⑨ 담양누정의 정신사적 배경과 경관(송강정)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에 흐르는 송강 위의 산언덕에 세워진 정자이다. 원래 송강의 내 이름은 죽록천이었고, 그 앞에 펼쳐진 들은 죽록평야이다. 담양에는 대가 많기 때문에 ‘죽록’이라 한 것이다. 산언덕에 올라 정자에 이르면 정면에 송강정이라 한 현판이 걸려 있고, 측면에는 죽록정이라 한 이름이 현액되어 있는데, 건물 명칭이 두 가지로 명명되고 있음은 바로 이 때문이다. 송강정은 또한 송강사 또는 송강정사라고도 불렀다.
정자를 처음 조영한 사람은 송강 정철(1536~1593)이다. 정철이 처음 담양과 인연을 갖기는 16세 때의 일이다.( 환벽당’ 참조) 17세 때는 담양의 유곡리(維谷里)에 있는 유옥(柳沃)의 손녀와 결혼하여 이곳은 곧 그의 제2고향이 되었는데, 27세에 과거 급제하여 출사한 후, 공식적으로 담양으로 하향하기는 네 차례로 알려져 있다. 40세 때의 약 2년간을 비롯하여 44세와 46세 때, 그리고 50세 때 남쪽 땅으로 내려와서 머문 일은 모두 정계에서 방축된 불우한 처지였다.
그 중 죽록정을 경영하기 시작한 것은 네 번째 하향하였을 때의 일이다. 그러므로 송강정은 선조 18년(1585)부터 조영되었다고 하겠다. 유명한 미인계 가사인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이 그의 52·3세 때 이루어졌다 함은 그가 죽록정에서 보낸 누정생활에서의 제작임을 의미한다.
후손인 정재가 일찍이 이곳을 찾았을 때 그 터는 이미 폐허가 된 지 오래되었다. 그 후 정재는 종중의 도움으로 힘을 합해 정자를 중건하였으니, 지금의 건물 역시 이때에 중건한 것으로 보인다.
정철은 이곳에 이르러 나날을 임금을 그리며, 송강정의 삶에서 많은 시를 창작했다. 한없는 연군의 정을 시조와 가사, 그리고 한시를 통해 시적 형상화를 기하였다. 흔히 누정을 작시풍류의 장이라 하지만, 송강정처럼 연군의 정으로 경영되었던 누정조영의 예는 거의 드물다. 때문에 이는 연군정(戀君亭)이요, 시정(詩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례로 송강정에서 연군의 정을 노래했다는 시조 한 수를 들면 이러하다.
내?? 버혀내여 뎌?을 ?글고져
구만리 당텬의 번?시 걸려이셔
고은님 계신고?가 비최여나 보리라
(「松江歌辭」星州本에서)
다음 시에서 송강정 주변의 경관을 상상하게 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정자 아래로 맑은 강이 흐르고 울창한 소나무숲에 둘러싸인 빼어난 경관을 갖춘 송강정이지만, 현재는 정자 앞면에 설치된 고가도로와 시멘트 다리는 송강정의 경관을 크게 훼손하고 있어 안타까운 심정이 들 뿐이다.
- 송강은 물이 맑아 내 갓끈을 씻네. (松江水潔濯吾纓, <贈道文師>)
강산의 풍월을 그대와 함께 평하리라. (山月江風與爾評, <贈道文師>)
- 물은 송강을 지나 칠계로 흐르네. (水接松江下柒溪, <江亭次韻>)
- 맑은 송강이 바로 눈 아래 있네. (松江在眼底, <望松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