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전라남도 무형문화제 23호 ‘죽렴장(竹簾匠)’ 박성춘씨

“선방(禪房)에서 참선(參禪)하듯 엮어야 합니다” 13세때 문발 첫 과정인 통대나무 ‘껍질긁기’ 시작 2년후 ‘엮음질’한 이후 올해 일흔세살 된 지금까지 어언 60년 세월 이 일 계속하며 200년

2010-12-30     마스터

발을 통치(統治)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역사도 있다. 이른바 ‘수렴청정(垂簾聽政)’이다. 수렴청정은 나이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 또는 큰어머니나 작은어머니가 대리로 정치를 맡는 일을 말한다. 말의 어원은 왕대비가 남자인 신하 앞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왕의 뒤에서 발을 내리고 이야기를 듣던 데에서 비롯하였다. 한국에서 수렴청정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구려 태조대왕이 7세에 즉위하자 태후가 섭정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다. 이후 조선 왕조에서도 수많은 수렴청정의 예가 있다. 명종이 12세에 즉위하자 어머니 문정왕후가 대왕대비로서 무려 8년 동안이나 수렴청정을 한 역사도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죽렴장은 경상남도 통영에 살고 있는 한 분과 저 두 사람인데 담양의 대나무 발 기능 보유자는 저 혼자뿐입니다. 담양의 대나무 발의 명맥을 잇기 위해 시집간 딸이 엮음질 3년을 완료하여 전수자 과정을 마쳤고, 며느리가 엮음질 3년째 되었습니다.”

박성춘씨가 문발을 만들어 온 세월은 참으로 길다. 열세살때부터 문발 만들기 첫 과정인 통대나무 ‘껍질긁기’를 했다. 이 일을 2년 하고 나서야 15세 때부터 ‘엮음질’을 시작했다. 그리고 올해 일흔세살이 된 지금까지 이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 세월이 어언 60년이다. 박 씨의 할아버지때도 이 일을 했고, 아버지도 가업을 이어받았다. 증조부때의 일은 알 수 없으나 같은 일을 했으리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런 저런 세월을 합하면 200년이 넘는다.

박씨는 1990년에 전라남도 지방 무형문화재 23호 ‘죽렴장’으로 지정되었다. 박씨의 젊었을 때의 꿈은 법관이 되는 것이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법대에 입학했다. 대학에 다니면서 수재라는 말을 들었고 주위 사람들도 그의 꿈이 실현될 거라고 기대했다. 60년대초, 시골에서 대학생을 보기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그는 고시공부에 매달렸다. 백양사 서영암에서 칩거하기도 했다. 그러나 법관의 꿈은 이루지 못하고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다.

“회사 생활을 하는데 흥이 나지 않고 머릿속에는 고시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반거충이로 회사를 다니다가 어느날 그만 두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고향마을에 눌러 앉아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무형문화재로 지정해 준다고 했을때 썩 내키지는 않았습니다. 큰 이유는 돈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1984년에 대한민국전승공예 대전에 문발을 출품한 적이 있습니다. 그 문발에다 거북이 등 같은 육각형의 문양[龜甲紋] 수만 개로 ‘만수무강(萬壽無疆)’을 새겼습니다. 그런데 심사위원들이 그걸 거꾸로 걸어놓고 심사를 하더군요. 그 뒤부터는 출품은 하지 않았습니다. 평가해 주는 사람도 없는데 왜 합니까. 내가 만든 문발이 보물급이라고 자위를 했습니다.”

박씨는 문발의 수요가 줄어든 것은 주택형태의 변화라고 말한다. 예전에 주택형태가 한옥이었을 때는 어느 집에나 문발(대나무 발) 하나씩은 갖고 있었다. 일반 가정집 말고 대나무 발의 수요가 많은 곳은 주막이다. 그러나 마을마다 있던 주막도 사라진지 오래다.

“주위 사람들은 바보라고 했지요. 돈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 바보지요. 그런데 바보 아니면 이 일 못합니다. 성질 급한 사람도 못하고요. 엮음질 할 때는 텔레비전도 못 켜놓습니다. 스님들이 선방(禪房)에 앉아 참선(參禪)을 하듯 몰두를 해야 합니다. 머릿속에 헛생각이 들어오면 살이 끊기는 경우도 생깁니다.”

