸 김양균 검사장이었고, 국승준씨는 광주검찰청 선도위원이었다. 이 두 사람이 앞장서 ‘선도조건부 기소유예’라는 제도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국중돈 변호사는 ‘국승준씨는 대한민국 검찰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훌륭한 분’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그는 요즘 책읽는 재미에 푹 빠졌다고 한다.
“저는 한참 열심히 책을 읽어야 할 대학시절에 거의 법률서적만 끼고 살았습니다. 사실 변호사나 의사가 되기 위해 하는 학문은 남을 위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저는 좀 뒤늦기는 했지만 나를 알기 위해 인문학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인문학에 대해 나름으로 정립을 하고 있었다.
“서구문명을 알려면 성서와 그리스로마신화를 읽어야 한다고 하는데 최근에 정독을 하고 나서야 그렇게 말한 까닭을 알았습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최근 들어 새뮤얼 헌팅턴이 지은 ‘문명의 충돌’을 읽었습니다. 냉전종식후 우리는 끊임없이 발생하는 문명의 충돌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우리 대한민국이 결국은 중국의 영향권에 들어갈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의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당연히 TV나 전화기도 없었다. 중학교 3년 내내 자전거 통학을 했다. 그 소년이 이제는 중견 변호사가 되었다. 그리고 2009년 광주전남 오피니언리더 100인의 대열에 서 있게 되었다.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