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3심(三心), 4행(四行), 5수(五守)’로 살아가는 김해곤씨
29. ‘3심(三心), 4행(四行), 5수(五守)’로 살아가는 김해곤씨
  • 마스터
  • 승인 2009.12.10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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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신뢰받는 것이 생애 최고의 기쁨입니다”


새마을지도자·농촌지도자 회장·자연보호 명예감시관
문화원 이사·바르게살기위원장·청소년 선도위원…
지인들은 ‘김씨가 어떤 직함을 갖던 잘 해낸다

이른바 공적비(功績碑)라는 것이 있다. 한 사람의 공로(功勞)나 실적(實績)을 담아 세우는 비석을 공적비라고 한다. 공적비는 그 사람이 생애를 마치고 났을 때 후세들이 귀감이 되는 그의 삶을 기리기 위해 세우게 된다. 그런데 종종 그 사람의 공로나 실적에 무관하게 공적비가 세워지는 경우도 있다. 당연히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고, 나중에 그 인물의 악행이 들통나 파괴되는 경우도 있다.


2000년 대전면 강의리 주민들은 마을 어귀에 김해곤씨의 공적비를 세웠다. 그런데 김씨는 높은 벼슬을 지낸 적도 없다, 뛰어난 학문적 업적도 없다. 재산이 엄청 많아 수많은 사람들을 기근(饑饉)에서 구제한 행적도 없다. 그런데도 강의리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 너무도 평범한 촌부(村夫)인 김씨의 공적비를 세운 것이다.

“여섯살때 어머니를 여의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도 홀로 되신 아버지가 염려되었습니다. 그리고 차츰 나이가 들면서는 나로 인해 아버지께서 욕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 늘 조심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광주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도 휴일이면 반드시 집에 와서 아버지 농사일을 도왔습니다. 아버지께서 작고하신지 오래 되었지만 지금도 나로 인해 아버지께서 욕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옛 어른들은 사람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을 ‘효(孝)’라고 했다. 그리고 ‘효행은 모든 일의 근본(孝行 萬事之本)’이라고 가르쳤다. 김씨를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첫머리에 문득 ‘효행 만사지본(孝行 萬事之本)’을 생각했다.


김씨의 효행이나 봉사정신, 그리고 거짓없는 삶 등에 대해서는 일찍이 소문이 나 있다. 그의 삶은 ‘3심(三心), 4행(四行), 5수(五守)’이라고 한다. 3심은 ‘바른 마음, 고운 마음, 넓은 마음’이고, 4행은 ‘사랑하고, 효도하고, 봉사하고, 양보하는’ 것이며, 5수는 ‘시간, 분수, 예절, 질서, 약속’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그는 그렇게 살아왔다. 고향에 정착한 이후 40여 년 동안 고향을 지키면서 ‘공경하고 받드는 마음’으로 살아온 것이다.

김씨의 이력을 살펴본다. 객지에 나가 생활한 시간은 별로 많지 않다. 1962년에 마산군의학교를 수료한 다음 1963년부터 3년동안 제3야전병원수술실에 근무한 것이 객지생활의 전부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힘든 농촌생활을 청산하고 도시에 나가 살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쩐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홀로 계신 부친 생각도 나고, 당시 시작된 새마을운동에도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이것저것 따져보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때 그대로 계속 도시에서 살았더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고향에 돌아와 한 일들이 수입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지금 생활이 더할 수 없이 행복합니다.”


1970년 이후 40여년 동안 그가 해왔던 일을 살펴본다. 새마을지도자, 마을 이장, 예비군 소대장, 농촌지도자 회장, 파출소 방범협의회 회장, 자연보호 명예감시관, 문화원 이사, 재향군인회 이사, 4-H 후원회 이사, 바르게살기 위원장, 한재중학교 운영위원장, 청소년 선도위원, 영산강 유역 환경청 명예감시관 회장, 학교폭력 선도 위원, 명예소방관 등등 그 직함을 셀 수도 없다. 물론 작은 지역에서는 이런 저런 직함을 여러개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대개는 인적자원이 부족해 울며 겨자 먹기로 직함을 갖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김씨는 직함을 갖게 되면 그에 상응하는 구체적인 실적을 반드시 남긴다는 것이 주위 사람들의 평가다. 동시에 여러 개의 직함을 갖고 모든 일을 다 잘 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김씨는 어떤 직함을 갖던 다 잘 해낸다는 것이 지역민의 평가이다. 익명을 요구하는 대전면의 한 인사는 이렇게 말한다.


“시쳇말로 대전면에서는 방귀만 뀌려고 해도 김해곤씨를 찾습니다. 항상 그 사람 뒤에는 많은 사람들이 따릅니다. 여러 단체에서 그를 요구합니다. 그가 들어와야 그 단체가 활성화되기 때문이지요.”


담양문화원 사무국장을 지냈던 김귀수씨는 이렇게 말한다.
“담양문화원 회원 중에는 대전면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김해곤씨가 동참하자고 하니까 대전면 사람들이 무조건 회원으로 가입해 준 것입니다. 대전면에 사는 문화원 회원들은 연초에 한꺼번에 회비를 납부합니다. 평소에 믿음을 주기 때문에 그가 검은 것도 희다고 하면 사람들은 희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김해곤씨는 무슨 일을 맡든 대충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고 반드시 확실한 실적을 남깁니다. 매사에 틀림이 없는 사람입니다.”

지역민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김씨는 이런 저런 선거 때마다 끊임없이 출마 권유를 받는다고 한다. 심지어는 이름만 걸어 놓으면 당선시켜 줄 테니까 출마만 하라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관록을 받지 않겠다는 것은 내 자신과의 약속이며 지금까지 그걸 지켜왔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제가 출마를 안 하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 봤을 때 그런 자리에 앉을 그릇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합니까? 분수를 지켜야지요.”
그렇다면 김씨는 지역민들로부터 얼마만큼의 지지를 받고 있을까? 출마했을 때 과연 당선 가능성은 있는 것일까? 조금은 짓궂은 질문을 했다.


“아마 70% 정도는 저를 믿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70%라고 하면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니까 51%는 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절반만 나를 믿어 준다면 성공한 인생이지요. 그런데 초창기에는 갈등도 좀 있었습니다. 70년대 초부터 새마을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그때 농로확장, 마을 골목 정비 등 사업을 시작하던 초창기에는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속도 많이 상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개인의 이익과 관련해서는 양보를 하지 않거든요. 그런 때는 당장 때려치우고 도시로 나가 살겠다는 생각도 여러번 했습니다. 그런데 밤에 곰곰이 생각하면 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을의 발전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욕 좀 먹으면 어떠냐 하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용기를 내 일을 추진했습니다.”


대개 밖에 나가 활동을 많이 하는 사람들을 보면 집안일은 등한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빵점 남편’이나 ‘빵점 가장’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밖에 나가 열심히 활동하기 위해서는 남보다 일찍 꼭두새벽에 일어나 일을 합니다. 저녁 무렵에도 가능한 한 귀가를 서둘러 또 일을 합니다. 현재 3천500평 정도의 논농사와 비닐하우스 2동을 경작하고 있는데 거뜬합니다. 대신 더 이상 논이나 비닐하우스를 늘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외부활동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설재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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