박 씨는 1984년 대한민국전승공예 대전에 출품했던 문발을 꺼내 보인다. 어느 일본인과 유명 탤런트가 와서 큰 돈을 준다고 했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원재료인 대나무는 왕죽과 분죽을 쓰는데 생장이 멈춘 늦가을이 되어서야 채취한다. 그런데 박 씨는 2~3년 생의 분죽을 선호한다. 왕대보다 분죽이 부드러운 맛이 있기 때문이다. 물이 올라 있는 대나무는 금물이다. 대나무는 상처가 없어야 하기 때문에 운반할 때 가마니 같은 것으로 싸야 한다. 이 대나무를 적당한 길이로 자른 다음 껍질긁기를 하는데 긁는 힘이 고르지 않으면 깊이에 차이가 나 색깔이 달라진다. 이어서 통대를 쪼개 살을 만든다. 대나무의 결을 따라 가는 살을 만드는 쪼개기는 쪽살내기, 마디훑음질, 잔살내기, 조렴질의 과정이 있다. 이 가운데서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과정이 조렴질이다. 조렴질은 가늘게 쪼갠 발 살을 조렴쇠 구멍을 통과시켜 가늘고 둥글게 하는 과정이다. 조렴질이 끝나면 0.8㎜ 두께의 발 살이 완성된다.

이른바 ‘양반집’이라고 하는 주택은 출입문이 쌍문으로 되어 있다. 이 쌍문은 넓이가 135㎝이고, 길이가 180㎝이다. 이 쌍문에 거는 발에 1천800개의 살이 들어간다. 엮음질은 아내와 둘이서 하는데 하루 7~8시간 엮으면 20일 정도 걸려 하나가 완성된다.

엮음질은 날줄과 씨줄의 결합이다. 조렴질을 끝낸 살이 씨줄이고, 살을 엮는 명주실이 날줄이다. 날줄은 103개인데 실끝 하나하나에 추를 매단다. 이것을 ‘고들개’라고 한다. 그러니까 씨줄인 살 하나를 얹고 고들개를 옮겨 엮는데 씨줄 하나 얹고 고들개를 이백여섯번 엮어 주어야 한다. 1천800개 낱낱에 이백여섯 번의 손이 가야한다니 그야말로 혼신의 작업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수고로움이 물거품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엮음질을 하면서 씨줄을 얻을 때도 아무렇게나 하지 않는다. 대나무는 같은 통이라도 동쪽과 서쪽마디의 길이가 0.3㎜ 차이가 난다. 이 차이를 계산하면서 씨줄을 얻어야 자연스러운 문양이 생긴다. 이 기능은 전 세계에서 박 씨 혼자만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고들개를 당기는 힘이 일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발이 울게 된다. 날줄에 염색하는 일도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엮음질을 하면서 명주실에 유성으로 염색을 하면서 거북모양 같은 완자를 넣습니다. 어느 여름에 일이 다 되어간다는 방심한 마음에서 유성의 기름을 많이 넣어 완자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쉬고 나서 보니 기름이 흘러 발살에 물이 들고 말았습니다. 아내하고 보름 넘게 엮음질한 것이 허사가 되어버렸습니다. 서두르고 욕심을 버리지 못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대살을 엮는 것은 인연을 엮는 것과 같습니다. 억지로 당기거나 밀면 틀어지게 됩니다. 세상살이도 순리대로 살아야지 괜한 욕심을 부리면 일이 뒤틀리지 않습니까?”

박씨는 1년 평균 8개 정도의 문발을 만든다. 그다지 많지 않은 수량의 이 발도 주인을 찾지 못한다. 해마다 또 만들고 주인을 찾지 못한 문발은 쌓여만 간다. 그래도 박씨는 문발을 만든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박씨는 완곡히 속내를 내비친다.

“무형문화재 이름값을 해야 하니까 만들어야지요.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뿐이니까 해야지요. 가끔 기능쪽 무형문화재보다 예능쪽으로 되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예능쪽은 오라는 데가 많지 않습니까?”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