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현대미술의 새 장을 연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 씨
50. 현대미술의 새 장을 연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 씨
  • 마스터
  • 승인 2010.08.17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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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정서(情緖)는 내 작품세계의 모태(母胎)입니다”

현대미술의 화두(話頭)는 새로움입니다
백남준씨가 세계의 거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나비가 살아 움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는 현대미술의 거장(巨匠)으로 평가 받고 있다. 1984년 1월 전 지구촌에 위성 생중계된 백남준씨의 작품 ‘굿모닝 미스터 조지 오웰’은 전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지구촌에서 2천500만명이 시청했다. 이후에도 그는 워서 아트 3부작으로 ‘바이 바이 커플링’(1986), ‘손에 손 잡고’(1988) 등을 발표했다.


백남준 씨는 제1회 광주 비엔날레(1995) INFO art 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같은 해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설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로써 한국미술이 세계진출을 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는 2006년 1월 29일, 미국 마이애미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가 생전에 활동했던 여러나라에서 유해를 안치하려고 했다. 그래서 서울, 뉴욕, 독일에 나누어 안치하게 되었다.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씨의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21세기 현대미술의 거장 백남준씨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했다. 이이남씨가 백남준씨와 동등한 반열에 올라있는 예술가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이이남씨의 작업실에 들러 그가 그동안 해왔던 일련의 일들을 살펴보다가 문득 백남준씨가 생각났을 뿐이다.

이이남씨는 봉산면 삼지리에서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다닐때의 장래 희망은 화가였다.
이씨는 담양중학교와 담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 1학년이던 어느 날 그는 미술실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그리고 미술실 벽면에 걸린 그림 액자를 하나 보았다. 그 그림을 보는 순간 그는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고 술회한다. 그 길로 미술선생님을 찾아가 뜻을 밝히고 미술부에 들어갔다. 그런 뒤 시간만 나면 그림 그리기를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유년시절과 청소년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것이 참으로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야말로 방목(放牧)하듯이 자랐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연과 친화(親和)할 수 있었던 겁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작업의 영감(靈感)은 유년시절과 청소년시절의 추억속에서 얻고 있습니다. 시골정서(情緖)는 내 작품세계의 모태(母胎)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후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조소(彫塑)학과에 진학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구상 조각을 했다. 졸업후 선배의 소개로 만화영상학을 강의했다.


“이때 클레이 애니메이션을 만나게 됩니다. 이를 통해 흙으로 만든 움직이지 않는 조소 작품들이 살아 움직이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경험을 계기로 미디어 아트의 세계에 뛰어들게 된 겁니다. 사실 저는 컴퓨터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기계치(器械痴)였습니다. 남보다 열배 스무배 더 뛰어야 한다는 각오로 했습니다.”


이씨는 이 분야에 대해 좀 더 체계적인 연구를 하기 위해 연세대학교 영상예술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런데 그의 작품은 2000년대 중반부터 해외 아트페어에서 먼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보수성이 강한 한국미술계는 비디오나 영상 작업의 컬렉션에 대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미술계에서도 미디어 아트를 새로운 미술 장르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이이남씨의 이야기를 쓰면서 나름으로 많은 고민을 했다. 일반 대중들에게 아직은 생소한 장르인 ‘미디어 아트’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었다. 그래서 내 나름으로 정리를 해 보았다. 미디어 아트는 기존의 고전작품을 작가가 다시 해석하여 텔레비전 모니터를 통해 움직이는 그림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이씨의 작품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2007년, 그는 뉴욕 아트페어에 신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를 재해석한 ‘신초충도(新草蟲圖)’와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해돋이’를 재해석한 작품 등 네 작품을 출품했다. 초충도 속의 나비가 살아 움직이고 해돋이 속의 돛단배가 움직이고 물결은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너울거리는 디지털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 네 작품 모두가 팔렸다.


이어서 2007년 5월, 코엑스에서 열린 한국 국제 아트페어에 ‘8폭 병풍’과 소품 여섯 작품을 출품했다. 8폭 병풍은 남종화가 의재 허백련과 소치 허련의 작품을 디지털 병풍으로 만든 것이다. 이 작품들도 모두 팔렸다. 이 8폭 병풍은 런던 ‘사치갤러리’에 전시되기도 했다. 이때 토니 블레어 전 총리의 부인 셰리 블레어는 이 씨의 8폭 병풍을 보고 “테크놀러지가 뛰어난 한국에서 나올 법한 작품”이라고 극찬을 했다. 그의 미디어 아트 작품은 미국, 중국, 러시아, 호주, 싱가포르, 스위스 등 여러 나라의 컬렉터들이 소장하고 있다.


2008년, 이씨의 작품은 홍콩 크리스트 경매장에서 추정가를 뛰어넘는 6천600만원에 팔리기도 했다. ‘꿈’이라는 작품이다. 모네의 두 작품과 남농 허건의 작품을 조합하여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은 40인치 모니터 3개를 연결한 것인데 왼쪽의 모네 그림 속에서 나온 배가 남농(南農) 허건(許楗)의 산수화로 들어갔다가 오른쪽의 다른 모네 그림으로 서서히 항해해 간다.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이 작은 배에는 이이남의 꿈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 씨의 작품 세계나 표현 방법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현대미술의 화두(話頭)는 새로움, 즉 신선함입니다. 백남준씨가 세계의 거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넥타이를 자르고, 연주하던 피아노를 망가뜨리는 것이 이상한 해프닝으로 보일 수 있지만 아무나 그런 발상을 해내는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도 제 작업이 어떻게 변화하고 그 끝이 어디인가는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현대미술은 뉴욕과 런던이 주도하고 있는데 새로운 것, 신선한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미술계는 이 씨의 작업에 대해 주목하면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그에 따라 하정웅 청년 작가상(2002), 제8회 광주미술상(2002), 신세계 미술 대상(2005), 올해의 미술가 대상(2005), 대한민국 올해의 청년 작가상(2009), 선 미술상(2010) 등 많은 상을 받았다.


“선 미술상은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주는 상인데 이 상을 받게 되면 선화랑에서 전시도 하게 됩니다. 이번 전시는 지금까지의 작업에서 좀 더 앞으로 나아갔다고 봐야 합니다. 화랑 벽면의 실제 공간에 모니터를 걸고 전시하지만 감상하는 사람들의 손끝에서 다시 예술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감상하는 사람들이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즉석에서 터치 다운하여 자기의 휴대폰에 저장하는 겁니다. 돈을 주고 미술작품을 구입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이이남씨의 예술세계는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그 진화가 거듭하여 마침내 거장(巨匠)으로 우뚝 설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설재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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