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연속 45년, 담양읍 객사리 1구 이장 김용희씨
지난 세월 뒤돌아보면 꿈만 같습니다” 이장을 처음 맡을 당시 450세대가 사는 큰 마을 상주인구 조사, 각종 회비 징수, 비료도 나눠주고 애사땐 반 상주노릇 등 이장이 해야할 일 다양 45년간 낮에는 농

담양읍 객사리 1구 이장 김용희씨의 올해 나이는 일흔넷이다. 이 나이가 되도록 마을을 떠나 살아본 적도 없는 김씨가 마을 일을 보기 시작한 것은 스물세살이던 1961년부터다. 당시에는 이장 밑에 ‘리 서기’라는 직책이 있었다. 김씨는 이장이 되기 전에 리 서기 일을 5~6년 한 뒤 이장이 되었다. 그러니까 김씨가 객사리 1구 이장으로 일해온지는 어림잡아 45년이 된다. 그것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장을 맡았다. 연속 45년은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여덟살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홀로 된 어머니는 서른넷의 청상(靑裳)이었다. 밑으로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각각 한 명씩 있었다.
“우리 집은 빈농이었기 때문에 아버지 살아생전에도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내가 가장 노릇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아온 세월을 뒤돌아보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그렇게 살아와서인지 저는 사소한 일에도 눈물을 잘 흘립니다. 애절한 유행가만 들어도 눈물이 날 때가 있습니다.”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 김씨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게를 지고 일을 했다. 땔감이 부족하던 시절이었으므로 산에 나무하러 가는 일은 일과가 되었다. 땔감은 주로 ‘지푸실(지금의 담양읍 학동 1구)’ 골짜기에서 해왔다. 키가 작았기 때문에 지게 발목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지게를 진 채로 구른 적도 있었다. 하루는 너무 많은 나뭇짐을 지고 오면서 몇 발짝 걷다가 쉬었다를 반복하며 집에 돌아온 적도 있다. 그날은 아침에 나섰다가 점심을 굶은 채로 오후 늦게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점심을 굶었지만 배고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에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만 하고 살았으니까 한끼 정도 굶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보다 키가 작은 것은 어릴 때부터 지게를 많이 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김씨는 담양동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런데 40회와 41회의 졸업장 두 개를 갖고 있다. 특별한 학력을 갖게 된 사연은 이렇다.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형편상 중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래서 포기를 하고 농사도 짓고 돼지도 길렀다. 당시 김씨는 흑돼지 두 마리를 길렀는데 그 돼지가 새끼를 낳았다. 그 돈이 생기자 중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오늘날하고는 제도가 달랐던 모양입니다. 이른바 재수(再修)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해 졸업장이 있어야 중학교 입시원서를 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몇달 놀다가 다시 6학년이 되어 학교에 다녔습니다.”
담양중학교에 진학한 김씨의 성적은 상위권에 들었다. 중학교에 다니면서 초등학교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열심히 공부했다. 목표는 광주사범학교(광주교육대학교 전신)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원서도 내보지 못하고 좌절되고 말았다. 당시의 제도는 나이제한이 있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6학년 과정을 두 번 다니는 바람에 연령이 초과하고 만 것이다. 김씨는 더이상 공부하지 말라는 팔자인 모양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열심히 땅이나 파서 살림을 늘리고 두 동생들은 기어코 고등학교까지 졸업시키겠다고 속으로 다짐을 했다. 김씨는 그 다짐을 실천했을 뿐만아니라 슬하의 3남1녀도 모두 대학에 보냈다.

“남들은 자식농사 잘 지었다고 부러워합니다. 농사를 지어서 자식 네 명을 대학에 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내 능력껏 부모노릇을 해보고 싶었고 자식들은 그런 내 심정을 잘 헤아려 주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로서 할 만큼 했고 이제는 손자들 재롱 바라보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입니다.”
특히 한국체대를 졸업한 장남 성수씨는 사격 국가대표 선수를 지내기도 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공기소총 금메달리스트인 장남은 현재 중소기업은행원으로 일하고 있다. 김씨는 벽에 걸어놓은 자녀들의 결혼사진을 가리키며 자랑을 숨기지 못한다.
김씨는 현재 20마지기의 논농사와 상당한 넓이의 밭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당시를 생각하면 엄청나게 부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하고 살게 되기까지 정말 죽어라고 일만 했습니다. 한 끼 밥은 건너뛰어도 일을 미루어본 적은 없습니다. 살림이 늘어나는 재미에 빠져 밤에도 어서 날 새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는 서양의 격언이 있다. 김씨는 꿀벌처럼 바쁘게 살았다. 그때는 체중이 50㎏을 넘은 적이 없었다. 바쁘게 살았기 때문에 체중이 불 겨를이 없었던 모양이다. 일한 만큼 살림이 늘자 소작도 많이 지었다. 5·16 직후 정부에서는 적극적으로 식량증산 정책을 펼치고 있던 때였다. 요즘은 가을철이면 연례행사처럼 쌀 때문에 진통을 겪고 있는데 그때는 쌀이 돈이 되는 시절이었다. 2~3년 소작을 짓고 나면 한두 마지기 논을 살 수 있었다.
김씨가 이장을 처음 맡던 때는 지금처럼 객사리가 1, 2, 3구로 나누어지지 않았다. 하나의 행정마을이었는데 세대수도 450세대가 넘는 큰 마을이었다. 그때는 요즘 같지 않고 이장이 해야 할 일이 아주 다양했다. 해마다 상주인구도 조사해야 하고 징수해야 하는 각종 회비도 많았다. 비료가 나오면 세대수 별로 무게를 달아 나누어 주는 일도 했다.
예전에 비해 마을의 세대수도 많이 줄었고 이장들이 해야 할 일도 많이 줄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장의 역할이 한가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동네에서 일어나는 모든 애경사에는 얼굴을 내밀어야 하기 때문에 늘 바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애사에는 반 상주노릇도 해야 하는 것이 이장이라고 한다.
김씨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45년 동안 낮에는 농사짓기, 아침과 저녁시간 대는 마을 일을 보면서 하루를 보내왔다. 그렇게 바쁜 시간 속에서도 15년간의 담양읍단위농협(담양농협) 이사와 10년간의 농조 대의원도 맡아 일했다. 관방천 명예 환경감시원으로 관방천을 지키는 일도 해 왔다.
“지나온 세월을 뒤돌아보면 어떻게 그런 일들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꿈만 같습니다. 몇 년 전에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너무 바쁘게 살다가 병을 키운 것 같습니다. 이제는 여유롭게 살면서 부부동반으로 외국여행도 한번 다녀오고 싶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일을 갖고 한 생애를 살아가게 된다. 그 일이 위대한 일이든, 아니면 미미한 일이든, 한결같이 정직한 마음으로 지켜왔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삶은 박수를 받아 마땅한 일일 것이다.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