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등불장학회’ 초석을 놓은 ‘아름다운 사람’

“골목길에 등불이 되고파!” 2009년 7월 30일 담양군에 토마토 상자 배달 ‘등불이 되고파…’ 쪽지 한 장과 2억원 돈뭉치 담양군 ‘등불장학회’라는 명의 통장 만들어 관리 2010년 2월 또 1만원권 200매

2010-04-20     마스터

초등학교 4학년 국어책에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글이 나온다. 그리 길지 않은 글이므로 그 전문을 소개해 본다.
《우리 나라에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이 평생 모은 돈을 기부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 권정생 선생님과 이복순 할머니, 유일한 박사님이 대표적입니다.
권정생 선생님께서는 ‘강아지 똥’, ‘몽실 언니’ 등을 쓴 동화작가입니다. 선생님께서는 평생 새 옷을 거의 입어 보지 못하셨고, 항상 검은 고무신과 낡은 셔츠 차림으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집도 5평 남짓한 오두막에서 사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웃에게는 한없이 베푸는 삶을 사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자신에게 생기는 인세(印稅)를 굶주리는 북한 어린이들을 위하여 써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이복순 할머니께서는 우리에게 김밥 할머니로 더 유명합니다. 이복순 할머니께서는 평생을 어렵게 김밥 장사를 하셨습니다. 그러다 지난 1990년, 평생 김밥을 팔아 모은 50억 원대의 재산을 충남대학교에 기부하셨습니다. 충남대학교에서는 할머니의 기부 정신을 기려 국제문화회관의 이름을 정심화국제문화회관이라고 하였습니다.


유일한 박사님께서는 아홉살의 나이로 미국에 건너가 스스로 돈을 벌면서 모든 역경을 이겨 낸 분입니다. 박사님의 원래 이름은 유일형이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빼앗긴 조국을 잊지 않기 위하여 ‘일한’으로 이름을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 돌아와 ‘유한양행’이라는 제약회사를 설립하여 일생을 국민건강에 힘쓰셨습니다. 유일한 박사님께서는 자신이 세운 회사를 비롯하여 전 재산을 사회에 되돌려 준 참된 기업가이십니다.
세 분은 열심히 일하며 평생 모은 재산을 기부한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세 분의 삶처럼 다른 사람을 도울 줄 아는 삶을 삽시다.》

2009년 7월 30일, 담양군에 토마토 상자가 하나 배달됐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비아우체국 택배였다. 택배를 보낸 사람은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 2가에서 대영서점을 운영하는 김영만씨였다. 그런데 이 상자를 뜯어본 군 관계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택배 상자 안에는 거액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담양군은 즉시 김영만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거짓 전화번호였다. 뿐만 아니라 충장로 2가에는 대영서점도 존재하지 않았다.
담양군은 기탁자의 신원을 알아보기 위해 비아우체국에 확인 요청을 했다. 비아우체국에서는 CCTV(폐쇄회로)에 나타난 60대 남자를 지목했지만 얼굴 모습은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익명이었고, ‘얼굴 없는 기부 천사’였다.


정확한 신분을 확인할 수 없었던 담양군은 담양경찰서에 의뢰하여 경찰관 입회하에 액수를 세지 않고 농협군지부 담양군 출장소 금고에 영치했다. 그리고 다음날 기부심사위원회를 열었다. 회의를 마치고 상자를 개봉한 결과 5만원권 1억4천400만원과 1만원권 5천600만원 등 모두 2억원이 들어 있었다.
상자 안에는 손으로 쓴 쪽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쪽지의 내용은 이렇다.
《골목길에 등불이 되고파! 일찌기(일찍이) 파란 신호등처럼, 그러나 적신호가 행동을 막아, 이제야 진행합니다. <소방대 장학금> -5년 이상 된 자녀, -2, 4년제 1~2명, -졸업시까지 매년 지급, -읍면장 추천으로 군에서 집행, -현재액+α(알파). 발췌 2009. 7. 29자 군민신문》
돈의 액수와 동봉한 쪽지의 내용을 확인한 담양군은 7월 31일 부군수 주재로 기부심사위원회를 열었다. 회의를 통해 담양군은 익명을 요구하는 기부자의 순수성을 받아들여 인재육성 장학금으로 접수하면서 ‘소방대 장학금’으로 써 달라는 기부자의 의견을 존중해 가칭 ‘등불장학회’라는 명의로 별도의 통장을 만들어 관리하기로 했다.

그런데 2010년 2월 4일, 담양군청 행정과에 당시 담양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 아무개 군이 이른바 자양강장제라는 드링크 상자를 하나 들고 찾아 왔다. 그런데 그 상자 안에는 1만원권 200매가 들어 있었다.
이날 김 군은 학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익명의 남자로부터 상자를 전해달라는 심부름을 부탁받았다. 김 군은 ‘마스크와 모자를 쓴 어떤 할아버지가 군청 행정과에 갖다 달라고 부탁해서 가져왔다’고 했다. 김 군 역시도 기탁자의 얼굴 모습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2009년 7월에 우체국 택배를 이용했는데 이번에는 인편을 이용한 것이다. 담양군은 비아우체국에서 지목한 60대 남자와 동일인으로 추측했다. 2009년 7월에 2억원을 기탁하면서 플러스 α(알파)라고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킨 것이라고 추측했다.
상자 안에는 2통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한 통의 편지에는《첫 봄을 밝혀야 할 등불이 심지가 너무 짧아 더 밝은 쌍등불의 기름이 되기를- 2010. 2. 4 의사모 군민 拜》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다른 편지에는 《감사합니다. 담양장학회 등불장학금의 첫 단추로 사용해 주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성서(聖書)에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가르침이 있다. 그러나 우리네 범부(凡夫)들은 그걸 실천하기 어렵다. 그런데 익명의 기부 천사는 이를 실천했고 나아가 ‘등불장학회’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2010년 4월 1일 ‘등불장학생 장학증서와 장학금’이 전달되었다. 장학금을 받은 사람은 기부자의 뜻에 따라 담양군 관내 의용소방대원 자녀 2명이었다. 군 관계자는 “장학금 수혜를 받은 학생들이 졸업 후 ‘대숲맑은 장학기금 1인1구좌 갖기 운동에 동참해 장학금 기탁 릴레이를 이어가 사랑의 불씨가 꺼지지 않는 장학재단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담양군 관계자의 말처럼 기탁 릴레이가 이어진다면 담양에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점점 많아질 것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생텍쥐페리는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사막 어딘가에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 사회가 아름다운 것은 각박하고 삭막해 보이는 우리 사회 어딘가에 아름다운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익명의 기부천사로부터 2억원이라는 거액이 답지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놀랬고, 기부자가 과연 누구일까 이런 저런 추측도 해 보았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명탐정이라도 된 것처럼 기부자가 아무개가 분명하다고 단정을 하기도 했다. 심정은 가는데 물증이 없어 꼬집어 말할 수 없다며 기부자의 신분을 밝혀내지 못한 걸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걸 파헤쳐내는 것은 실례가 된다. 익명으로 남겨 두는 것이 그에 대한 최대의 예의가 될 것이다.

돈이 많아서 쓰는 것은 아니다. 쓸 줄 아는 사람이 돈을 쓰는 것이다.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