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항일(抗日)과 민족정기의 표상 ‘대성사(大成祠)’ 원장 임노덕씨
“이제 고향 생각하며 여생 보내고 싶습니다” 1931년 대성계 계원·지역민 주축 대성사 건립 민족정기 고양 취지 공자·주자·포은 등 삼위 봉양 일제, 6·25 등으로 자료·문헌 소실돼 사당 폐허 중건 당시

대전면 이구산 산기슭에 ‘대성사(大成祠)’라고 하는 사당(祠堂)이 있다. 그런데 담양의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사당이 있다는 것을 잘 모른다. 사당의 존재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이 사당이 건립된 뜻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 필자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대성사의 원장 임노덕씨를 만나고 나서야 그 세세한 내력을 알게 되었다. 이 사당을 건립하게 된 것은 항일(抗日)과 민족정기(民族正氣)의 고양(高揚)이라는 또 다른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대성사는 공자(公子), 주희(朱熹, 朱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등 삼위(三位)를 봉안(奉安)하고 있다.

1910년 경술년(庚戌年)에 이르러 대한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는 치욕(恥辱)의 역사를 맞는다. 그리고 19년이 흐른 뒤 1929년 봄, 서평(西坪) 김기상(金基尙) 선생이 행성마을에 머물며 자그마한 서당(書堂)을 마련하고 후학을 가르치게 된다.
“당시 담양 공의(公醫)였던 문병구(文炳九)어른께서 김기상 선생과 각별한 교우(交友)를 맺고 지내셨다고 합니다. 문병구 어르신은 민선 1, 2기 담양군수를 지낸 문경규 전 군수의 선친입니다. 그런데 문병구 어르신이 주동이 되어 지역의 이재묵(李載?), 이진기(李鎭基), 이필순(李弼淳), 오학순(吳鶴洙) 어르신 등 다섯 분이 모여 김기상 선생의 원활한 교육을 돕기 위할 목적으로 ‘대성계(大成契)’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경술국치를 당하고서도 20여년 동안 민족의 수난상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 것은 불효(不孝)요 불충(不忠)이라고 각성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성계를 만든 것은 후학의 교육에도 목적이 있었지만 배일(排日)과 항일(抗日), 그리고 민족정기를 고양한다는 목적도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대성계가 만들어질때 여러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대전과 수북면에서 176명, 광주, 광산, 장성, 전라북도 태인 등 10개 지역에서 100명 등 모두 276명이 대성계에 입계(入契)했다. 대성계는 흔한 친목단체가 아니었다.
대성계가 만들어지고 나서 이듬해인 1931년, 대성사(大成祠)가 건립되었다. 그런데 이 대성사 건립은 외부의 도움 없이 대성계 계원들과 지역민들의 손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전국에 250여개의 향교(鄕校)나 이와 유사한 사우(祠宇)가 있습니다. 이 사우들은 대개가 국가기관의 보조나 지방 토호(土豪)들의 독지(篤志)로 건립된 것들입니다. 그러나 대성사는 순수하게 지역민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특이할 만한 일입니다. 건립 찬조금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노동력, 다시 말해서 울력을 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지역민들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대성사는 일제치하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대성계의 세도 약화되었다. 대성계원들은 일제하에서 군대나 징용으로 끌려갔다. 지역 노인들이 대성계의 명맥을 유지하면서 어려운 가운데서도 춘향(春享), 추향(秋享) 제사를 지냈다.
그러는 가운데 해방이 되고, 이어서 좌우익의 대립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졌고, 급기야 6.25전쟁이 일어났다.
“이런 혼란을 겪고, 그 후 60여년이 흐르면서 대성사와 관련한 자료나 문헌이 소실되고 사당은 폐허가 돼버렸습니다. 그런데 2003년, 문경규 전 담양군수가 나에게 대성사 원장을 맡아달라는 청을 해왔습니다. 사우도 수축(修築)하고, 대성사가 처음 건립되던 당시의 숭고한 뜻도 이어나가게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사실 나는 그 방면에 지식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고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 전군수가 세번을 찾아와서 전라남도나 담양군에서 예산도 지원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우 수축이 마무리될 때까지 딱 일년만 하겠다면서 원장을 맡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대성사 강당인 이산재(尼山齋)와 관리사를 중건하고, 이어서 홍전문(紅箭門), 묘정비(廟庭碑), 외곽 담장 등을 만들었다.
“처음 약속은 딱 1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3년 임기인 원장을 세 번째 연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60년을 고향을 떠나 살다가 탯자리로 돌아와 살고 있습니다. 그런 내가 대성사 원장이라는 중책을 맡는다는 것이 무리하다 싶어 고사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생각해 보니 고향이 내 여생에 정말로 뜻 있는 일 한번 해보라고 마지막 기회를 준 것 같습니다. 그동안 내가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면서 한량처럼 살았습니다. 특히 젊은 시절에는 사냥에 빠져 그야말로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요즘에야 사격이라고 해서 올림픽 종목에도 들어가지만 그 시절에는 총쟁이라고도 하고 점잖은 말로는 엽사(獵師)라고도 했습니다. 이제는 고향 생각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이제는 고향을 생각하며 대성사 원장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임 씨는 광주전남 체육회의 대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력을 간략히 정리해 보겠다.
그는 올해 여든네 살이다. 이정도의 연배에 자가운전을 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런데 그는 1952년에 운전을 시작했고, 1954년에 자가용을 몰고 다녔다. 지금도 자가운전을 하고 다닌다. 이 점도 특이한 이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사격과 관련한 이력을 정리해 보겠다. 1957년, 전남 엽도회(獵道會) 총무를 맡으면서 사격과의 인연을 맺는다. 1961년부터 17년 동안 전라남도 사격연맹 전무이사. 1961년부터 14년 동안 전국체전 전남도 대표 사격선수(트렙, 공기총). 1974년 대한사격연맹 감사(4년), 1978년부터 26년 동안 전라남도 사격연맹 상임부회장. 1989년 한일 라이플 친선사격대회 일본 참가단 단장(한국 우승). 2005년 전라남도 사격연맹 회장. 그 외에 국내외 사격대회에서 심판도 많이 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담양군 사격팀이 전라남도 도민체전에서 29년 연속 우승을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빼놓을 수 없는 이력 중 하나다.
“젊은 시절에는 친구와 술 좋아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사니까 인맥이 많아져 살림에도 보탬이 되더군요. 30년 동안 전남 극장협회 전무이사도 했습니다. 돈보다도 자유스럽고 싶어서 그 일을 했던 겁니다. 당시 광주와 전남에 영화관이 31개였는데 극장을 하면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젊은 시절 친구 좋아하고 술 즐겨 마셨다는 임 씨는 애주가로도 소문이 나 있다.
“50도 이상 독한 술이 아니면 잘 안마셨습니다. 운전을 할때도 차에다 양주 한병을 싣고 다녔습니다. 술이 깨면 잠이 오니까 마시면서 운전을 했습니다. 요즘은 음주운전하면 걸리지만 그때는 안그랬습니다. 누구하고 술상대를 할때 먼저 쓰러진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술 마시고 실수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술은 어른한테 배우라고 했는데 내가 술을 잘 배운 모양입니다.”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