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 만큼 새로운 공간이 생깁니다”
사진찍기 24년, 이름 난 전국적인 사진작가
퇴근후 광주 작업실서 자정까지 연구 몰입
초창기 휴일이면 산과 들 ‘야생화 작가’ 명성 이어
이제 수채화 연상케 하

「바람은 언제나 비어 있으므로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파동과 주파수를 갖고 있으므로 사물을 움직일 수 있다. 때로는 엄청난 파괴력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비어 있음은 곧 물질’인 것이다.」
-라규채 다섯번째 전시회, ‘대숲은 공(空)하다’ 작업노트 중에서
사진작가 라규채씨의 고등학교 2학년때 담임은 사진에 취미가 많은 선생님이었다. 라씨는 그 모습이 보기가 좋아 나중에 자신도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무원 첫 월급을 받아 월급의 세 배나 되는 꽤 비싼 사진기를 샀다. 그렇게 시작된 그의 사진찍기는 올해로 24년이 된다. 대학에서는 행정학을 전공했다. 사진은 누구에게 특별히 배우지 않았다. 독학(獨學)으로 사진 공부를 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방면에서는 꽤 이름이 난 전국적인 사진작가가 되었다.
초창기 10여년동안 라씨는 야생화(野生花)에 깊이 빠져 있었다. 휴일이면 전국의 산과 들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10년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2001년에 첫 전시회를 가졌다. 전시회의 주제도 ‘대나무골야생화’였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으로 인해 그는 ‘야생화 사진작가’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야생화 사진작라는 이름을 떼고 싶다고 한다. 그것은 그의 작품세계가 변했기 때문이다.
초창기 야생화를 찍을 때 휴일에는 새벽 2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다니면서 위험한 일을 당하기도 했다. 어느 겨울 하얗게 얼어붙은 정경을 찍기 위해 지리산 뱀사골을 찾아갔다. 그날 라씨는 계곡물에 빠지는 사고를 당했다. 아무도 없는 산중이라 속옷까지 벗어 바위에 말렸다.
“그런데 옷이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한 컷이라도 더 찍어야 한다는 욕심만 생겼습니다. 그래서 얼음이 되어버린 옷을 털어 입고 촬영을 했습니다. 이상하게도 감기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또 무안 연방죽 연꽃을 찍으러 갔을 때는 수로에 빠지면서 인대가 늘어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깁스를 하고 여러 날 목발을 짚고 다녔습니다.
인대가 늘어난 사고를 당하고 나서 며칠 안 있어 그는 목발을 짚고 무안 회산방죽을 다시 찾아갔다. 담양군청 공무원의 사진촬영 모임의 지도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5년 공무원으로서, 그리고 사진작가로서 살아온 그는 2006년 들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맞게 된다.
“나름으로 심적인 고통이 심했습니다. 사실 억울하기도 하고 인간적인 배신감도 들었지만 모두가 내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독서도 하고 생활습관의 변화도 시도했습니다. 고뇌, 갈등, 증오 같은 것을 한시라도 빨리 비우는 것이 나를 위하는 일이라 생각되어 먹는 습관부터 바꾸기로 했던 것입니다.”
익히지 않고, 채식 위주로 한 생채식(生菜食)을 시작한 것이다.
“생채식을 2년간 했는데 60㎏이던 체중이 48㎏으로 줄고 정신이 맑아졌습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해왔던 사진 작업에 대해서도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 경구가 새로운 작업의 방향키가 되어 준 겁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은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은 비어 있는 것이요, 비어 있는 것은 곧 물질’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고뇌의 시간을 보내면서 그는 ‘비움(空)’이라는 화두(話頭)로 사진 찍기의 변화를 모색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그는 5회의 개인 전시회를 가졌다. 2001년 ‘대나무골 야생화’(한국가사문학관), 2003년 ‘무등산 들꽃 초대전’(광주 일곡갤러리, 북구청갤러리), 2005년 ‘천 년의 푸른 향-대숲 시리즈’(광주 나인갤러리), 2007년 ‘바다의 숨결’(서울 갤러리 나우), 2009년 ‘대숲은 공(空)하다’(서울 갤러리이즈) 등 5회다. ‘대숲은 공(空)하다’는 그가 고뇌와 갈등을 극복하고 가진 전시회다.
‘대숲은 공(空)하다’에 걸린 작품들을 보면서 필자는 사진인가 수채화(水彩畵)인가를 얼른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작가가 수채화 느낌을 주는 새로운 사진을 보여 주기 위해 피사체를 앵글에 담지는 않았으리라. 그렇다면 작가는 무엇을 찍고 싶었을까.
“대숲은 공하다의 전시회를 통해 우주속의 삼라만상이 모두 텅 비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어 있다(空)는 것이 무(無)는 아닙니다. 공(空)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존재하고 있습니다. 바람은 언제나 비어 있으므로 실체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파동과 주파수를 갖고 있으므로 사물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어 있는 것은 곧 물질입니다.”
비어 있는 것은 곧 물질이라는 말은 바로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필자의 의심은 풀렸다. 작가는 ‘바람(空)’을 찍고 싶었다. 바람을 찍되 바람이 무(無)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色)’임을 말해 주고 싶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는 바람의 존재를 설명해 주는 도구라고 할 수 있다. 바람도 비어 있고, 대나무의 속도 비어 있다.
최근들어 라씨는 본격적으로 사진 공부를 시작했다. 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를 졸업하고 광주대학교 대학원 사진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그리고 광주 두암동 시장안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퇴근 후면 이 작업실에 와서 사진과 관련된 일을 하다가 자정쯤이면 귀가한다.
2009년 6월 서울 전시회를 통해 그는 자신감도 생겼다고 한다. 자발적으로 그의 작품을 매입해 준 수집가들도 생겼기 때문이다.
“결국 예술 행위도 시장논리를 외면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전시회를 하면 우선 많은 사람들이 봐 주어야 하는데 서울에 비해 광주는 훨씬 뒤떨어집니다. 그리고 작품을 사 주는 사람, 즉 수요자의 층도 다릅니다. 광주에서 전시회를 하면 이런 저런 안면으로 와서 사 주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런데 사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사 주는 것과 사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작가의 입장에서는 사 주는 사람보다 사는 사람이 많아야 기분도 좋고 자긍심도 생기게 됩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사는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우문(尤文)인줄 알면서도 어떤 사진기가 좋은가, 그리고 어떤 사진기로 찍어야 사진이 잘 나오는가를 물었다.
“소설가에게 어떤 타자기를 사용해야 좋은 소설이 써지느냐는 질문과 같습니다. 아무린 추한 대상이라도 찍는 사람이 아름다움을 찾아내면 아름다운 사진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