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인물지도>109. 담양 최초 극단 ‘백진(白辰)’ 나항도 대표

2017-10-19     설재록 작가


 “백진강 위에 ‘백진(白辰)’이 돛을 올렸습니다”

담양 유사 이래 최초로 극단(劇團)이 탄생했다. 그리고 창단 공연을 위해 한창 열을 올리고 있다. 이 역사적인 일을 주도하고 있는 극단 대표 나항도(49)씨를 만나기 위해 담양읍 에코길에 있는 (주)에코피아를 찾았다. 2004년부터 현재까지 나 씨는 이 회사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제가 태어난 곳은 금성면 금성리 평신기마을인데 딸 여덟 아들 하나인 막둥이가 바로 접니다. 지금은 폐교가 된 광덕초등학교 4학년 때 광주로 전학을 갔습니다.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 주말이면 집에 왔는데 버스에서 내려 마을로 향하는 흙먼지길을 걷던 그때의 일이 눈에 선합니다.”


나씨가 연극활동에 관여하게 되었다는데 대해 정말 뜻밖이라는 반응들이 많다. 대개의 사람들은 나씨를 중견 기업인이며, 다양한 단체의 임원을 맡아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한때 열정적으로 연극활동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나씨는 아주 활동적인 사람이다. (재)글로벌에코포럼 사무총장, (재)담양장학회 이사, 담양군지속가능위원회 위원 등 담양과 관련해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력만 봐도 그가 얼마나 열정적이고 활동적인가를 충분이 헤아릴 수 있다.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열의도 있어야 하고 열정도 있어야 한다. 사안에 따라 열의만 있어도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일이 있다. 그렇지만 열정 없이는 달려들 수 없는 일이 있다. 연극이 이에 해당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연극활동은 힘들다. 80년대도 힘들었고, 90년대도 힘들었다. 문화의 세기가 된 21세기에도 연극활동을 하는 것은 힘들다. 여기서 필자가 힘들다고 말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자면 연극을 하면서 가족을 먹여 살리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1987년, 그때 나씨는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간다. 서울살이를 하면서는 주로 종로에 있는 서점과 동숭동 대학로를 찾는다. 대학로에는 크고 작은 연극전용극장들이 많이 있다. 나씨는 틈나는 대로 이곳에서 연극을 본다. 그러면서 문화예술계, 그 중에서도 연극계 사람들과 많은 교류를 한다.


“여러 연극작품 가운데서 제 가슴을 뜨겁게 한 것이 김상열 작가님의 ‘애니깽’이라는 작품이었습니다. 나도 연극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88년, 나씨는 광주로 내려온다. 그리고 종합연희패 ‘밥그덩’을 창단하고 대표를 맡는다. 그의 나이는 채 스무 살이 되지 않았다.


“창단 공연으로 애니깽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이 작품은 김상열 작가가 직접 연출했는데 서울의 극단 ‘신시(神市)’의 창단공연작품이었습니다. 극단 신시로부터 소품, 의상, 음향 등 여러 가지를 도움 받아 광주학생회관에서 밥그덩 창단 공연을 했습니다.”


80년대 후반, 광주, 연극, 이런 단어들을 연결해 보면 ‘참으로 어렵고 힘들다’라는 문장이 완성되게 된다. 필자 역시도 1970년대 후반에 광주에서 최초로 연극전용 소극장을 만들어 운영해 본 경험이 있다. 서울에서 어렵다는 연극을 광주에서 꽃피워 보겠다면 소극장을 차렸었다. 참담한 결과는 시작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그런 일에 나씨는 도전장을 내밀었다. 극단을 꾸려가던 나씨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까 하는 것은 굳이 긴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밥그덩은 밥그릇의 사투리다. 임자가 따로 정해진 밥그릇이 아니라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누구라도 손에 쥐면 내 것이 되는 밥그릇이 밥그덩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여러 사람의 밥을 함께 담아 둘러앉아 먹는 밥그릇이 밥그덩이 아닌가 싶다. 나씨는 공동체적인 삶을 꿈꾸며 극단의 이름을 그렇게 정했는지도 모른다.


“설재록 작가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연극은 누가 시킨다고 해서 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힘든 일인 줄 빤히 알면서도 스스로 선택한 빈곤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시쳇말로 시골의 논 팔고, 밭 팔고, 산 쪼개고, 부모님에게 손 벌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죠. 그러면서 연극이라는 마력에 이끌려 쉽게 미련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1992년에는 극단 ‘신인(神人)을 창단했습니다. 그리고 1996년까지 윗돌 빼서 아랫돌 괴고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생활을 지속하다가 이제는 더이상 버틸 수 없어 극단을 해체했습니다. 이 무렵 첫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연극도 좋고 문화예술도 중요하지만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식솔들을 책임져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종합연희패 밥그덩과 극단 신인을 꾸려오면서 나씨는 ‘애니깽(김상열 작)’, ‘내릴 수 없는 깃발(임동확 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황지우 작)’ 등을 연출했다.
나씨가 연극판을 떠난 지는 20년이 넘었다. 그런데 다시 연극활동을 하게 되었다.


“제의가 들어왔을 때 많이 망설였습니다. 회사를 경영하면서 연극활동을 겸한다는 것이 쉽지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다시 고통스런 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연극이라는 마력을 떨쳐 버리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또 경륜 있는 선배님들도 함께 해 주신다니까 용기가 생겼습니다.”


담양 최초로 극단을 만들기 위해 필자를 비롯해 나항도, 국근섭, 정병연, 이영민씨 등 관심이 있는 몇 사람이 모였다. 극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할 사람은 누가 적절할까? 논의 끝에 나씨를 대표로 추대했다. 그리고 극단의 이름을 ‘백진(白辰)’으로 정했다. 후보 이름으로 ‘대숲바람’, ‘竹이네’, ‘추월’ 등 여러 이름이 올라왔다.


“극단 백진은 백진강에서 따온 것입니다. 주민들에게는 관방천으로 익숙해진 백진강의 원래 이름도 찾고 담양의 브랜드로 만들어 보자고 하여 백진으로 결정했습니다. 극단 백진이 역사적인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앞으로 담양의 맑고 향기로운 자연은 무대가 되고, 담양의 역사는 희곡이 되고, 담양의 주민들은 배우와 제작자가 되고, 담양을 찾는 관광객들은 관객이 되어 줄 것입니다. 또한 연극적 요소는 지역 문화축제와 연계하여 지속성을 위한 이벤트 홍보 마케팅 등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극의 불모지 담양에 극단이 창단되었다. 그리고 지금 한창 창단공연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창단공연 작품은 ‘쌀엿 잘 만드는 집’이다. 2016년 담양송순문학상을 수상한 동화를 필자가 희곡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이 공연은 2017년 10월 27일과 28일 이틀간 저녁 6시, 창평 슬로시티 삼지내마을 안에 있는 ‘한옥에서’라는 펜션 마당에서 공연된다. 필자가 공연 날짜와 장소를 구체적으로 적시하는 것은 이 공연이 역사적인 사실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백진이 돛을 올렸습니다. 백진강과 함께 영원히 흘러 갈 것입니다. 극단 백진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지역주민이 중심이 되는 문화콘텐츠를 발굴하고, 지역사회의 공동체적 삶을 더욱 건강하고 활력 있게 만들어 갈 것이며,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지역주민에게 보탬이 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이 글은 2017년 10월 18일 현재 이야기입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