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운전 경력 육십년, 고광식씨

“이 나이에도 운전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지요” 어린 나이에 부모 여의고 하루 세끼 먹기 힘들어 열살도 안돼 읍내 정미소 집에서 ‘꼴담살이’ 10년 주인 배려로 트럭 조수생활 2년만에 운전면허 취득

2011-03-30     마스터

‘성림택시’ 운전사 고광식씨의 올해 나이는 일흔일곱이다. 고씨는 아침 7시부터 운전을 시작하면 다음날 새벽 1시경에 일손을 놓는다. 요즘은 사람의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건강상태가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일흔일곱살에 하루 20시간 가까이 영업용 택시운전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고씨가 운전면허를 취득한 것은 1963년이다. 그렇지만 정식으로 운전면허를 따기 훨씬 이전부터 이른바 무면허 운전을 하기도 했었다. 고씨는 스스럼없이 자기는 일자무식(一字無識)이라고 털어 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운전밥 먹은 햇수’를 정확히 가늠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고씨가 살아온 내력으로 추정해 봤을 때 열일곱살 때부터 그 일을 시작했으므로 운전경력은 60여년이 된다.

고씨는 금성면 대성리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부모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 채로 형의 밑에서 자랐다.
“하루 세끼 먹는 일이 힘들어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습니다. 집안형편이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에 형님은 열살도 안된 저를 읍내 정미소 집으로 보냈습니다.”
그 정미소에서는 말 두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나이가 어려 힘든 일을 할 수 없었던 고씨는 말 먹이(꼴)를 베는 일을 했다. 이른바 ‘꼴담살이’였다. 담살이를 하고 따로 받는 보수는 없었다. 재워 주고 밥만 먹여 주었다.


“그 집에서 23년을 살았는데 주인 내외는 저를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습니다. 한 10년 살았는데 주인이 트럭 조수로 따라다니면서 운전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조수생활을 하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겨울에는 시동걸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스타찡으로 돌려야 시동이 걸립니다.”
'스타찡‘이라는 명칭이 정확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필자는 어린시절에 그걸 보았었다. 겨울철이면 트럭 밖에서 ’니은‘ 자 모양의 쇠막대를 엔진에 걸고 돌리면 시동이 걸렸다.
“하루는 스타찡을 잘못 돌린다고 기사님이 그걸로 머리를 때렸는데 이마가 찢어졌습니다. 울면서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었습니다. 그리고 붕대를 동여매고 따라다녔습니다. 그 길만이 내가 살 길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고씨의 이마에는 아직도 그때의 상처가 깊은 흔적으로 남아 있다.
1963년 고씨는 조수생활 2년만에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정식 운전사가 된 후에는 용면 가마골 ‘산판’에서 원목을 실어 나르는 일을 했다. 가파른 산길을 곡예하듯 오르내리며 운전을 했지만 사고는 없었다. 운전에 이력이 붙자 서울을 오가는 장거리 운전도 했다.
낮에 용달 일을 하고 나서 저녁밥을 먹은 다음 쌀을 싣고 서울 용산역을 향해 달렸다. 용산역까지는 7시간 정도 걸려 새벽 2시경에 닿았다. 짐을 내리고 차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나서 아침밥을 먹은 후 전라도 쪽으로 싣고 내려올 화물을 소개받기 위해 용산역 부근의 ‘알선소’를 찾아갔다. 화물이 있는 곳까지는 직원이 동승해서 안내를 했다. 글자를 모르는 고씨는 이정표를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안내자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 사람에게는 일정액의 수고비를 지불했다. 화물을 싣고 논산, 전주, 순창, 담양을 거쳐 광주에 가서 짐을 내려 주고 다시 담양으로 오면 오후 4시경이 되었다. 그런 일을 일주일에 두세 차례씩 했다.
“요즘도 가끔 서울을 다녀올 때가 있는데 내가 어떻게 서울을 다녀왔나 스스로 생각해 봐도 신기합니다. 이제는 꾀가 생겨서 서울 한복판에서 길을 잃으면 교통경찰차에 요청을 합니다. 그러면 전라도로 빠지는 외곽까지 안내를 잘 해줍니다. 그래도 트럭운전하던 그 시절이 정말 행복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늘 아래 믿을 것이라고는 오로지 내 몸뚱이 하나뿐인 놈인 그 시절에 결혼도 했으니까요.”
고씨의 아내 역시도 조실부모를 하고 어려운 처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같은 처지여서 서로를 위로해 주던 마음이 사랑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너무나 가난해 결혼식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옷도 새로 맞추지 못하고 빌렸다. 그리고 사진관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것으로 결혼식을 대신했다.
이 무렵 영업용 택시회사 ‘담양택시’와 ‘성림택시’가 생겼다. 고씨는 성림택시에 입사했다. 그런데 트럭운전이 몸에 뱄던지 5개월 만에 성림택시를 그만 두고 다시 광주로 나가 트럭 운전을 했다. 그런데 그 일도 5개월 만에 접고 다시 성림택시로 돌아왔다.

