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접선장(摺扇匠) 김대석씨
51.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접선장(摺扇匠) 김대석씨
  • 마스터
  • 승인 2010.08.17 14: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돈은 못 벌었어도 명예는 얻었습니다”

쥘부채의 명맥을 잇는 것이 사명이란 생각으로
3대째 가업 이으며 쥘부채 만든지 반백년 세월
담양군 접선 명인, 전남도 무형문화재 접선장 ‘우뚝’

중국산 죽제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접선장(摺扇匠) 김대석씨가 ‘쥘부채(접선)’를 만든 지 50년이 다 돼 간다. 김씨가 살고 있는 담양읍 만성리 96번지(완동)의 집은 조상 대대로 7대를 이어오고 있다. 김씨는 군대생활 3년을 빼고는 단 한 해도 이 집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다. 군대생활 3년을 빼고는 단 한 해도 부채 만드는 일을 쉬어 본 적도 없다.

대문을 들어서자 화단에 서 있는 오래 되어 보이는 석류나무 두 그루가 눈길을 끈다. 100년이 넘었다고 한다. 텃밭가의 자두나무도 석류나무와 함께 이 집을 지켜왔다고 한다.

1960년대에 전라남도에서 유일하게 쥘부채를 만드는 곳은 담양읍 완동이었다. 당시 완동의 다섯 집에서 쥘부채를 만들었다. 김대석 씨 집은 할아버지 대부터 쥘부채 일을 해 왔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우리 집에서 쥘부채 일을 하는 인부가 열 명이 넘었습니다. 쥘부채 일은 일손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저도 중학교 다닐 때부터 그 일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그 일을 했습니다. 8남매의 맏이였기 때문에 당연히 부모님을 도와 가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냐 마느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부채일이 재미있었습니다. 다른 형제들이나 누이들이 대학에 진학해도 억울하다거나 부럽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김 씨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 밑에서 부채 일을 하던 때는 연간 10만 자루를 만들었다. 완동마을 전체로는 50만 자루를 만들었다. 한겨울에도 쉬지 않고 부채를 만들었던 것이다.

“사시사철 날마다 밤늦게까지 일을 해도 일감이 쌓여 있었습니다. 70년대 후반으로 넘어오면서는 전국적으로 우리 완동에서만 쥘부채를 만들었습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그 일을 해서 재산도 많이 늘렸지요. 그런데 15년 전 아버지가 타계하시고 가업을 본격적으로 인수 받으면서 우리 부채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아버지가 타계하고 가업을 인수 받을 당시 쥘부채의 수요도 급격이 떨어졌다. 한창 성업일 때 연간 10만 자루씩 팔려 나갔던 것이 7,000자루로 떨어졌다. 예전에는 여름이면 누구나 쥘부채를 필수품처럼 들고 다녔었다. 그런데 대량으로 찍어내는 플라스틱 부채가 등장했다. 선풍기나 에어컨 같은 전자제품도 등장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홍수처럼 밀려오는 중국산(中國産) 값싼 부채 때문에도 경쟁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 부채는 전 제작과정을 손으로 합니다. 그만큼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값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비싸게 받으면 중국산과 가격 경쟁을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 부채는 사라지고 말 겁니다. 우리 부채의 명맥을 잇기 위해서는 싸게 팔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채의 명맥도 잇고 경쟁력도 갖추기 위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은 돈도 많이 까먹었습니다. 할아버지 대부터 부채로 벌어놓은 돈을 손자 대에 와서 그 부채 때문에 손해를 본 셈입니다.”

그런데 김 씨가 쥘부채에 대해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지만 자료가 변변치 않았다. 주로 대학의 공예과 학생들이 발표한 논문을 섭렵했다. 그리고 논문을 보고 <무용선(舞踊扇)> <대륜선(大輪扇)> <무당선(巫堂扇)> <대접선(大摺扇)> <줄광대부채> 등을 재현해 냈다.

대륜선은 궁중에서 주로 사용했는데 햇빛 가리개 부채다. 대접선은 1척 3치(약40cm) 이상 된 부채인데 부채 살이 50개이고 종이를 백 번 접기 때문에 ‘백첩부채’라고도 한다. 또 줄광대부채는 남사당패의 줄광대가 사용하는 부채인데, 몇 해 전 공전의 히트를 쳤던 영화 ‘왕의 남자’(이준익 감독)에서 사용된 것도 김 씨가 만든 부채다.

