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이라고 특별하게 보는 것은 싫습니다”
현재 담양읍내 한복집에서 20년 넘게 했지만
그다지 돈을 모으지는 못했습니다
두 딸 대학 보냈고, 우리 네 식구 굶지 않고
살아왔으니까 그것만으로 감사해

어떤 한 사람이 참으로 어려운 처지를 이겨내고 꿋꿋이 살아가는 경우를 ‘인간 승리’라고 말한다. 한복전문가 김현호씨는 돌이 막 지나던 무렵 소아마비를 앓았다. 그러나 세상을 비관해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고 한다. 남들처럼 걸어봤으면 하는 생각은 했다. 김씨는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기 위해 한복을 배웠다. 마흔살이 되던 무렵에는 장애인 기능경진대회에 나가 내리 3년동안 동상, 은상, 금상을 받았다. 김씨는 현재 담양읍내에서 한복집을 운영하고 있다.
결혼해서 두 딸을 낳았다. 큰딸은 대학을 졸업해 취업을 했고, 작은딸은 대학에 다니고 있다. 남편도 몸이 성치 않다. 그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건강이 나빠졌는데 그 바라지에도 소홀함이 없다. 김현호씨는 ‘인간 승리’의 한 본보기다.
김씨는 거동이 불편해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요즘에는 유아들에게 소아마비 예방주사를 접종하지만 옛날에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소아마비를 앓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제 부모님의 무지를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가 걸린 것이니까 운(運)이 없었다고 봐야지요. 학교에는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무학(無學)이지요. 다행히도 학교에서 책을 주어서 1, 2학년 과정은 부모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농사일이 바쁘니까 저만 끼고 가르칠 수 없었습니다. 3학년 과정 이후부터서는 동생들의 참고서를 보면서 혼자 공부했습니다.”
사실 보통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읽고 셈하는 것만으로도 불편함은 없을 것이다. 이 정도만 익히면 무식(無識)은 아니다. 그러니까 김씨의 경우는 무학은 아니다. 제도권 학교의 졸업장이 없을 뿐이다.
김씨는 이제껏 불행하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가족들에게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고 살았기 때문에 자신의 처지가 불행하게 생각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김씨가 예닐곱살 되던 무렵 김씨의 부모는 딸에게 보조기와 목발을 준비해 주었다. 그런데 딸은 그게 부끄러워 그런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보조기와 목발이 그렇게 싫었는데 열일곱살쯤 되니까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보조기와 목발을 의지해서라도 남처럼 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 김씨는 여수 애양재활병원에서 세 차례나 수술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차도는 별로 없었다. 그러면서 나이는 훌쩍 스물을 넘겼다. 나이가 들면서 자기로 인해 겪는 부모님들의 심적 고통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립하기 위해 당시 광주사직공원 부근에 있는 ‘계명여사’에 들어갔다. 그런데 한복 강좌가 없었다. 그래서 석달후 다시 전라북도 익산 ‘성애원’으로 옮겨 갔다. 그곳에서 6개월 동안 한복을 배웠다.

6개월 과정 수료 후 곧바로 익산 재래시장 안에 있는 한복집에 취업을 했다. 학원에서는 종이로 옷을 만들었는데 한복집에서 옷감을 사용하기 때문에 착오를 일으켜 처음에는 옷감을 버려놓기도 했다.
한복집의 일감은 많았다. 새벽 여섯시부터 다음날 새벽 두시까지 일을 했다. 하루 네시간 정도 잠을 자면서 일을 했다. 일을 하다가 옷감을 대충 치우고 그 자리에서 잠을 자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렇지만 노동에 비해 보수는 많지 않았다. 그렇게 익산 재래시장 한복집에서 일년동안 고생을 하고 나니까 무서운 것이 없어지고 자신감도 생겼다. 담양으로 돌아가 삯바느질을 하기로 했다. 담양으로 돌아와 담주리에 방 한칸을 얻었다. 아버지가 공업용재봉틀을 하나 사 주었다. 재봉틀 가격은 80년대 중반 시세로 45만원이었다. 김씨는 지금도 그 재봉틀을 쓰고 있다.
담주리에서 삯바느질 일을 하고 있던 이 무렵 결혼말이 나왔다. 상대는 같은 무정면 사람이었다. 남자는 고교시절 학교 대표 축구선수를 했던 건장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하반신의 근력이 자유롭지 못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후천성 장애였다. 그 남자가 김씨에게 청혼을 했다.
“청혼을 받고 나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둘 다 불구인데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양가 부모들도 반대를 했습니다. 둘 중 한사람이라도 성해야 하는데 둘 다 보행이 불편한 사람들이니까 걱정이 되었겠지요. 그런데 남자가 아주 적극적으로 나왔습니다. 저 역시도 같은 처지라서 서로를 이해하고 의지하면서 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음을 정했습니다. 마음을 정한 뒤 뭘 하면서 살 것인가 물었더니 제가 하는 한복 일을 함께 하겠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남편은 요모조모로 제가 하는 일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스물여섯에 결혼을 했다. 결혼 후에는 읍내에 자그마한 가게를 냈다. 첫딸을 낳았다. 그리고 둘째아이를 임신했다. 그런데 남편이 오토바이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이 일로 인해 3년 동안 저축해 놓은 돈을 모두 써버렸다.
김씨는 20년 넘게 현재의 가게에서 한복집을 하고 있다. 처음 가게를 열었을 때는 자본금이 적어 옷감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찾아왔다가 그냥 가는 손님들이 많았다. 그런데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단골이 많이 생겼다. 광주에서 찾아오는 단골들도 많다. 장애인기능경기대회에 나가 내리 3년 동안 동상, 은상,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 사이 가게도 세 차례나 넓혔다.
얼마 후에는 이불집을 겸했다. 이불은 혼수와 관련이 있어 시작했는데 애로사항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리를 쓸 수 없기 때문에 이불을 올리고 내리는 데 힘이 들었다. 그런데 손님들 앞에서 어렵게 이불을 올리고 내리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손님들이 없는 시간에만 그 일을 했다. 의자 위에 방석을 포개놓고 그 위에 올라가 높은 곳에 이불을 올려놓는 일을 했다. 그런데 얼마 후부터는 손님들이 그 일을 했다.
“정말 많은 분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장애인을 특별하게 보는 것은 정말 싫습니다.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들과 빗겨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정상적인 사람들은 십중팔구 뒤돌아서 우리를 바라봅니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특별대우를 받는 것도 달갑지 않습니다. 자립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는 것이 진정으로 장애인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아를 둔 부모들의 공통적인 소원은 그 장애아보다 하루 늦게 죽는 거랍니다. 장애아가 안 잊혀 눈을 감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장애인이 자립하는 것은 효도하는 길입니다. 한복집을 20년 넘게 했지만 그다지 돈을 모으지는 못했습니다. 두 딸 대학 보냈고, 우리 네 식구 굶지 않고 살아왔으니까 그것만으로 감사해야지요. 그런데 돈이 좀 생기면 장애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좀 해 보고 싶습니다.”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