1980년대에 고씨는 개인택시를 받았다. 개인택시를 하면서 남초등학교 부근 지침리 오거리에 2층집을 지었다. 모아놓은 돈은 없었지만 개인택시 영업으로 갚아 나갈 궁리가 있었기 때문에 외상으로 짓고 매달 조금씩 갚아 나가기로 했다. 이 집의 건축을 맡았던 지역의 건설업자 K 아무개씨는 고씨의 성실함을 보고 나머지 건축비를 탕감해 주었다고 한다.
“세상살이는 좋은 일만 연달아 일어나는 것은 아닌 모양이대요. 개인택시를 한 3년 했는데 당시 고등학생이던 큰아들 놈이 사고를 치고 어린 나이에 엄청난 빚을 졌는데 빚쟁이들이 나를 찾아와 빚 갚으라고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개인택시를 팔았습니다.”
얼마 안 있어 집마저 경매를 거쳐 남의 집이 되고 말았다. 지역 금융기관에서 큰아들이 사업자금을 대출받을 때 보증을 섰는데 갚지 못하자 고씨가 채무를 안게 되었다. 결국 고씨의 2층집은 남의 것이 되고 말았다.
큰아들과 연락이 두절된 지도 10년도 넘는다. 그때 결혼 전이었던 큰아들은 여자와 살림을 차려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었다.
고씨는 개인택시를 팔아버리고 석달후에 다시 성림택시에 들어갔다. 성림택시에 세번 입사를 한 것이다. 담양에서 택시일을 하는 운전사들은 고씨가 이날 이때껏 누구와 다툰 걸 본 적도 없고,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라고 평한다.
“좋은 평을 받을 사람은 못 되지만 남과 싸우지 않고 살아온 것은 사실입니다. 싸우면 파출소에 가야 하기 때문에 참습니다. 파출소에 가서 글자 모른다고 챙피 당하는 것보다 참는 것이 좋습니다.”
고씨는 휴대폰도 자기만의 방식대로 사용하고 있다. 고씨가 누를 수 있는 번호는 단축키 둘 뿐이다. 단축키 1번은 회사이고, 2번은 집이다.

고씨는 사는게 힘이 들어 세상을 등질 생각도 했었다.
“세상을 그만 둔다고 생각하니까 눈물만 나오대요. 그런데 집사람이 무슨 죕니까. 또 손자는 어떻게 합니까. 이혼하고 집에 와서 살고 있는 오십이 다 되는 딸년도 있습니다. 모두들 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못 죽었습니다. 일자무식에다 아는 것도 없는데, 이 나이에도 운전할 수 있도록 건강하게 태어난 것만도 감사하게 생각하면 삽니다. 그리고 형편이 우선해지면 꼭 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습니다.”
고씨는 결혼때 아내에게 아무런 예물도 해주지 못했다. 고씨가 꼭 하고 싶은 일은 아내에게 금목걸이와 금반지를 선물하는 일이다.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