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새마을금고 전국연합회 부회장 최화삼씨

새마을금고는 서민들 희망의 요람입니다.” ‘민주당 외골수’ 재선 군의원이 정치활동 접고 미련없이 본업인 새마을금고 맨으로 전념 중앙대의원, 광주전남 대표 전국이사, 제도개선위원장… ‘막강한

2010-07-12     마스터

새마을금고를 상징하는 표식은 느티나무다. 느티나무는 서민들의 휴식처다. 느티나무가 수호신처럼 서있는 마을의 서민들이 상부상조하며 살아가는 정겨운 모습들이 연상된다.
그런데 새마을금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은 새마을금고를 소규모 대부업체 정도로 생각한다. 필자 역시도 새마을금고는 이른바 제1금융권이나 제2금융권에도 들지 못하는 아주 영세한 대부업체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새마을금고 전국연합회 부회장 최화삼 씨를 만나고 나서는 새마을금고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그리고 새마을금고 전국연합회 부회장이라는 자리가 나름의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는 것도 이번에야 알게 되었다.
최 씨는 연합회 부회장 직책 외에 중앙대의원, 광주전남 대표 전국 이사, 중앙회 제도개선 위원장, 예산심의 위원장, 신용공제평가 위원장의 직책을 맡고 있다. 이 모든 직책들은 선출직인데 이 중 제도개선 위원회는 새마을금고 입법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새마을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새마을운동의 목표는 한 마디로 ‘잘 살아보자’였다. 이 무렵 새마을금고 운동이 시작된다. 이 운동이 시작되던 때는 작은 시골 마을에도 새마을금고가 설치될 정도로 이 운동은 시골 전역에 확산되고 있었다. 주주들은 지역에 살고 있는 서민들이었다. 서민들이 한푼두푼 모아 자산을 형성했다. 처음에는 아주 미미했다. 중간에 많은 시행착오도 있었다. 그런데 40년이 지난 현재 새마을금고는 연합회의 총 자산이 80조원이라는 거대한 금융기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최화삼 씨는 이 거대한 금융기관의 부회장을 맡고 있다. 그리고 최화삼씨는 담양새마을금고 이사장 직도 맡고 있다.
“직장금고나 단체금고도 나름으로 역할이 있지만 새마을금고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셋 중에서 지역금고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새마을금고뿐입니다. 회원들이 모여 만든 것으로 가장 이상적인 금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마을금고는 태동된 동기나 목적이 아주 순수했습니다. 상부상조하는 품앗이의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좀도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새마을금고가 추구하는 목적이 좋아 새마을금고에 몸을 담게 되었는데 어느새 20여년이 다 되었습니다. 새마을금고야말로 서민들의 진정한 대변자이고, 희망의 요람이라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최화삼 씨는 정치활동을 오래 한 정당인이기도 하다.
“현재 담양에서 민주당 당적 하나로만 걸어온 사람 중에서 그 세월이 나보다 많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스물세살때 ‘민주당’에 가입해서 오늘까지 자의로 당적을 바꾸어 본 적이 없습니다. 스물세살이면 정말 순수하고 열정적인 감정을 가질때입니다. 그때 DJ를 대통령으로 만든다는 신념으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오늘날까지 초심을 버리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주위 사람들은 최화삼 씨를 ‘민주당 외골수’라고도 한다.
30년 넘게 지역에서 정당활동을 한 최 씨는 2선의 담양군의회 의정활동을 마무리하고 현재는 새마을금고 일에만 전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단 정치와는 거리를 둔 최 씨의 심정은 어떨까?
“3선, 4선을 했어도 그만 두려고 하면 미련이 남는 것이 정치라고 하는데 저는 전혀 그런 기분을 갖지 않았습니다. 8년 동안 그야말로 혼신을 다하면서 정도를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뛰었기 때문에 미련도 후회도 없습니다.”

최 씨가 새마을금고 정식 직원이 된 것은 1993년이다. 그 당시 그는 청년회장을 맡고 있었다. 이 무렵 금성새마을금고에 문제가 생겼는데 관계들이 찾아와 금성새마을금고의 문제를 수습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6급으로 특채를 해준 것이다. 입사 즉시 그는 자전거를 타고 상가나 가가호호를 방문하면서 파출수납부터 했다. 그렇게 2년 동안 열심히 뛰었다. 그 결과 영업손실도 채워지고 정상화가 되었다. 자산도 21억원으로 늘어났다. 정상화가 되자 정당활동에 미련이 남아 금성새마을금고를 그만 두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새마을금고 전남도지부 사무국장으로부터 담양새마을금고의 문제를 수습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당시 담양 관내에는 담양새마을금고, 천변새마을금고, 수북새마을금고, 금성새마을금고와 단체금고인 동심회 등 다섯 개의 금고가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서 금성새마을금고는 이미 문제가 생겨 수습이 된 상황이고 두 번째로 담양새마을금고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당시 담양새마을금고의 사고액은 5억여원이었다. 1995년 무렵 5억원이라면 꽤나 큰 액수라고 할 수 있다.
“완전 수습이 되기까지는 4년이 걸렸습니다. 새마을금고에 몸담은지 20여년이 다 되는데 이때가 가장 힘들었던것 같습니다. 신변위협의 협박도 받았습니다. 가족들에도 협박전화를 했습니다, 가족들이 무서워 새마을금고를 그만 두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맡은 일이기 때문에 끝장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문제가 수습되고 난 후 최 씨는 4급으로 승진하고 상무 대우를 받게 된다. 새마을금고 연합회 회장상과 행정안전기획부 장관 표창도 받는다.

담양새마을금고 문제가 어느 정도 수습되고 나자 이번에는 ‘동심회’ 문제가 터졌다. 동심회는 담양관내 새마을금고 가운데 유일한 단체금고였는데 경영손실로 직원들 급여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도지부에서 동심회를 합병하라는 의견이 시달되었습니다. 6억7천만원 정도의 손실을 수습하는데 4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금성새마을금고를 수습하는데 2년, 담양새마을금고 4년, 동심회 4년, 뒤치다꺼리하는데 10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동심회 합병문제가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수북새마을금고 문제가 터졌습니다. 손실액이 4억7천만원이었습니다. 그 일도 해냈습니다. 그런 뒤 연합회 고위 임원을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새마을금고 들어와서 설거지만 했다. 그만큼 설거지를 시켜먹었으면 고무장갑이라도 한 켤레 사주는 것이 도리 아니냐? 그랬더니 2004년에 무이자로 23억원을 지원해 주더군요. 담양새마을금고에 적잖은 도움이 되었지요.”

최 씨는 1997년 전무로 승진하여 2003년 담양새마을금고 이사장이 되었다. 1993년 당시 112억원이었던 담양새마을금고 자산도 420억원이 되었다. 회원수도 1만여명이나 된다.
“2년후 담양새마을금고 목표 자산액은 1,000억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창평에 지소를 개설하고, 시도지부의 시장 조사를 면밀히 한 다음 시도지부의 협조를 얻어 곡성과 장성에 지점을 설립하려고 합니다. 예상한대로 잘 될 거라고 믿습니다.”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