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모교(母校) 사랑이 각별한 허균용씨
나의 모교는 담양남초등학교 하나뿐입니다” 오십 중반 때까지 끼니 걱정할 정도로 어렵게 살아 내가 어렵게 살아봐서 어려운 사람의 처지 잘 알아 후배들이 배우는데 불편 덜어주려고 총동문회 관심 배움의

2009년말, 허균용씨는 담양남초등학교 총동문회에 1천만원의 장학금을 내놓았다. 허 씨는 장학금의 이름을 ‘자립장학금’이라고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경영하고 있는 농장이 ‘자립농장’이다. 자립농장은 용면 쌍태리에 소재하고 있는데, 현재 소를 기르고 있는 읍 금월리 집도 자립농장이라고 부른다.
평소에도 모교 사랑이 각별한 허 씨가 이번에 내놓은 장학금 역시도 아주 각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이 장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3년동안 매일 1만원씩을 저축했다. 모교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어느정도 여유돈만 있다면 누구라도 1천만원 정도의 장학금은 선뜻 내놓을 수 있다. 그러나 3년동안 매일 1만원씩을 저축하여 마련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3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저축을 한 것이 아니라, 3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모교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차곡차곡 쌓아올렸던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 모교는 오로지 담양남초등학교 하나뿐입니다. 지금도 모교 정문앞을 지날때 뭉클한 감회가 솟습니다.”
허 씨는 담양남초등학교 3회 졸업생이다. 그동안 모교와 관련한 여러가지 일들을 했다. 후배인 김정조씨 등과 뜻을 모아 총동문회를 결성하고 연이어 1대, 2대 회장을 지냈다.
허 씨가 회장을 맡고 있을 때 사무국장을 맡았던 김정조씨의 말이다.
“연이어 회장을 지내면서 모교발전을 위해 여러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총동문회 장학금을 마련했고, 회장님의 농장에서 많은 관상수를 싣고 와서 손수 교정(校庭)에 심기도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꽤 많은 돈을 들여 정문을 새롭게 단장도 했으며, 이밖에도 그가 모교를 위해 봉사하고 희사한 일들은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허균용 회장님은 우리 남초교 총동문회 정신적 지주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어린시절 그는 아주 가난하게 살았다. 집에 우환(憂患)이 생기기 전에는 논이 스무 마지기가 넘는 부자였다. 그런데 어머니가 말라리아에 걸리면서 살림이 기울기 시작했다. 말라리아에 걸린 어머니가 약을 남용(濫用)하는 바람에 실명의 위기에 놓인 것이다. 논을 팔아 안과에서 치료를 했다. 그러나 살림만 없어지고 어머니는 장님이 되었다. 그때 4학년이던 허 씨도 말라리아에 걸려 6개월동안 학교에 못나가기도 했다.
“우리집 살림이 어머니 눈을 치료하는데 다 들어갔다고 봐야지요. 어머니 나이 47세때 실명이 되었는데 97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장님으로 50년을 사셨는데 덕분에 효자라는 말을 듣고 상도 받았습니다. 아내는 효부(孝婦) 상을 받았고요. 인생은 상대성이 있더라고요. 어머니가 장님이 아니었으면 효자나 효부상을 어떻게 받았겠습니까?”
논과 집이 없어지고 셋방살이 신세가 되었다.
허 씨는 대규모로 소를 기르고 있는 전문 축산인이다. 그리고 소를 길러 성공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한때 대규모로 양계(養鷄) 사업을 한적도 있다. 양계와 병행해서 양돈(養豚) 사업도 했다.
“닭은 최고 4만수까지 길렀습니다. 그와 병행해 돼지도 800마리 길렀습니다. 그때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여섯명이나 되었습니다. 닭도 많고 돼지도 많고, 식구들도 많았습니다.”
양돈(養豚) 사업은 지역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40대 중반에 양돈을 시작했다. 제주도에서 암수 두 마리를 가져왔다. 맨드래스라고 하는 품종으로 흰색이었다.
“흰색 돼지가 있다는게 신기했습니다. 그전에는 한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날마다 사람들이 구경을 하러 왔지요. 그 두 마리가 새끼를 쳐서 800마리가 된 겁니다.”
그가 축산을 시작한 것은 결혼 직후부터였으니까 올해로 45년이 된다. 거의 반세기다.

“처음에는 토끼를 길렀는데 장마가 왔다하면 몰살을 해버립니다. 그때는 사료가 없으니까 매일 꼴 베는 일도 쉽지 않았고, 장마때마다 몰살을 하고, 또 별로 소득이 없어 그만 두고 양계를 생각했습니다.”
양계를 시작하려는데 닭장 지을 땅도 없었고, 병아리 살돈도 없었다. 그는 결혼반지를 팔았다. 그 돈으로 광주 부화장에 가서 병아리 50마리를 사왔다.
“어머니의 실명으로 집안형편이 어려워 셋방살이를 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사과궤짝(당시에는 목재로 만들어졌음)에 담아 방 안에서 키웠습니다.”
그는 축우(畜牛)를 시작하기 전 양계 15년, 양돈 8년을 했다.
축우에 대해서는 동석하고 있던 그의 아내가 한 마디 거들고 나섰다.
“지금까지 해보니까 돼지 키우기가 소 키우기보다 훨씬 힘듭니다. 돼지는 우선 새끼를 자주 낳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79년쯤인가 그 무렵, 아주 심하게 돼지파동이 왔습니다. 하루는 친정아버지하고 남편이 돼지 여러 마리를 싣고 나가더니 저녁때 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왔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소가 6마리로 늘어났다. 그리고 1979년, 현재 살고 있는 곳에 100마리를 기를 수 있는 축사를 짓고 이사를 했다.
그는 현재 비육우 150두를 기르고 있다. 최고 300두까지 기른 적이 있다. 그는 축산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부지런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축산인 허 씨는 모교를 각별히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주위사람들 돕는 일도 많이 하고 있다. 그는 젊은 시절 마음속에 두 가지 한을 담고 살았다고 한다. 가난과 많이 못 배운 것이었다.
“오십 중반이 될 때까지 저녁 먹고 나면 내일 아침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어렵게 살았습니다. 내가 어렵게 살아봐서 어려운 사람의 처지를 잘 압니다. 그런데 받게 되면 나도 언젠가는 갚아야지 하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러나 주게 되면 마음이 아주 편합니다. 모교에 사랑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비록 어렵게 학교에 다녔고, 또 중학교에 진학을 못했지만 우리 후배들이 학교에 다니며 불편한 점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려고 총동문회에 관심을 갖게 된 겁니다. 가정적으로 볼 때도 내가 배를 곯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들은 원하는 대로 가르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허 씨는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그는 자녀들의 학업에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를 했다는 것을 자부한다고 했다. 자녀들 역시도 허 씨의 마음을 알고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허 씨의 네 자녀 중 두 명이 박사(博士) 학위를 취득했다.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