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장 재임시절에 추성경기장의 기틀 마련하고
9개 마을을 행정구역 조정으로 담양읍에 편입
애로사항과 원성 많았던 청죽시장 정비사업
눈곱만한 사

고향을 지키며 팔십 평생을 살아온 전이규씨는 그동안 여러 직함을 갖고 그에 걸맞는 역할을 해 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담양읍장, 행정동우회 회장, 게이트볼 회장, 문화원장 등을 지냈다. 젊은 시절 한 때는 정당 활동도 했다. 그런데 이 모든 직함과 관련하여 일일이 다 이야기를 풀어가기는 어렵다. 그래서 가장 오랫동안 지냈던 담양읍장과 관련하여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전이규 씨는 그의 나이 사십 중반이던 1973년 담양읍장이 되었다. 그 후 17년 동안 담양읍장의 직을 수행했다.
“그때의 읍장은 정규직 공무원이 아니라 별정직이었습니다. 정년 보장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그리고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신념으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는 첫 출근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아내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사무실에 전화하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 다음으로 그가 출근하는 시간에 아이들의 학용품 값, 통학비 등 가정경제와 관련한 이야는 절대 꺼내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위에서 읍장 사모님이라고 부르면 ‘읍장 사모님이 아니라 아무개 어머니’라고 바르게 잡아달라는 당부를 했다는 것이다.
“직원들에게 하는 첫인사에서 잠자리에 들면 편하게 발 뻗고 잠자는 읍장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편하게 발 뻗고 자려면 평소 투명하고 정당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특히 가치관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는 공직자들에게 공무를 맡긴다는 것은 고양이한테 생선가게를 맡기는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필자는 주위로부터 그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전이규 씨가 담양읍장으로 재직하면서 몇 가지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읍장을 맡고 나서 일제 때 오늘날의 추성경기장 일원에서 사이클 대회가 열렸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체육시설을 만들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곳 일원이 군유지였습니다. 그래서 3년 동안 영세민취로사업을 통해 둑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새로 온 군수가 부당한 사업이라며 중지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내가 말을 안 들으니까 군수가 불도저로 둑을 밀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둑이 낮아지기는 했지만 운동경기장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겁니다.”
담양군민 대다수의 사람들도 추성경기장이 전이규 담양읍장 시절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청죽시장 정비 사업은 애로사항도 많고 주민들에게 원성도 많이 샀습니다. 그렇지만 내 마음에 눈곱만한 사심도 없었고, 담양의 미래를 위해서는 욕을 먹더라도 누군가가 총대를 매야하겠기에 강행을 했습니다.”

현재 진우네국수집에서 만성교까지 이어지는 곳에는 불법 건물들이 난립해 있었다. 심지어는 천변 아래에도 돼지우리 같은 것이 들어서 있어서 천변의 오염이 심했다.
“관방제림은 담양의 명물입니다. 이런 명물이 난립한 불법 건물로 인해 훼손되고 있었는데 이전의 읍장들도 이걸 정비하겠다고 공언했지만 해결을 못 봤습니다. 우선 강행하지 않고 다른 마을의 반상회 같은 데서 청죽시장 정비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머지않아 인근 건물이 철거될 것이라는 말을 흘렸습니다. 일종의 성동격서(聖東擊西) 전법이지요. 그리고 매일 직원들을 내보내 호별 방문을 하며 설득하도록 했습니다.”
성동격서(聖東擊西)는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을 친다는 뜻이다. 그런데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민심을 소란하게 한다며 정보기관에서 중지요청을 했고, 군수도 그만 두라는 지시를 했으며, 협박전화도 걸려왔다. 그리고 주민들이 돈을 모아 담양읍장의 처사가 부당하다는 언론보도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지역 주재기자인 친구 이 아무개 씨를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즉각 보도가 나왔고, 지역 여론은 담양읍장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렇게 해서 오랜 동안 골칫거리로 남아있던 청죽시장 정비 사업을 끝내게 된 것이다. 당시 담양읍 번영회장을 맡고 있던 김 아무개 씨는 전 씨의 공적비를 세워주겠다고 했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 글이 공적비를 대신해 주었으면 한다.
담양읍 행적구역 조정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재 임기 때 무정면 반룡리, 오계리, 금성면의 학동, 금월리, 삼만리, 월산면의 운교리, 삼다리, 가산리, 봉산면의 강쟁리 등 9개 마을이 행정구역 조정으로 담양읍에 편입되었습니다. 자치시대가 도래하면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아 서둘러 추진했는데 일이 잘 성사되었습니다.”
그는 한 때 당시 집권 여당의 공천을 받아 도의원에 출마한 적도 있다.
“그런 일이 있을 것을 예견하고 퇴직금을 연금으로 돌렸습니다. 현금을 갖고 있으면 그런 유혹에 쉽게 흔들릴 것 같아 그렇게 했는데 결국 출마를 하게 된 겁니다. 이에 대해서는 운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의지대로만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생살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선 가능성은 영 퍼센트도 없지만 이런 저런 인간관계를 뿌리칠 수 없어 출마를 했는데 이제 와서 후회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필자는 그에게 어느 원로에게 했던 똑같은 질문을 했다.
“지역의 연로하신 분들이 후배들의 앞길을 막고, 결국 지역 발전의 저해요소가 된다는 여론이 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목장지폐 인장지덕(木長之弊 人長之德)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큰 나무 밑의 작은 나무는 피해를 보지만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덕을 본다는 뜻입니다. 선배들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만 욕심낼 것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후배들을 키워 지역의 일꾼으로 만드는 것은 선배들의 몫이지요.”
필자는 추성경기장 조성이 민선시대에 들어서서 시작된 일로 알고 있었고, 청죽시장 부근의 예전 모습에 대한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이제야 비로소 그 일들이 전이규 읍장시절에 시작되고 마무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일들은 기념비를 세울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담양의 역사 한 페이지에 그 내력을 밝히는 것이다.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