부채를 만드는 순서는 오방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초지방>에서 대나무를 쪼개 부채 살을 만든다. 부채살은 겨울철에 건조시키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므로 좋은 초지(初枝:부채 살의 시초)가 되는데 이 부채 살을 ‘오살’이라고 한다. 이 부채 살은 <정년방>으로 보내진다.

정년방에서는 부채 살을 만들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이 진행되는데 하나의 부채가 만들어지기까지 대부분의 시간이 이 방에서 소요된다. 이 방에서 부채의 몸통과 부채의 양쪽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변죽(邊竹)’도 만들어진다.

다음 과정이 <사복방>이다. 이 방에서는 부채의 손잡이 부분에 구멍을 뚫어 철사나 양철 같은 금속으로 고정시키는 작업을 한다. 사복은 주로 양은이나 양철 같은 재료를 쓰지만 백동(白銅)으로 멋을 부리기도 한다. 그리고 예전에는 사복 부근에 상아(象牙)를 붙이기도 했는데 이런 부채는 양반들의 호사품으로 애용되기도 했다.

사복방을 거치게 되면 부채의 틀이 만들어진다. 여기에도 종이를 붙이게 되면 부채가 완성된다. 부채 틀에 종이를 붙이는 것을 <되배>라고 하는데 ‘도배(塗褙)’의 사투리가 아닌가 싶다. <되배방> 앞 과정이 <환방>이다. 환방에서는 부채 살에 붙일 종이를 접는다. 환방에서 종이 접는 일은 이른바 달인(達人)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 남편 김대석 씨와 함께 30년 넘게 부채 일을 해왔다는 그의 부인은 아직도 이 일이 어렵다고 말한다.

마지막 과정이 <되배방>이다. 부채 살에다 종이를 붙이는 과정이다. 종이는 한지(韓紙)를 사용한다. 한지에다 들깨기름이나 콩기름을 먹이기도 하는데 이 부채를 <유지선(油脂扇)>이라고 한다. 기름 먹인 부채는 비가 올 때 우산 대용으로 쓰기도 한다.

반백년 가까이 쥘부채를 만들어 온 김 씨는 2005년에 담양군 접선 명인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다시 2010년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48-1호 접선장으로 지정되었다.

“부채 일은 50년 가까이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명감 같은 것을 갖게 된 것은 아버지께서 타계하시고 나서 본격적으로 가업을 이어받으면서입니다. 그때는 이미 중국산 죽제품이 담양 상가까지 파고 들어와 있었습니다. 저도 그냥 중국산 수입해서 팔았다면 고생도 덜하고 돈도 벌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돈보다 더 값진 명예를 얻었으니까 정말 보람을 느낍니다. 그런데 우리 담양의 쥘부채는 다양성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으므로 생필품이 아닌 공예품으로도 얼마든지 발전 가능성이 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전주의 합죽선과 담양의 쥘부채를 동일하게 보는데 전혀 다릅니다.”

<합죽선(合竹扇)> 두 개의 부채 살을 합쳐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중소(大中小)의 구분만 있을 뿐 고정된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전주의 합죽선은 바람을 일으키는 용도 하나지만 우리 담양의 쥘부채는 깔고 앉으면 방석이 되고, 햇살을 가리고, 손에 들면 지휘봉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들판에서는 밥상이 되고, 엽기적인 행동을 보았을 때는 얼굴을 가리고, 신날 때는 장단도 칩니다. 그리고 비가 올 때 우산 대용으로 쓰기도 합니다. 이렇듯 용도가 다양한 서민의 벗 담양의 쥘부채의 명맥을 이어나가는 것이 접선장의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설재록 작가

*이 글은 2010년 8월 10일 현재 이야기입니다.


  • 전남 담양군 담양읍 추성로 1379번지
  • 대표전화 : 061-381-1580
  • 기사제보 : 061-382-4321
  • 인쇄물,기념품,광고문의 : 061-381-3883
  • 팩스 : 061-383-2112
  • 청소년보호책임자 : 정재근
  • 법인명 : 담양군민신문
  • 제호 : 담양군민신문
  • 등록번호 : 전남 다 00232호
  • 등록일 : 2006-9-14
  • 발행일 : 2006-9-14
  • 발행인/편집인 : 최광원
  • 담양군민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담양군민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dy1@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