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담양지회장 김경모씨
“우리는 두 세상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스물한살이던 1949년 12월에 입대해서 한국전쟁 끝난 이듬해인 1954년 4월에 제대 일등병 달고 전쟁을 시작해 하사 달고 전역 50년 6월 26일 첫번째 전투에서

“스물한살이던 1949년 12월 1일에 입대해서 이듬해 6월에 전쟁이 터졌습니다. 전쟁이 한창일때 우리 어머니가 순창 복흥의 용한 점쟁이를 찾아 갔더랍니다. 점쟁이가 아이고 뜨거워, 아이고 뜨거워라 하면서 쓰러지더랍니다. 어머니는 내가 영락없이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살아 돌아왔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죽느냐 사느냐 지옥같은 전쟁을 치른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육십년이 넘었네요.”
금성면 석현리에서 살고 있는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담양지회장 김경모씨의 올해 나이는 여든네살이다.
김씨는 입대 날짜에서부터 휴전이 될 때까지 치렀던 전투 날짜와 시각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신병교육을 마친뒤 일등병 계급장을 달고 광주상무대에 복무하게 된 김씨는 곧바로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 토벌작전에 투입되었다. 여수·순천 사건(간단히 여순 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2년전이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2개월 뒤인 1948년 10월 19일,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를 비롯한 일련의 남로당 계열 장교들이 주동하고 2,000여명의 사병이 전라남도 여수군(현재 여수시)에서 봉기함으로 인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좌·우익세력으로부터 전남동부지역의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순천에서 6·25가 터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순천에서 올라와 6월 26일 밤 11시 송정리역에서 서울 수색으로 향했습니다. 6월 26일 오후 6시쯤에 수색 부근에 당도했는데 부상 경찰들을 만났습니다. 곧바로 전투요원은 투입되고 행정요원은 용산에 있는 육군본부로 갔습니다.”
김씨는 군대에 들어오기 전 스무살때 의경으로 복무했다. 이때 수북면 병풍산, 순창, 복흥 등지에서 반란군 토벌작전에 투입되었다. 군에 입대할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전투경찰들의 구타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방되기 전에는 해군소년병에 징병된 적도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는 나이 어린 소년들도 전장에 몰아넣고 있었다. 소년병 징병 날짜는 1945년 9월 15일이었다. 그런데 해방이 되자 이 일은 무효가 되고 말았다.
해방이 되고 나서 김씨는 수북면의 ‘삼산농학원’에 들어갔다. 담양중학교가 생기기 전의 중학과정 학교였다. 3년제였던 이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대부분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렇지만 김씨는 삼산농학원 2학년때 중퇴를 했다. 학교에 다니지 말고 집에서 농사나 지으라는 아버지의 성화 때문이었다.
“집 형편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는데 아버지는 학교에 다니는 것을 못마땅해 하셨습니다. 그래서 반발심으로 의경에 들어간 것입니다.”
6월 26일 저녁 전장에 투입된 김씨의 부대는 첫번째 전투에서 참혹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불과 사흘만에 투입된 500여명의 병력은 거의 전사하고 부상자를 포함한 20여명, 그리고 김씨를 포함한 행정요원 7명만 남았다. 후퇴명령이 내려졌다. 6월 29일 새벽 2시쯤, 김씨 일행은 한강에 도착했다. 그런데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는 바람에 강을 건너지도 못했다. 새벽 5시쯤 먼동이 틀 무렵 어렵사리 작은 배를 구해 한강을 건넜다. 정원이 7~8명인데 30명이 넘는 사람이 탔다. 결국 강 한가운데서 배가 뒤집히고 말았다.
“그 바람에 행정요원 7명 중에서 4명이 실종되고 나를 포함한 3명만 살아남았습니다. 저는 어렸을때 금성면 하천에서 목욕하면서 익힌 헤엄 실력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비로소 살고 죽는 일을 실감하면서 살아있다는데 감격해 눈물이 났습니다. 물속에서 사경을 헤매느라 옷도 무기도 모두 분실하고 말았습니다. 런닝셔츠와 팬티 바람으로 수원 제일국민학교로 향했습니다.”
28일 밤 용산(육본)을 출발하면서 수원 제일국민학교로 집결하라는 지시를 하달 받았던 것이다. 밤낮으로 이틀 동안을 걸었다. 다행히도 여름철이라서 오이, 가지 같은 밭작물로 요기를 했다. 밭작물로 여섯끼니를 떼우고 집결지에 도착했는데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연대장과 인사장교 등 2명뿐이었다. 이때부터 김씨는 통신병과로 바꾸었다. 그리고 김씨 부대는 수시로 북한군과 교전을 하면서 진천, 천안, 대전으로 후퇴했다.
김씨는 1950년 8월 13일 밤 전투를 잊지 못한다고 한다. 이날 밤의 전투는 아군과 적군이 바로 지척에서 맞닥뜨리는 바람에 이른바 ‘육박전’을 벌였다고 한다. 칠흑같은 밤이라서 피아를 구분할 수 없었다. 서로 엉키면 손바닥으로 머리카락부터 확인했다. 민둥머리이면 중공군과 북한군이었다. 머리를 더듬어 민둥머리인 것을 확인하고 사살했다. 이무렵 다부동 전투에도 참여했다. 이 전투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손꼽히는 전투로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군의 대공세를 저지시키고 대구로 진출하려던 적들의 기세를 꺾었다. 동양의 베르됭 전투라고도 불릴 정도로 치열한 전투로 유명하다. 김씨는 이 전투와 관련하여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김씨는 ‘충무무공훈장’도 받았다. 1950년 10월 24일 낮 12시 45분, 김씨의 부대는 평양에 입성했다. 11월 10일에는 평양 운산 태천까지 진격했다.
“우리는 내일이면 신의주 압록강에 가서 세수하고 발 씻는다며 의기충천해 있었습니다. 나도 승리한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고 어서 빨리 치고 올라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중공군이 밀고 내려오는 바람에 오가지도 못하고 1주일 동안을 포위당한 채 있었습니다.”
이때 김씨는 죽음을 무릅쓰고 전봇대로 올라가 연대본부와 통화를 해 상황을 보고하고 후퇴명령을 얻어냈다. 본부와 통화를 마친 그때 총탄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김씨는 전봇대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렇지만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죽음을 무릅쓰고 임무를 수행해 부대원을 안전하게 후퇴시킨 공로로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이 후퇴가 이른바 ‘1·4후퇴’이다. 그런데 김씨는 이 과정에서 총살을 당할 위기에 놓였다. 후퇴하면서 차량을 버리고 왔는데 그 차 안에 암호문서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사단장은 어마어마한 기밀을 누설했다며 총살형을 면했다. 이때 연대장이 변호를 해주어 총살형은 면했지만 김씨는 하사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되는 징계를 받았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었다. 김씨는 대구 영천으로 내려왔고, 김씨가 속한 통신부대가 주축이 되어 통신중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1954년 4월 18일에 제대를 했다.
“일등병을 달고 전쟁을 시작해 하사를 달고 전역을 했습니다. 중간에 이등병으로 강등되는 일만 없었어도 상사를 달고 제대했을 텐데 그것이 좀 아쉽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6·25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북한을 찬양하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6·25를 겪어보지 않아서 그럽니다. 북한을 돕는 것은 좋지만 그들의 야욕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담양에는 현재 75명의 무공수훈자가 살고 있다.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