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노래 부르고 싶습니다”
대학시절 주말이면 사직공원 언덕빼기 호프집에서
음악하는 사람들 만나 노래 부르고 음반도 내고
가수 김원중의 이름 세상에 알리게 된 ‘바위섬’

김원중씨는 대학 1학년 때 5·18을 겪었다. 그 후 군대에 가서 복무를 마치고 다시 전남대학교 농업경제학과에 복학했다. 그리고 얼마후 그는 ‘바위섬’이라고 하는 노래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나는 노래를 좋아해 당시 광주에서 음악하는 선배들과 자주 어울렸지만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걸 목표로 준비를 한 적도 없습니다.”
김씨는 전공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시(司試)를 준비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오로지 사시 준비에 매달려 있다가 주말이면 예전 광주KBS가 있던 사직공원 쪽으로 갔다. KBS로 오르는 언덕배기에는 노부부가 운영하는 자그마한 호프집이 있었다. 그곳에 가면 박문옥, 김정식, 신상균, 김종률 등 음악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김종률은 MBC대학가요제에서 ‘강진과 영랑’이라는 노래로 은상, 전일가요제에서 ‘소나기’로 대상을 받았으며, ‘님을 위한 행진곡’을 탄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다.
이들은 1984년, ‘예향의 젊은 선율’이라는 타이틀로 음반을 내게 된다. 이 음반에는 가수 김원중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된 노래 ‘바위섬’도 들어 있다. 바위섬은 당시 조선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배창희씨가 작사 작곡을 한 노래다.
“바위섬이 나왔을때 항간에 이 노래는 80년 5월의 광주를 상징한다는 말이 떠돌았는데 그게 사실입니다. 배창희씨는 당시의 광주를 외로운 섬으로 생각하며 노래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위섬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겁니다. 저 역시 자고 났더니 유명한 가수가 되어 있더군요. 그때부터 87년까지 방송, 행사 등 바쁜 일정에 쫓기면서 그야말로 정신없이 가수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김씨는 직업적인 가수(또는 연예인)로 승승장구하지는 못했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광주지역의 가수 아무개씨는 말한다.
“매니저 쪽에서 볼 때는 돈이 안 되는 가수였습니다. 예를 들어 나이트클럽 디제이를 하면 손쉽게 거액을 벌 수 있는데 김원중은 가수생활을 못했으면 못했지 그런 짓은 못하겠다고 거절한 겁니다. 일반적인 대중가수처럼 활동하지 않겠다는 자기 나름의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를테면 노래에 순정을 바쳤다고나 할까요.”
광주로 내려온 그는 1987년 가수 김원중이라는 이름으로 첫 번째 독집음반을 낸다. 이 음반 안에는 문병란 시인의 시에 박문옥씨가 곡을 붙인 ‘직녀에게’가 들어 있다. 직녀에게는 분단의 아픔을 담은 노래다. 이어서 2집 독집음반을 내는데 이 음반은 사장(死藏)되어 버리고 만다. 매니저와의 원만하지 못한 관계 때문이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1989년, 김씨는 ‘그대 오르는 언덕’이라는 노래를 발표한다. 이 노래는 노태우 정권시절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방북한 문익환 목사에게 헌정(獻呈)한 노래다. 이렇듯 시대적 아픔을 담은 노래를 잇따라 발표하면서 김씨의 노래 부르는 공간에 변화가 온다. 바위섬을 휘황찬란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불렀다면, 직녀에게와 그대 오르는 언덕은 자유와 민주화의 열망이 뜨거운 집회현장에서 불렀다. 그러면서 김씨에게는 ‘민중가수’라는 수식이 붙는다.
“민중가수라는 장르가 있나 모르겠습니다. 처음엔 거북스럽게 들렸지만 이제는 진실되게 살고, 정의로운 마음으로 살고, 옳은 신념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나에게 준 과분한 훈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국어사전에도 ‘민중가수’라는 낱말은 안 나와 있다. 필자 역시도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민중가수 김원중’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것은 사실이다.

김씨의 가수활동을 이야기하면서 1990년부터 시작한 거리공연은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그때까지 5·18기념행사는 공식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정보기관으로부터 감시를 받았으며, 실내행사로 치러졌었다. 그런데 김씨는 이 날 광주 충장로 뒷골목에 자리한 구 학생회관 계단에서 오월 한달동안 바위섬, 직녀에게, 님을 위한 행진곡 같은 노래를 불렀다. 지금까지 실내행사였던 5·18기념행사가 밖으로 나온 것이다.
“광주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오월 그때 나는 무엇을 했나하는 부채의식을 갖고 있었을 겁니다.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노래로 빚을 갚겠다는 심정으로 그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천주교평화위원회 간사이던 홍세현씨가 학생회관 앞의 거리공연을 보고 위원회에 건의해 다음해부터는 금남로 가톨릭센터 앞에서 공연을 하게 됐다. 대구, 마산, 제주, 서울, 성남, 진주, 부산 등에서도 가수들이 합세했다. 바야흐로 5·18의 전국화가 촉발된 것이다. 그리고 1992년 구 전남도청 분수대에서 공식적인 5·18 전야제가 열렸다.
그 후로도 김씨의 사회참여적인 공연은 계속된다. 1996년에는 ‘안티비엔날레’에 동의하는 공연도 했다. 이 공연을 망월동 묘역에서 매일밤 2시간씩 49일간 했다. 2002년 대선을 앞 두고는 ‘잘 가라, 지역감정’이라는 표제를 걸고 전국 49개 도시 순회공연도 했다. 1999년 백범 김구 추모 뮤지컬 ‘못 다한 사랑’ 김구 역(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 1999년부터 2008년까지 북한에 비료·자전거·노트·나무 보내기 모금 공연 다수, 2003년부터 2004년까지 북한 어린이 사랑 모으기 달거리 공연 24회, 2005년부터 2008년까지 북녘 어린이 빵공장 건립을 위한 모금 공연(현재 탤런트 권해요와 북녘 어린이 빵공장 홍보대사 맡고 있음) 등 그가 기획하고 무대에 선 공연은 셀 수도 없이 많다.
이후 2008년 김씨는 ‘느리게 걸어가는 느티나무’라는 제목으로 다섯번째 앨범을 냈다. 이 앨범에는 ‘나는 바이크 타고 시베리아에 간다’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술 한 잔’ ‘그대 앞에 언제나 깨어 있고 싶어’ ‘시냇가에서’ 등의 노래가 들어있다.
“세대를 아우르며 넓은 쉼터를 드리운 느티나무처럼 살고 싶은 것이 제 꿈입니다. 느티나무 아래 있으면 오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겠지요. 길에서 만난 참 좋은 친구들과 함께 허물없이 살아가고 싶습니다.”
아주 많이 팔린 책을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그런데 베스트셀러는 일정 기간에만 많이 팔리다가 유행을 타듯 사라지는 책을 말한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흘러도 변함없이 팔리고 읽히는 책을 스테디셀러라고 한다. 소설가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같은 책을 스테디셀러라고 할 수 있다.
노래도 그렇게 규정짓는 말이 있는지 모르겠다. 바위섬은 노래가 나온 지 25년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애창하고 있다. 노래가 나왔던 1984년 이후에 출생한 사람들 중에도 바위섬을 아는 사람들이 많다. 어쩌면 박재홍의 ‘울고 넘는 박달재’처럼 오래 오래 사랑받는 노래가 될 것 같다.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