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함부르크의 담양출신 화가 송현숙씨

대덕 무월마을 촌사람처럼 삽니다” 72년 꽃봉오리 방년의 나이에 독일 간호사로 파견 ‘빌 데즈 하우젠’ 병원에서 근무하며 언어 익히고 3년후 ‘브레멘’에 있는 정신병원에 근무하면서 미술로 심리치

2011-08-23     마스터

우리 정부가 독일에 간호사를 파견한지 40년이 넘었다. 정부가 독일에 간호사들을 파견한 주된 목적은 이른바 조국 근대화를 위한 외화벌이였다. 그 무렵 독일로 떠난 간호사들은 6천500여명에 이른다. 20대 그야말로 꽃봉오리 같은 방년(芳年)의 나이에 한국을 떠난 그들도 이제 이순(耳順)을 훌쩍 넘겨버렸다. 그들의 일부는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대부분은 독일의 곳곳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

독일 최대의 항구도시 함부르크에 거주하면서 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송현숙씨도 독일에 파견되었던 간호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대덕면 무월리에서 태어난 송 씨는 광주 수피아여자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무월리로 돌아와 낮에는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고, 밤에는 취업하기 위해 공부를 했다. 그러다가 독일로 갔다. 송 씨는 40여년 전의 일들을 어제인 것처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내리는 날짜와 시각까지도 잊지 않고 있었다.
“1972년 11월 30일 밤에 독일 공항에 도착해 여섯 명의 동료들과 함께 마중 나와 있는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갔습니다. 어두운 밤길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겠지만 그야말로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새벽녘에 근무하게 된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송 씨가 처음 근무를 시작한 곳은 ‘빌 데즈 하우젠’이라고 하는 작은 도시의 병원이었다. 계약 조건은 3년 근무였다. 첫해 1년 동안은 언어구사가 익숙하지 못해 벙어리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2년째부터는 병원에 요청해 정식으로 독일어 공부를 했다. 3년째가 되자 어느 정도 언어소통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여행도 다니기 시작했다. 근무가 없는 날에는 여행을 했다. 이태리, 영국, 프랑스, 벨기에, 오스트레일리아 등 많은 나라를 여행했다.

빌 데즈 하우젠에서 3년 동안의 계약기간을 마치고 좀 더 규모가 큰 도시 ‘브레멘’에 있는 병원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그 병원은 알콜중독자 등을 수용하는 정신병원이었다.
“그 병원에 근무하면서 미술로 심리치료를 하는 것을 보고 밤 근무를 하면서 누구에게 배운 바는 없지만 내 나름으로 스케치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에 오면서부터 줄곧 일기를 써왔는데 이때부터 일기를 그림으로 표현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내가 보기에도 그림이 나아졌고, 문득 정식으로 그림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저축해 놓은 돈도 약간 있었고, 외국인에게는 특별장학금도 주기 때문에 병원을 그만 두고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1977년 송 씨는 대학에 들어가 ‘자유미술’을 전공했다. 자유미술이란 실기와 기능 위주의 공부를 말하는 것이라고 송 씨는 설명을 덧붙인다. 방학 때가 되면 학비를 벌기 위해 병원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대학에 다니면서 송 씨는 결핵 진단을 받고 1년 동안 휴학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1982년에 졸업을 했다. 내친 김에 1984년에는 전남대학교 미술대학에 유학을 와서 한국을 비롯한 중국과 일본을 아우르는 동양미술사를 전공하기도 했다.
“뒤늦게 대학에 다니면서 미술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된 것이 큰 보람입니다. 그리고 내 조국 대한민국을 좀 더 깊이 알게 되었다는 것은 더욱 큰 보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 살 때는 시집이나 소설책 한 권 제대로 읽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다니면서 김지하 시인의 문학을 접하게 되었고, 이오덕 선생님의 어린이 글쓰기 교육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또 송기숙 교수의 소설, 황석영 선생님의 ‘장길산’도 그때 읽었습니다. 이 외에도 한국의 역사와 여성의 교육에 대한 서적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대학에 다니면서 결혼을 했다. 송 씨의 남편 힐트만 교수는 조각가이다. 1981년 송 씨는 기차여행을 다녀오다가 기차 안에서 힐트만을 만나 사랑을 시작했고 결혼에 이르렀다. 힐트만 교수는 1986년에 전남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교환교수로 재직한 적이 있다. 남편은 송 씨가 담양 대덕면 무월마을 촌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송 씨가 살고 있는 집 정경을 사진으로 보았다. 그 사진 속에는 대나무가 하늘거리고 있다. “내가 담양으로 도망갈까 봐서 남편이 일부러 대나무를 구해다 심었습니다. 우리 집 한쪽에는 미나리꽝도 있고, 텃밭에는 마늘, 쑥갓, 상추, 들깨, 부추, 더덕, 당귀, 쑥 같은 것이 자랍니다. 우리 집에서는 포크나 나이프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숟가락, 젓가락이지요. 우리 집은 그냥 대덕면 무월마을입니다.”
미술평론가 이태호는 송 씨의 집 정경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함부르크의 첫날 아침 고향답게 꾸민 대숲, 텃밭의 쑥갓이나 호박, 집 입구의 뽕나무 등을 돌아보면서 한국에 있든지 독일에 살든지 흔들림 없이 ‘송현숙은 송현숙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움을 그저 추억으로 묻어두지 않고 화면에 녹여 쏟아낸 송현숙의 삶과 예술이 정말 사랑스럽다. 결국 이제는 송현숙이 서 있는 자리가 확고한 송현숙의 예술 공간이고, 송현숙의 세계를 그 자리에서 이루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자랑스럽다.>
송 씨는 전라도 사투리를 아주 자연스럽게 썼다. 누구라도 전라도 사람이란 것을 금세 알 정도였다. 미술 평론가 이태호는 ‘전라도 사투리가 곧, 송현숙 예술의 정체성’이라고 말한다.
<송현숙의 그림에서의 사투리는 화면의 순정스러움, 거침, 투박함 같은 자연미이다. 아무튼 고향을 떠나 이방인으로 사는 송현숙의 그 진한 사투리가 송현숙 예술의 정체성이자 고유정신이다. 송현숙과 힐트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지면, 송현숙의 독특한 독일어에는 전라도 사투리가 깊게 배어난다. 1970년대 초 한국을 떠날 때 모습 그대로가 30년이나 유지되어 있다. 오히려 한국에 살았더라면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문화에 편승하여 그 사투리의 맛을 완연히 잃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송 씨는 아이들의 이름도 한국식으로 지었다. 송 씨의 아들 이름은 한송이다. 한국 소나무라는 뜻이 담긴 한송(韓松)이다. 손녀의 이름은 미영(美英)이다.

송 씨는 올 여름 서울 한 화랑의 초대를 받아 전시를 갖게 되었다. 전시 때문에 서울에 왔다가 시간을 내 고향 무월마을을 찾은 송 씨를 어렵게 만났다. 송 씨의 첫 모습은 다소 곱게 나이가 들고 수더분한 초로의 시골 여인네였다. 금방이라도 독일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무월마을에 돌아와 살 사람으로 보였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했는데 왜 고향이 그립지 않겠습니까? 독일 생활 초기에는 향수병 때문에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고향에 돌아와 살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11년 전에 죽을 때까지 독일에 살겠다고 마음을 굳혔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면 지금 내가 하는 작업에 보탬이 되지 않을뿐더러 노구를 이끌고 오면 주위 사람들에게 또 다른 부담을 주게 될 것입니다. 법정스님은 늘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법정스님의 그 말씀을 좋아합니다.”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