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가마골 어부(漁夫) 이강열씨

“세상살이는 욕심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방방곡곡 인생유전, 고향 남원으로 되돌아가 한봉 치기 시작한지 1년새 40통으로 불어나 통수 늘어 밀원 부족해지자 찾아든 곳이 가마골 꿀 판로 어려워져 8

2011-10-28     마스터

어부(漁夫)는 강이나 바닷가에서 고기 잡는 일을 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만약 첩첩산골에서 어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첩첩산골인 용면 가마골에는 어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가마골에 ‘초원산장’이라는 간판을 내건 식당이 있다. 초원이라는 이름으로만 보면 이 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육류라고 연상이 될 것이다. 그런데 초원산장은 민물고기 전문식당이고 이 식당의 사장인 이강열씨의 직업은 어부다.

인생유전(人生流轉)이라고 했다. 세상살이란 하염없이 이리저리 흘러 다니며, 하는 일도 자기의 의지와는 달리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하면서 살아가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소설로 써도 열권은 넘게 써야’한다고 술회하기도 한다. 가마골의 어부 이강열씨도 그런 세월을 지나왔다.


“남원 대강면에서 태어났는데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어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 와중에 형님이 군대에 가게 되어 어린 나이에도 노모를 모시고 집안 농사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했는데 지금도 공부 많이 못한 것이 가슴에 맺혀 있습니다. 그러다가 열아홉 살이 되었을 때 형님이 제대를 했는데 그야말로 해방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일단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이씨는 무작정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선 뒤 경기도 동두천의 주물(鑄物)공장에 취직을 했다. 그러나 하는 일이 성에 차지 않아 2년 만에 주물공장을 그만 두었다. 이때 이씨는 다른 일을 찾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주도에 가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길을 나섰다.


“일종의 무전여행(無錢旅行)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제주도에 가는 배를 타기 위해서는 목포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돈이 넉넉지 않았기 때문에 여비를 벌어가면서 가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이씨는 속초로 가서 마른 오징어를 샀다. 그걸 길거리에서 팔아 여비를 마련해 남쪽으로 내려갔다. 장사가 신통치 않아 때로는 걷기도 했다. 식당에 들어가 한 달 정도 배달 일을 한 적도 있고, 돈이 생기면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그런 식으로 속초, 순천, 대전, 전주를 거쳐 목포에 닿았다. 그 사이 울릉도에도 들어갔다 나왔다.


“여러 달이 걸려 마침내 목포에 닿아 제주도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파인애플 농장이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본 것이었습니다. 파인애플을 육지에 가지고 나가 팔면 장사가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목포로 가지고 나와서 길거리에 펼쳐놓았는데 펼쳐놓자마자 다 팔렸습니다. 처음 보는 것이라며 도리(싹쓸이)를 해 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때 파인애플 장사를 하면서 제주도와 목포를 40 차례 넘게 왕복했는데 선원들과 형님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잘 하다가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하루아침에 날리고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장사에 이력이 생긴 이씨는 상품 가치가 높은 완숙 파인애플을 사 가지고 목포로 향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풍랑이 거셌다. 그 바람에 파인애플 상자가 배 안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게 되었다. 목포에 도착했을 때는 파인애플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결국 하나도 팔지 못하고 폐기해 버렸다. 그리고 빈털터리가 되어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씨는 별로 하는 일 없이 고향 마을에서 1년 정도 지내다가 다시 순창 구림면의 외가댁으로 가서 1년 정도를 지냈다.


“파인애플 장사는 나름으로 자신이 있었는데 자본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한봉(韓蜂) 치는 일이었습니다. 남원 대강면에서 한봉을 쳤는데 가격도 괜찮았습니다. 운이 따랐던지 벌들도 분봉을 잘 했는데 1년 사이에 40통으로 불어났습니다. 통수가 많아지니까 밀원(蜜源)이 부족해졌습니다. 그래서 찾아든 곳이 가마골입니다. 가마골에 정착하면서 마을의 여러 분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조중만 어르신은 물심양면으로 도움과 격려를 주신 분입니다. 가마골은 제 인생의 새로운 길을 열어준 곳입니다. 안 사람도 가마골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해가 거듭해지면서 꿀의 판로가 어려워졌다.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을 계속할 수 없었다. 결국 8년 만에 한봉 치는 일을 그만 두었다. 그런 이씨에게 새로운 삶의 전기를 가져다 준 것은 ‘담양호 새마을 양식계’였다. 담양호가 생기면서 수몰된 마을 사람들 중심으로 담양호 새마을 양식계를 조직한 것이었다. 양식계원은 50명이었는데 입회(入會) 조건이 엄격했다. 양식계원 중 누군가가 탈회(脫會)를 했을 때 그 몫을 사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때마침 탈회하겠다는 사람이 나와서 이씨는 그 권리를 샀다.

어부생활 20년이 다 되어가는 이씨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담양호에 나가 그물을 살핀다. 그런데 처음 어부생활을 시작할 때와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처음 시작할 때는 투자한 돈이 아까워 무조건 많이 잡겠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느 정도 느긋한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동안 손님들이 주문한 대로 해주었으면 갑부가 되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하고 싶은 대로 안 되는 것이 세상살이 아닙니까? 욕심 부릴 것도 없고 그날그날에 재미 붙이고 살아가다 보면 밥은 굶지 않습니다. 어부생활 20년에 세상살이는 욕심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동안 나를 알아주는 사람들도 엄청나게 많아졌습니다. 그것도 큰 복이고 재산 아닙니까? 철따라 변하는 가마골의 경치를 바라보는 것도 복이고, 철따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그때그때 별미를 제공하는 것도 즐거운 일입니다.”

이씨는 철따라 사람들의 미감(味感)을 즐겁게 해주는 가마골의 먹거리를 자랑한다.

“1월부터 4월까지 가마골에서 즐길 수 있는 먹거리는 빙어와 고로쇠입니다. 이어서 봄철인 5월까지는 여러가지 매운탕과 산나물을 맛볼 수 있습니다. 여름에는 토종닭이 있습니다. 가을에는 고기가 가장 맛이 있을 때인데 그걸로 끓인 매운탕은 봄까지 이어집니다. 담양에 가마골이 있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그러면서 가마골을 더욱 발전시켰으면 하는 바람도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가마골의 상류에 저수지를 만들어 항상 물이 흐르는 계곡으로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제가 가마골에 들어올 때만 해도 순창 강천사와 우리 가마골은 외지 사람들에게 똑 같이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현재, 가마골은 강천사에 밀리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물 때문입니다. 가을 단풍잎이 메마른 계곡에 쌓여 있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물에 둥둥 떠내려간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언제나 맑은 물이 흐르는 가마골이 되었을 때, 호남의 젖줄 영산강 시원으로서 가치도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일을 제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요.”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