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는 한 번뿐인 인생(人生)이고, 청춘(靑春)입니다”
대학생때 송곡 안규동 선생 밑에서 붓글씨 공부
붓 잡은지 반세기, 광주전남 서예계 2세대 맏이
1881년 2월 창간호부터 한차례도 중단없이
학정

필자는 서예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다. 서예가 학정 이돈흥씨에 대해서도 만찬가지였다. 다만 그가 시쳇말로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유명한 서예가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듯 유명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사전지식을 알아두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아 관련 책자를 뒤적였다. 몇 편의 글을 읽으면서 그는 ‘노송(老松) 위에 고고하게 유유자적하는 신선과 백학(白鶴) 기품과 절개를 가진 사람(김양균, 초대헙 법재판관)’이라는 선입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아호(雅號)를 ‘학정(鶴亭)’이라고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매일 변함없이 문방사우(文房四友)인 먹, 벼루, 붓, 종이와 함께 생활하는 곳은 노송(老松)과는 거리가 먼 도심의 빌딩 안이었다. 다소 의외였다. 그러나 이것은 필자의 잘 못된 생각이다. 문하생(門下生)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접근하기 쉬운 도심에 연구실을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필자는 연구실을 들어서면서 고고한 자태를 풍기는 한 마리의 백학(白鶴)을 보았다.
학정의 연구실은 광주 금남로에 있는 전일빌딩‘ 안에 있다. 1980년 3월에 이 연구실의 문을 열었으니 30년이 다 되었다.
담양 대전면 대치리에서 태어난 학정은 중학교 교사인 아버지의 권유로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예반에 들어가 붓을 잡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글씨 공부를 시작한 것은 전남대학교 공과대학 섬유공학과에 입학하던 해 스무살 때부터다.
“아버지께서 본격적으로 붓글씨 공부를 권하셨습니다. 그래서 송곡(松谷) 안규동(安圭東) 선생님 밑에서 붓글씨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붓을 손에 잡은 지 반세기가 다 되었습니다.”
송곡 선생은 1907년 보성에서 태어난 서예가인데 해방 이후 광주전남 서예의 1세대라고 할 수 있다. 학정이 글씨 공부를 시작하던 당시 광주전남의 서예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송곡, 근원 구철우, 남룡 김용구 등 세 사람이었다.
송곡의 문하에 입문하던 그 해 가을 학정은 대한민국국전에 입선한다. 그리고 졸업한 후 ROTC 소위로 군에 입대한다. 학정은 군대에 있으면서 결혼도 한다. 배우자는 대학시절 서실(書室)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군복무를 마친 뒤 스물일곱살 되던 해 학정은 당시 전남대 공대 학장의 추천을 받아 국내 굴지의 방직회사에 입사서류를 제출한다.
“송곡 선생님을 찾아가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광주에 남아서 글씨를 쓰라고 하셨습니다. 갈등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5월 어느날 선생님이 연탄 100장을 가지고 저희 집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저는 산수초등학교 누추한 집에 세 들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심, 위평생일편서심(一心, 爲平生一片書心)’이라는 글씨를 써 주셨습니다. 오직 한 마음으로 평생을 서법예술(書法藝術)에 정진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미래는 불확실했지만 선생님의 뜻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 뒤 학정은 호남동천주교 안에 설립된 한문학원 수강생들에게 별도로 붓글씨를 가르치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간다. 1974년에 설립된 이 한문학원은 대한민국 최초의 한문학원이다. 그리고 스물아홉살이 되던 1975년, 학정은 호남동천주교 안에 학정서예연구원을 설립하고 광주가톨릭대학에도 출강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생활은 곤란했다.
“1977년 송곡 선생님께서 개인전을 권유하셨습니다. 그래서 첫 전시회를 가졌는데 아주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쌍촌동에 아파트를 한 채 마련하게 되었으니까요. 선생님께서 앞장서서 작품도 팔아 주신 덕입니다.”

첫 전시회를 마치고 나자 학정에게는 많은 변화가 찾아온다. 전라남도는 도미술전람회 조례를 개정하여 초대작가제를 신설하였고, 학정은 전남도전 초대작가가 된다. 학정의 문하에서 공부한 제자들이 모여 월간 ‘연우회보(硯友會報’를 발간하게 된다. 1881년 2월에 창간호를 낸 연우회보는 지금까지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발간되고 있다. 연우회의 회원들은 모두 학정의 제자들인데 만여명이나 된다.
“80년대 초부터 서예 붐이 일어났습니다. 80년 3월에 현재의 연구실을 열었는데 한 달에 50명 이상이 새로 들어왔습니다. 한 달에 가르치는 사람이 300명이 넘었으니까요. 그런데 90년대 말부터 서예 인구가 급격히 줄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이 컴퓨터의 등장 때문이라고 봅니다. 컴퓨터가 등장하고 난 후 사람들이 더욱 더 빠른 속도를 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문화를 자판기문화, 고속도로문화라고 합니다. 기다릴 줄을 모릅니다. 글씨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한 획을 긋더라도 심사숙고해서 붓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붓글씨를 인생이나 청춘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이나 청춘은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림은 덧칠을 할 수 있으나 글씨는 덧칠을 할 수 없습니다.”
학정은 글씨와 그림이 붓을 사용하는 점은 같으나 표현 방식은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옛말에 소나 개 잡아 먹고 글씨 쓴다고 했습니다. 기(氣)가 빠지니까요. 그림은 나이 팔십이 넘어도 그릴 수 있지만 글씨는 못 씁니다.”
묵향이 그윽한 학정의 연구실 벽에는 많은 글씨들이 걸려 있다. 알 듯한 글씨도 있고, 그림에 가까운 글씨도 있다. 필자는 그림에 가까운 글씨를 가리키며 음(音)과 훈(訓)을 물었다. ‘법고창신 독조세계(法古創新 獨造世界)’라고 한다. 법고창신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이고, 독조세계는 ‘자기만의 독창적인 세계’라고 한다.
“무릇 모든 문화나 예술은 뿌리 깊은 연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것이라 하여 무조건 버려야 한다는 생각은 잘 못입니다. 새로운 것도 옛것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연구실에 나오는 학생들에게는 글씨 쓰는 자세로 ‘온공자허(溫恭自虛)를 강조합니다. 논어에 나오는 말입니다. 온공은 따뜻함과 공손함을 말하고 자허는 스스로를 비우라는 말입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채워 놓으면 다른 것을 담고 싶어도 담을 수가 없지요. 많이 비우면 많이 비울수록 더욱 많은 것을 담게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광주전남의 서예계에서는 송곡 안규동, 근원 구철우, 남룡 김용구 등을 제1세대라고고 한다. 그리고 학정을 제2세대의 맏이라고 하는데 이견이 없다고 한다. 송곡, 근원, 남룡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들 중에서 굳이 기수를 따지자면 학정보다 높은 사람은 없다. 팔십이 넘은 사람들도 문하로 따지자면 학정의 후배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학정은 요즘도 하루 천 자씩 글씨를 쓴다. 그러한 열정으로 ‘학정류(鶴亭流)’라고 하는 독특한 서체를 창신(創新)해 낸 것이다.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