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십 평생 목숨 이어준 대나무가 밥줄입니다”
종잇장 같은 대오리를 뜨는 유일한 서한규씨
채상 한 벌을 만드는데 보름 정도 걸리고
당연 가격이 비싸 대중적인 것과 거리 먼데도
채상 만드는 일에 매달

채상(彩箱)은 대나무를 얇고 가늘게 쪼개 종이처럼 부드럽게 훑어 실 같이 만든 대오리(살)를 한 올 한 올 엮어(담양에서 ‘전다’고 함) 만든 대나무 상자다. 겉대와 속대의 서로 다른 특성을 그대로 살려 만들거나 형형색색의 천연물감으로 염색을 하여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베를 짜듯 엮어 만든다. 마치 붓으로 물감을 칠한 듯 비단결처럼 곱고 아름다워 ‘비단 같은 상자’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채상을 절(엮을) 종잇장 같은 대오리를 뜨는 사람은 서한규씨 밖에 없다. 또한 채상 한 벌을 만드는데 보름이 걸릴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므로 가격이 비쌀 수 밖에 없고 대중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 씨는 요즘에도 채상 만드는 일에 매달려 하루해를 보낸다.
올해 여든한살인 서 씨는 열여섯살부터 대바구니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열다섯살에 담양동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우리 집은 벌뫼(만성리 2구)였는데 당시 100여호가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80여호가 죽석(대나무 장판이나 대자리), 삿갓, 대부채 같은 것을 만들었습니다. 이웃집에 다니면서 어깨너머로 죽제품 만드는 일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해방과 전쟁을 겪으면서 스물세살이 되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대일을 했다.
“그런데 나는 대일을 하면서 늘 남이 안 만드는 것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곱게 만들면서 재료값이 덜 들고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는 것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런 생각으로 대일을 하던 이 무렵 서 씨는 ‘죽부인(竹夫人)’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죽부인은 차정리[茶田里]에 사는 전삼채씨 혼자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술을 배우기 위해 술과 돼지고기를 사들고 자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안 가르쳐 주어요. 그래서 혼자서 궁리를 해 조그맣게 모형 죽부인을 만들어 가지고 전삼채씨에게 보여주면서 평가를 해달라고 했더니 제대로 만들었다고 평가를 해주었습니다.”
죽부인은 여름철 끌어안고 자는 대나무 제품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남자들의 전용물이다. 삼복더위를 쫓기 위해 안고 자는 또 다른 부인이다. 그래서 이 죽부인은 아들에게는 물려주지 않는다.
“대나무는 내 목숨을 이어준 밥줄입니다. 대나무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내가 없었겠지요. 그런데 스스로 생각해 봐도 이상한 것이 대나무 제품은 어떤 것이든 한 번 보면 그대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나무로 먹고 살라는 팔자를 타고 난 모양입니다. 그런데 한 때는 대일이 너무 지겨워 대처로 나가 살 생각도 했습니다.”
10여년 동안 고향 벌뫼에서 대일을 하던 서 씨는 대처로 이사를 가려고 집을 팔았다. 그리고 셋방에서 봄을 기다렸다. 이때 담양에는 한창 대바구니 수출 바람이 일고 있었다. 어느 날 봄이 되면 이사 갈 요량으로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데 대바구니 수출 공장 사장이 서 씨를 찾아와 근무를 요청했다. 그래서 이사를 포기하고 다시 담양에 눌러앉아 10년 동안 월급쟁이를 했다. 그런데 비닐바구니가 등장했다. 이번에는 서울의 비닐공장 사장으로부터 자기네 공장에서 일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서 씨는 대처로 나갈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로 올라간 서 씨는 50여명의 직공을 감독하는 공장장으로 일했는데 월급도 담양에서 받던 것보다 훨씬 많았다.
“한 3개월 지났는데 담양 대바구니 공장 사장이 다시 와달라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내려왔는데 그때 죽피(竹皮) 방석이나 죽피바구니 수출이 호황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생산되는 제품은 거의 미국으로 수출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죽피제품의 원료로 쓰이는 볏짚에서 이화명충 벌레가 발생한 것이다. 이 문제로 타격을 입고 공장은 문을 닫고 말았다.
“다시 대일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저것 하다가 다시 대칼을 잡았는데 이번에야 말로 독특한 것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어 이런저런 궁리를 했는데 그때 시렁 위의 대나무 고리짝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할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것입니다.”
그때부터 서 씨는 대나무 고리짝 즉 ‘채상(彩箱)’ 재현에 몰두했다. 당시 담양에는 채상을 만들 줄 아는 김동연씨가 살아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서 씨는 자기의 눈썰미 하나에만 의존한 채로 채상 만드는 일을 했다. 그러면서 실패를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1982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 채상을 출품하여 대통령상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서 씨의 이름이 세상이 널리 알려졌다. 이후 서 씨는 각종 경진대회에 채상을 출품하여 최고의 상을 받았다. 그리고 198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3호 채상장 보유자’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 분야 기능 보유자로는 국내에서 서 씨가 유일하다.
채상의 기원은 정확히 할 수 없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나 다른 문헌에 보면 ‘제작과정이 까다롭고 비싸 처음에는 궁중과 귀족계층의 여성이 사용했던 공예품이었으나 조선 후기부터 경제력이 있는 서민층까지 널리 보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채상은 포개는 수에 따라 3합, 5합, 7합이 있는데, 대나무 채취에서 채상 짜기(절기)까지 4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대나무는 3-4년 자란 것을 사용한다. 5년이 넘으면 늙어 물러지고, 1-2년 생은 일하기는 좋으나 나중에 변색이 될 염려가 있다. 대오리 즉, 살은 기계로 뜰 수 없다. 살은 대나무 하나에서 4-5겹을 떠낸다. 다음으로 떠낸 살은 잘 휘게 하기 위해 물에 불린 후 무릎에 대고 칼날로 훑어 종지처럼 얇고 폭이 고르게 한다. 다음이 채색(彩色) 단계이다. 염료로는 치자, 쪽, 홍화, 갈대, 쑥, 대황, 돌가루 등을 사용한다. 마지막 단계는 짜기, 즉 절기다. 색깔이 곱게 밴 대오리를 가지고 겉상자와 속상자를 전다. 그리고 채상을 절면서 줄, 네모, 방울, 태극, 만(卍), 아(亞), 수(壽), 복(福) 등 40여 가지의 문자와 문양을 새긴다. 절기가 끝나면 테를 두른다. 테는 대나무로 두르고 소나무뿌리껍질로 만든 끈으로 잡아맨다. 이렇듯 모든 단계가 끝나면 속상자 안쪽에 한지를 두 겹 바르고, 닳기 쉬운 모서리에 비단을 발라 감싸면 마침내 아름다운 채상이 탄생된다.
“채상으로 딸 일곱을 기르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요새 와서는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행히도 둘째딸 신정이가 전수자로 같이 일하고 있어 커다란 위안이 되고 있습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3호 서한규씨는 올해 여든한살이다. 그런데 전혀 그 나이로 보이지 않고 참 곱게 늙었다는 생각이 든다. 서 씨의 모습이 아주 오래 되어 고색창연(古色蒼然)하면서도 단아(端雅)한 채상 같다.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