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보유자 연구비, 공연 출연료 모아
당대 최고 설장구 김오채 스승 기리며
봉산 와우리에 80평 규모 풍물전수관 지어
50년 세월동안 풍물인생을 걸어온
전라남도무형문화재 제17호 우도농악기능보유자 김동언씨는 최근 그의 고향마을 봉산면 와우리 인근에 80여평 규모의 풍물전수관을 지었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많은 가르침을 주신 김오채 선생님을 생각하며 전수관을 짓게 되었습니다.”
김동언씨는 쉰일곱살인 1996년 10월 24일에 우도농악기능보유자로 지정된다. 김씨는 기능보유자로 지정되던 첫달 30만여원의 연구비를 받는다. 그런데 매달 지급되는 월급(연구비)을 한 푼도 쓰지 않고 고스란히 저축을 한다. 그리고 공연에 따른 출연료도 함께 보탠다. 그렇게 13년 동안 모은 돈으로 풍물전수관을 짓게 된 것이다.
김씨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 앞 송학산에서 천제가 모셔졌다. 천제가 끝나면 마을에서 대규모 굿판이 벌어졌다. 이때 양지리, 수북면 황금리, 대전면 강의리, 광주 태령동 신기마을의 농악패들도 와우리에서 와서 걸궁을 쳤다. 그런데 여러 마을의 농악패들이 한자리에 모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경연장처럼 되어버렸다.
“제가 초등학교를 갓 졸업했으니까 아마 열서너살쯤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어린 마음에도 각 마을의 장구 솜씨가 비교되었습니다. 서툰 장구를 보면서 저 정도는 나도 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김씨는 속으로 장구를 배우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그 때는 장구가 꽤나 비싸 장구를 직접 만들었다. 장구통은 쌀가루 같은 것을 내릴 때 쓰는 헌 체의 테를 이용했다. 그리고 가죽은 양초(파라핀)를 먹여 빳빳하게 한 무명천으로 대신했다.
“시간만 나면 두드렸습니다. 혼자서 마을 굿판 때 들었던 소리를 기억해 그대로 쳤습니다. 그러자 동네 어른이 장구 하나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1957년, 김씨의 나이 열여덟살 때의 일이다. 그때 전라남도 농촌진흥원 주최로 전국 4H경진대회가 열린다. 이 경진대회에 와우리 4H에서는 농악으로 참가하게 된다. 이때 김씨는 대회 참가를 위해 광주 모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는 이봉래 선생에게 장구를 배운다. 이 대회에서 와우리 농악은 특등을 차지해 부상으로 황소 한마리를 받는다. 이봉래 교사는 딸만 둘이었는데 김씨를 수양아들로 삼고 싶어한다. 그런데 김씨 역시도 홀어머니를 모신 2대 독자였으므로 이 일은 무산된다.
이 행사 내용이 당시 ‘대한뉴스’에도 나왔는데 김씨는 시골에 있었으므로 그걸 몰랐다. 김씨는 어머니 몰래 달걀도 모으고, 쌀도 몇 되 덜어내 그걸 돈으로 바꿔 광주 극장을 찾아간다. 김씨는 대한뉴스에 나오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풍물인생을 결심한다.
그러나 살림이 어려워 우선 돈을 벌어야 했다. 죽제품인 발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일명 ‘조름발’이라고 하는데 명주발보다 성긴 발이다. 읍내 장날마다 이 발을 내다 팔았는데 소득이 괜찮았다. 살림도 점점 늘어났다. 논도 사고 광주에 집도 샀다.
“당시 어머니는 동네 처녀 하나를 맘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가 세상을 뜨시고 말았습니다.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그 처녀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가정을 꾸리고 살던 어느 늦가을 김씨는 들에서 보리를 갈다가 쌍교 쪽에서 농악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에 끌려 일을 하다 말고 그곳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 곳에서 최막동, 이주원 두 선생님을 만난다. 최막동씨는 장구를 잘 쳤는데 풀피리도 아주 잘 불었다. 이주원씨는 꽹과리를 잘 쳤는데 하모니카를 잘 불었다. 그 날 김씨는 그 자리에서 최막동씨에게 장구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자 최막동씨는 주소를 가르쳐 준다. 곧바로 김씨는 쌀 두 말을 짊어지고 광주 방림동에 살고 있는 최막동씨를 찾아간다. 그런데 선생에게 정식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 장 저 장을 따라다니며 장터에서 함께 풍물을 치며 눈치껏 배웠다.
그렇게 5년을 따라 다닌다. 그러나 식구가 하나 둘 늘어가고 있었으므로 그 일에 전념하지 못하고 본격적으로 농사일에 매달린다. 벼농사 외에도 토마토, 오이, 수박 등 이른바 원예작물도 한다. 비닐하우스도 시작했는데 재미를 보았다. 이때 하는 농사마다 풍년이 들어 살림도 더욱 늘어난다. ‘김동언이가 하는 농사만 따라 하면 실패는 없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농사를 잘 지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늘 풍물판에 있었다. 이 무렵 김씨는 당시 유명한 만담가 고춘자 김용운이 사회를 보던 KBS 인기 프로그램 전국민속백일장에 나가 상을 받는다. 민속백일장에서 상을 받자 그 프로그램에 합류하자는 제의를 받는다. 그러나 아내가 반대를 한다. 그러던 차에 무정면 죽산마을 출신 김회열(광주무형문화재 8호)씨로부터 시골에서 지내기는 아까운 재주니까 광산농악에서 함께 활동하자는 권유를 받는다.
그래서 김씨는 광산농악 단원으로 입회하고 이어서 기능보유자 전수생이 된다. 광산농악에는 9년간 몸을 담는다. 이 무렵 우도농악의 김오채(설장구), 전경환(상쇠)씨를 만난다. 당시 김오채씨의 설장구는 전국 최고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런데 김오채 선생님이 저에게 전라도 사람이니까 광산농악보다는 전라도 농악에 전념하라고 하셨습니다. 김회열 선생님에 대한 의리도 있는데 고민하다가 결국 전라도 농악을 선택했습니다. 그 일로 김회열 선생님 사모님에게 멱살을 잡힌 일도 있습니다.”
그 후 1993년 4월, 김씨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우도농악기능보유자 전수조교(후보자)로 지정 받는다. 그런데 김오채 선생이 갑자기 세상을 떠버렸으므로 선생의 생전 비디오 테이프를 보고 설장구를 익혔다.
1994년 4월 김오채씨가 작고하고 김씨는 마침내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7호 우도농악기능보유자로 지정받게 된다. 그때 김씨는 스승님이 돌아가셨는데 3년 상이나 지낸 다음에 받겠고 한다. 그렇게 해서 1996년 10월 14일 무형문화재가 된다.
50년 넘는 세월 동안 풍물인생을 걸어 온 김 씨. 그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 늘 겸손이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풍물하는 젊은 사람들 가운데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아는 길도 물어서 가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