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2010년(庚寅年), 백두 살이 된 박나부 할머니
“요로케 오래 산 사람 봤소? 부끄럽소.” 67세가 된 아들 이돈응씨 부부와 함께 살며 아들 내외가 집을 비울 때도 끼니 직접 챙겨먹고 건강을 위해 몸을 움직이려고 손수 빨래를 하고 장녀 82세 등 슬하

2010년 1월 1일 현재, 담양군 관내에서 백 살을 넘긴 고령자들은 여덟 명이다. 그 중에서 최고령자인 109세 국운산 할머니를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대전면 응용리에 주소를 두고 있는 국 할머니는 노환이 깊어져 요양원에서 장기요양 중이어서 만나기가 어려웠다. 다음으로 봉산면 양지리 김순덕 할머니가 105세, 창평면 해곡리 서 애 할머니가 104세인데 이들 할머니들은 기록상 착오가 있다고 했다. 그 다음이 담양읍 향교리의 정족오 할머니가 103세인데 거동이 불편하여 겨우 집 마당 안에서 활동할 정도이며 귀가 어두워 대화를 나누기에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이런 저런 까닭으로 박나부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대전면 대치리에 살고 있는 박 할머니는 102세인데 아직도 활동이 왕성하고 대화를 나누기에 전혀 불편함이 없다고 했다.
박 할머니 뒤로는 무정면 안평리 정아지 할머니와 수북면 풍수리 이옥례 할머니가 101세이고, 그 다음이 담양읍 삼만리 오수복 할아버지가 100세이다. 100세 이상의 고령자 중 남자는 박 할아버지 한 명이다.
박 할머니와의 첫 대면을 하는 순간 필자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할머니는 아직 여든도 돼 보이지 않았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있는 자세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말씨는 또렷했으며, 그리고 여유까지 보여 주었다.
“어디 가서 요로케 오래 산 사람 봤소? 너무 오래 살아서 부끄러운디 뭔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오셨소?”
할머니가 짐짓 장난기 섞인 인사를 하며 맞아주었다. 할머니의 이름은 박나부이다. 호적에는 박나부(朴羅扶)로 실려 있다.
“우리 친정 아부지가 나비처럼 이쁘다고 나부라고 불렀다요. 우리 아부지는 내가 열 살 되던 때 마흔에 돌아가셨어. 그리고 친정어머니는 아흔셋에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1세기가 다 지난 옛 일도 바로 엊그제처럼 기억하고 있다.
“내가 기유생(己酉生)인께 닭띠여. 열일곱 살에 나보다 네 살 더 먹은 대치 총각한테 시집을 왔어. 그런디 영감님이 빨리 돌아가셨어. 내가 서른여섯이고 영감님이 막 마흔이 되던 해 섣달 스무 나흗날(음력 12월 24일) 먼저 돌아가셨제.”
서른여섯에 홀로 된 할머니는 다섯 자녀를 키우면서 고생도 많았다고 한다.
“주로 남의 집 대소사에 불려 다니면서 음식을 만들어 주면서 살았제. 우리 친정어머니 음식 솜씨가 좋았어. 그런디 따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어깨 너머로 한 번만 보면 못 허는 것이 없었제. 내가 백여시(백여우)여. 그러고 남의 집 삯바느질도 허고 길쌈도 많이 했어.”
해방 전 박 할머니의 집은 꽤나 넉넉한 살림이었다. 일제말기 때 남편은 비단이나 설탕 등을 취급하는 장사를 했다. 당시로선 시골에서 구경하기도 어려운 축음기, 자전거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일제는 전세가 기울자 대전면 월본리에 있는 격납고(格納庫)에 비행기를 감추려고 대치리 중심가의 도로를 넓히기 위해 이를 위해 강제 철거를 했다. 그 바람에 박 할머니의 집도 뜯기고 그로 인해 가세가 기울었다.

박 할머니는 현재 올해로 예순일곱 살이 된 아들 이돈응씨 부부와 함께 살고 있다. 할머니는 슬하에 딸 넷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위로 딸이고 막내가 아들이다. 자녀들 역시 나이가 많이 들었지만 모계(母系)의 내림인지 모두 건강하다고 한다. 올해 장녀 나이는 82세, 차녀 79세, 삼녀 74세, 사녀 72세, 막내아들 67세이다. 자녀들의 나이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일날은 물론이고 자녀들의 생일날까지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영감님 제삿날이 섣달 스무나흗날, 내 생일은 섣달 열나흗날, 큰딸 생일은 섣달 초이틀, 둘째딸은 삼월 열여드레, 셋째는 팔월 스무하루, 넷째는 시월 초닷새, 아들은 섣달 그믐, 며느리는 사월 스무아흐렛날......”
아직도 여든 안쪽으로 보이는 할머니의 건강 비결은 무엇일까?
“건강하게 살고 있는데 특별한 것은 없어. 고기는 별로 안 좋아하고 채식에도 소식을 허제. 그리고 국이 없으면 밥을 못 먹어. 그래도 이날까지 병원에 입원해 본 적은 없어.”
그렇지만 딱 한 번 삼일 동안 입원한 적이 있다.
“아흔여섯에 맹장 때문에 입원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의사들이 고령이라서 마취에서 안 깨어날 수도 있다면서 수술을 꺼렸습니다. 약이나 투여하면서 지켜보자고 했는데 그 말이 돌아가실 때까지 지켜보자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시간을 끌다가 맹장염이 복막염으로 발전해 고생을 많이 하셨죠. 결국 수술을 했는데 젊은 사람들보다 더 빨리 마취에서 깨어나니까 의사들이 놀래더군요. 그런데 어머니한테 오랜 지병이 하나 있습니다.”
할머니는 서른다섯 살부터 천식(喘息)을 앓고 있다. 무려 67년 동안 천식치료제를 복용하며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제 어머니의 경우를 보면 장수하는 데는 가족 내림도 있고, 또 운명(運命) 같은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6·25때 돌아가실 뻔한 일을 넘긴 적도 있습니다. 당시 둘째누님(현재79세)이 우익단체인 한국청년회(한청) 부녀회 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좌익이 들어와 세상이 바뀌니까 누님은 몸을 숨겼고, 그들은 어머니를 닦달했지요. 와서 보니까 어머니는 천식이 도져 엎드려 있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이 송장이었지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내버려 둬도 죽을 텐데 하면서 그냥 가버렸습니다. 돌아가시기로 했으면 그 때 돌아가셨을 겁니다.”
할머니는 지금도 속옷 빨래는 손수 한다. 건강을 위해 움직이기 위해 손수 빨래를 한다는 것이다. 끼니를 거르는 법이 없다. 아들 내외가 집을 비울 때면 직접 챙겨먹는다.
그런데 요즘은 겨울이라 실내에서 지낸다. 고질인 천식 때문에 감기를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집 안에서만 지내지만 심심하지는 않다고 한다. 낮잠을 자는 시간 외에는 텔레비전을 즐겨 본다고 한다. 아들은 바빠서 텔레비전을 자주 못 본다. 그래서 할머니는 뉴스를 보고 실시간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아들에게 알려주기도 한다. 필자가 찾아간 날이 3월 2일이었는데 할머니는 어제가 ‘3·1절’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흔히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박 할머니를 보면서 그 말을 절감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자 할머니도 따라 일어섰다.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그야말로 거뜬하게 일어선다.
“며느리가 없어서 대접도 못하고 서운하네. 악수나 한 번 합시다.”
할머니가 양손으로 내 손을 잡아 준다. 손길이 그지없이 따뜻하고 부드럽다.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