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대한민국 떡살 기능 전승자’ 김규석씨
44. ‘대한민국 떡살 기능 전승자’ 김규석씨
  • 마스터
  • 승인 2010.05.27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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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거래는 서로의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10년 동안 서울서 조각공부하다 대전면에 삶의 터
1996년 ‘木山’이라는 이름을 내 걸고 떡살에 혼신

찍혀서 나올 이차적인 산물 상상하며 조각해야 하고

예전엔 명절이나 집안에 특별한 행사때가 되면 떡을 만들어 먹었다. 그시절 집집마다 한두 개의 떡살을 비치해 두었었다. 그 시절의 떡살은 하나의 생활용구였다. 떡살은 절편같은 것을 눌러 떡의 모양과 무늬를 찍어내는데 쓰는 연모를 말한다. 떡살을 만드는 재료는 주로 감나무, 대추나무, 박달나무 등을 사용한다. 이 나무들이 단단하기 때문이다. 김 씨는 비교적 구하기 쉬운 감나무를 많이 사용한다.

‘대한민국 떡살 기능 전승자’ 김규석씨가 대전면 대치리에 ‘목산(木山)’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삶의 터를 잡은 것은 1996년이다. 그런데 담양사람 중에 떡살 기능 전승자 김규석씨가 대전면 대치리에서 목공예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김 씨는 자신이 별로 바깥나들이를 하지않고 엎드려 일만 해서 그런 모양이라고 말한다.


”나는 함평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습니다. 그런데 담양에 와서 15년을 살았고, 앞으로 영원히 담양에 살 겁니다. 담양으로 오려고 할때 영암에서는 내가 살 집과 작업실까지 마련해 주면서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다보니 담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운명이지요.”
김 씨는 담양으로 들어와 터를 잡기전 10년동안 서울에서 조각공부를 했다. 그런데 서울에 있을 때는 떡살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남도의례음식 무형문화재 7호’ 이연채 여사를 알게 되었다. 김 씨는 이연채 여사를 할머니라고 부른다. 각별한 사이였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연채 할머니는 동동주를 아주 잘 빚었습니다. 그 동동주 맛에 취해 할머니 집을 자주 찾게 되었는데, 제가 다식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이연채 할머니와 함께 작업을 할 때는 다식판과 우리 고유의 무늬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해냈습니다. 제가 다식판을 만들면서 내 나름의 독창적인 무늬를 창안해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 있는 무늬였다는 것입니다. 그 누군가가 고려시대 사람들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는 무늬들은 이미 고려시대에 완성된 것들입니다. 한 마디로 고려시대는 우리나라 무늬의 르네상스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무늬는 언어(言語)였습니다. 무늬로 의사소통을 했습니다. 그래서 명절이나 돌, 생일, 결혼 등 가족행사때 사용되는 떡살무늬가 다른 겁니다.”

이연채 여사와 함께 지낸 10년 동안 김 씨는 오로지 떡살에 빠져 지냈다.
“할머니는 만나기만 하면 떡살 기능을 이어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할머니 대에서 끊겨 사라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작명가(作名家)에게 부탁해 ‘목산(木山)’이라는 공방 이름까지 지어주셨습니다. 타계하시면서도 유언으로 그 당부를 하셨습니다. 시작은 했는데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울에서는 해부학이나 데생 같은 조각의 밑바탕이 되는 공부를 했는데 떡살 만드는 일에는 전혀 보탬이 되지 않았습니다.

떡살은 손재주만 가지고 만들 수는 없습니다. 떡살이라는 연모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떡에 새겨진 무늬가 어떻게 나오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만들어야 합니다. 일반 조각작품은 공간장식을 생각하면서 만들지만 떡살은 찍혀서 나올 2차적인 산물을 상상하면서 만들어야 하므로 손과 머리가 함께 만들어야 합니다. 또 떡이 찍혀서 나올 때 떡의 살 즉 무늬가 제대로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각도를 계산하여 조각해야 합니다.”

그는 떡살에 대해 깊이 들어가면서 한때는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자신의 지식이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그래서 명리학과 풍수학을 공부하고,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민화집의 90%를 섭렵했다.


김 씨는 다식판 연구를 하는 한편 음식과 관련한 저서 집필에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2002년 ‘전통음식·떡살’을 펴냈다. 이 책은 남도음식을 집대성한 것이다. 이어서 2005년 ‘소중한 우리 떡살’, 2006년 ‘아름다운 떡살무늬’를 펴냈다. 이 두 권은 20년만에 나왔는데 제작비가 2억원이나 들었다. 다음으로 2007년 ‘지혜로운 우리 음식’을 펴냈는데 이 책은 음식을 음양(陰陽)으로 풀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현재는 그의 목공예 작품을 모은 ‘목공예 작품집’을 집필하고 있다. 이 책은 10년 계획으로 시작했는데 이제 5년이 지났다. 이렇듯 집필도 해야 하고 작품도 만들어야 하므로 외출은 생각지도 못할 형편이다. 작업은 새벽 2시부터 시작되는데 하루 16시간 일을 한다.
‘대한민국 떡살 기능 전승자’인 김 씨는 ‘목공예 명장(明匠)’이라는 인증도 받았다. 이 정도라면 그의 작업이 신비롭게 보일 수도 있고, 한 시대의 문화(文化)를 주도하는 장인(匠人)으로서 특별한 대우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작업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문화는 대중들이 외면하면 소멸되고 맙니다. 문화는 어느 특정인이나 단체가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의 요구에 의해서 성장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저 혼자만 떡살을 만들고 있습니다. 누가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중들이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내가 죽으면 떡살도 사라지게 될 거라고 염려를 하는데 공연한 걱정을 하는 겁니다. 대중들이 외면하면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고, 또 언젠가는 대중들이 필요로 하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니까요.”

김 씨는 목공예를 하면 30년을 지나왔다. 그 사이 대한민국 떡살 기능 전승자와 목공 명장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단 한 차례도 개인전시회를 갖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주문을 받지 않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초청강의에 응하지 않는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주문을 받게 되면 내 생각이 아니라 주문한 사람의 생각대로 만들어야 합니다. 와서 보고 필요하면 가져가면 됩니다. 강의를 하지 않는 이유는 입을 사용하면 손이 놀기 때문입니다. 나는 일꾼으로 태어났지 학자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현재 준비하고 있는 책이 완성될 때까지는 죽어라고 일을 할 겁니다. 그 다음에는 쉬면서 놀아야지요. 인생은 열심히 일하다가 적당한 시기가 되면 쉬면서 놀다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작업실에는 아주 큰 통나무를 다듬어 만든 의자가 있다. 2년이 걸린 작품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저 의자를 보더니 대뜸 내가 가져가야지 하면서 1억원을 준다고 하대요. 그래서 싫다고 했습니다. 작품의 거래는 돈을 받고 파는 매매행위가 아닙니다. 작품 거래는 서로의 뜻이 맞아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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