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의병장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의 종손(宗孫) 고영준씨

“‘창평의진(昌平義陣)’은 호남의병의 중심이었습니다” 창평고씨는 ‘삼부자 불천위(三父子 不遷位)’ 집안 증조부 녹천은 죽창 아닌 총을 들고 싸운 ‘의병 1호’ 학봉 고인후 14대 손이 끊겨 양자가 된

2010-06-18     마스터

장흥 고씨(창평 고씨) 집안은 임진왜란 때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준봉(準峰) 고종후(高從厚), 학봉(鶴峰) 고인후(高因厚) 삼부자가 순국(殉國)했다. 창평 고씨는 ‘삼부자 불천위(三父子 不遷位)’ 집안이다. ‘불천위’란 신위를 이리 저리 옮기지 않고 한 자리에서 계속 모신다는 뜻이다. 제아무리 명문가(名文家)라 해도 4대가 넘으면 신위(神位)를 묘 앞에 묻고 그 후부터는 시제(時祭)를 모신다. 그러나 임금의 특명에 의해 ‘부조묘(不兆廟)’라고도 하는 불천위가 되면 신위를 묘 앞에 묻지 않고 계속 모시게 된다.

임란의병장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에게는 준봉(準峰) 고종후(高從厚)와 학봉(鶴峰) 고인후(高因厚)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제봉의 둘째아들 학봉의 14대에 이르러 손(孫)이 끊기게 되었다. 그래서 양자(養子)를 들이게 되었는데, 장흥에서 살고 있는 고영준씨가 지목되었다.

“대학 졸업후 세관에 근무했는데 4~5년 동안 매주 주말이면 창평에 내려왔습니다. 종손이라는 책임감 때문이었습니다. 결혼후에는 직장을 광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40대 초반에 이르러 직장을 그만 두고 조상을 모시는 일에만 전념하기 시작했습니다. 녹천은 나로서는 증조부가 되십니다. 집안 어른들은 녹천보다 업적이 미미한 다른 의병들도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데 녹천은 직계 손이 없고, 후손들이 별 볼일 없으니까 묻혀 있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거적 할아버지에 비단 자손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녹천은 칼이나 죽창을 들고 싸운 것이 아닙니다. 총을 들고 싸운 의병 1호입니다.”

고 씨의 노력으로 1974년에 ‘녹천 유고(鹿川 遺稿)’가 발간된다. 고 씨가 자비(自費)로 출간한 것이다. 그후 한자로 된 이 유고집을 담양문화원에서 국역(國譯)을 했다. ‘사단법인 한말의병장 녹천 고광순 의사(義士) 기념사업회’도 발족이 되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사당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야만 신위도 제대로 모시게 될 것이고 문중(門中)의 구심점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 씨가 사당건립을 계획한 것은 1969년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다. 사당을 녹천의 생가터에 짓기로 했다. 그런데 이 생가터를 1907년 일본군이 방화를 해 버렸고, 주인도 바뀌어 있었다. 다행히도 주인이 대지 일부를 내주어 사당을 지을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로 쓴 ‘포의사(褒義祠)’라는 현판(懸板)을 보내 주었다.

“처음 사당을 지을 때 녹천의 순국현장인 구례 연곡사도 생각해 봤습니다. 당시 연곡사에서 순국하신 분이 열세 분입니다. 그 가운데서 고광순, 고제량 두분만 이름이 밝혀지고 나머지 열한분은 무명입니다. 나는 그 열한분도 담양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 서거후 정보기관에서 와서 포의사라는 현판을 걸게 된 까닭을 꼬치꼬치 물었습니다. 별로 느낌이 안 좋아 현판을 떼어 집에서 보관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포의사는 오랜 동안 방치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다가 민선2기에 들어서서 포의사 이전 계획이 만들어지고, 민선3기에 와서 현재의 위치로의 이전사업이 시행되었다.

“창평에 포의사를 건립한 것은 역사적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의병은 ‘호남의병’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리고 호남의병 가운데서 ‘창평의진’의 의병운동은 우리 의병사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강압적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한다. 이렇게 되자 ‘의병굿’이라고 할 정도로 각처에서 의병 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간다. 1906년에 태인의 최익현, 임병찬 등이 기병하고, 1907년에는 장성의 기우만, 남원의 양한규, 광양의 백낙구, 장흥의 백홍인 등이 기병한다. 그러나 이들 의병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체포되거나 패퇴하고 만다.

오직 고광순의 창평의병만이 남게 된다. 1906년 11월 6일, 녹천은 광양의 백낙구 등과 함께 순천읍을 공략하기로 한다. 그러나 모인 군세가 미약해 순천 공략은 실패하고 백낙구 등 주모자가 체포된다. 그러나 녹천은 굴하지 않고 1907년 1월 24일, 고제량 등 지사들과 함께 담양군 대전면 저산(猪山)의 전주 이 씨 제각에서 의진을 결성한다. 그후 능주의 양회일, 담양의 이한선, 장성의 기삼연 등과 힘을 합쳐 창평, 능주, 동복 등에서 활동을 전개한다. 후학들은 이렇듯 녹천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의병진영을 ‘창평의진(昌平義陣)’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하고 있다. 일제조차도 녹천을 ‘호남의병의 선구자’, ‘고충신(高忠臣)’이라고 불렀고, 또 깎아내리기 위해 ‘거괴(巨怪)’라고 했다.

1907년 8월, 고종의 ‘의병해산’ 칙령을 전후해 의병의 근거지를 섬멸하기 위해 일제는 의병장과 의병의 집을 불태우고, 가족을 참살한다. 집이 불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녹천은 전투대열을 새롭게 정비하고 결사항전을 다진다. 그리고 ‘불원복기(不遠復旗)’를 진용의 선두에 세웠다. 불원복기는 태극기에 ‘불원복(不遠復)’이라는 글자를 써 넣은 것이다. 불원복은 주역(周易) 복괘(復卦)에서 ‘소멸했던 양기가 머지않아 회복된다’는 뜻으로 ‘멀지 않아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을 표상한 것이다.

녹천은 1907년 10월 9일, 연곡사에 순절한다. 이때 연곡사에는 녹천과 고제량 등 13명뿐이었다.

“예전에는 종손(宗孫)은 곧 문중(門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문중이 결성된 목적은 위선(爲先)과 보종(保宗)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선은 조상의 뜻을 기려 잘 모신다는 것이고, 보종은 문중을 지켜 보존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종손의 권한은 막강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요즘 와서 종손의 권한은 없고 의무만 남아 있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종손을 하나의 굴레나 업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종손은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선택받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 무거운 책무를 부여받을 수 있겠습니까? 특히 내 경우는 종손으로서 해야 할 일이 막중하다고 봅니다. 그중 가장 큰 책무가 ‘포의사’ 일을 완결하는 것입니다.”

고 씨가 포의사 일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40년이 되었다. 그는 포의사를 ‘호남창의 기념관’(가칭)으로 발전시킬 구상도 하고 있다.

“엄밀히 따지면 우리의 의병사는 ‘호남의병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창평에 호남창의 기념관을 만들겠다고 하니까 선조들이 의병활동을 했던 다른 후손들도 적극 호응을 해 주었습니다. 보성의 안규홍 의병장, 함평의 김태원 의병장, 광주의 조경환 의병장과 오성술 의병장의 후손들이 창평의 호남창의 기념관에 신위를 모시겠다고 동의했습니다. 호남창의 기념관이 완성을 보게 된다면 역사의 성지 차원을 넘어서 아주 의미있는 문화자원이 될 것이고, 이것은 지역 발전의 중요한 동인(動因)이 될 것입니다.”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