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2010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 조인호씨
52. 2010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 조인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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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8.30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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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비엔날레는 광주의 세계적인 문화브랜드입니다”

2010광주비엔날레에는 31개국 130여 작가 참여
전시회를 총괄하는 사람이 ‘예술총감독’이고
전시부장은 총감독 기획을 실행하는 ‘야전사령관’

비엔날레(Biennale)는 2년마다 열리는 국제현대미술전시회다. 1895년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황제의 은혼식(銀婚式)을 기념하는 국제적인 미술전람회 개최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비엔날레(Biennale)>란 이탈리아어로 ‘2년마다’라는 뜻이다.

광주비엔날레는 1995년, 정부가 한국 미술문화 진흥과 세계화를 위해 그 해를 ‘미술의 해’로 지정하면서 창설되었다. 광주비엔날레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국제사회에 알려진 광주정신을 예향 전통과 결합하여 새로운 문화적 가치로 승화시키기 위해 범정부 차원에서 창설되었던 것이다.

2010 광주비엔날레의 전시 제목은 ‘만인보(萬人譜 MANINBO/10000 LIVES)'다. 이 만인보라는 전시 제목은 고은 시인의 연작 시집에서 차용한 것이다. 조인호 전시부장은 “만인의 삶, 우리 시대 삶의 초상으로서 시각예술에 등장한 다양한 이미지를 통해 시대문화의 표상을 시적 은유로 담아내려고 했다”고 전시개념을 설명해준다.

9월 3일 개막을 앞두고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광주비엔날레 사무실을 찾아가 조인호 전시부장을 만났다. 2010광주비엔날레에는 세계 31개국에서 134명의 작가가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 거대한 전시회를 총괄하는 사람이 ‘예술총감독’이다. 예술총감독은 작가 선정에서부터 작품의 운반에 이르기까지 전시회의 기획을 한다. 그리고 전시부장은 예술총감독의 기획 안에 따라 실행을 하는 이른바 ‘야전사령관’과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분야에 문외한이라서 그 직책에 따라 역할이 얼마만큼 중요한가는 잘 모른다. 그래서 관계자에게 전시부장의 위상에 대해 물어봤다. 그랬더니 ‘아주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렇듯 막강한 파워를 가진 사람이 바로 담양읍 객사리에서 나고 자랐다고 한다.

“관방천과 인접한 장터에서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집을 짓는 도목수였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넉넉하게 살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화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면서 칭찬을 하며 놀라기도 했습니다. ‘보이는 것을 보고 그대로 그렸을 뿐인데 왜 놀랄까?’하고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스스로도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상상하는 것들이 도화지 위에 자연스럽게 그려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보다 그리기를 조금 잘 했던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집 짓는 일을 맡아 오시면 방바닥에 엎드려 여러가지 형태의 집을 그리셨습니다. 조감도 같은 것이었지요.”

그러나 조 씨의 아버지는 아들이 화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그림 그려서는 밥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가 되자 조 씨는 광주에 있는 조그마한 인쇄소에서 이른바 ‘현장실습’을 했다. 오랜 동안 인쇄업에 종사해 온 사장 밑에서 팸플릿 도안 같은 일을 배우며 인쇄소 허드렛일도 했다.

하루는 인쇄소 사장이 타고 난 재주가 있는데 기초실력이 부족하다며 미술학원에 다녀보라고 했다. 기초실력이 없으면 오래 버티지 못한다고 했다. 사장은 조 씨를 인쇄업으로 성공할 재목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조 씨는 시골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그때까지 미술학원이 뭔지도 몰랐다. 무조건 그렸다. 그렇게 그리다 보면 화가가 되는 줄 알았다. 조 씨는 사장이 권하는 대로 인쇄소 일이 끝나면 미술학원에 가서 기초를 다졌다.

“그런데 미술학원에 다니는 내 또래 학생들이 자기네끼리 대학 진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대화를 들으면서 문득 나도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대학진학은 그야말로 막연한 생각이었고 대책은 전혀 없었습니다. 등록금도 걱정이었고 성적도 자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학 진학은 생각으로만 끝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쇄소에 취직을 했습니다.”

담양에서 광주로 출퇴근을 했다. 그렇게 인쇄소에 다니던 어느 봄날이었다. 조 씨는 문득 인쇄소를 그만 다니고 대학진학을 위해 미술학원에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에게 대학을 졸업해야 제대로 된 화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어머니에게는 한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장형은 아주 영리하고 똑똑한 사람이었는데 고등학교에 다니지 못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읍내 자전거 점포에서 일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늘 그걸 가슴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흔쾌히 내 청을 들어주셨던 것 같습니다. 물론 아버지에게는 비밀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 해 대학시험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다시 삼수를 했다. 마침내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을 했다. 그러나 영장이 나와 대학에 다녀보지도 못하고 입대를 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를 했을 때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복학 후 곧바로 미술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1학년 1학기 성적은 과 수석이었다. 그러자 2학기 등록금이 면제되었다. 그 후로 매 학기 등록금 면제를 받았다. 그리고 수석 졸업을 했다.

“대학 3학년 때가 되었을 때 문득 그림을 그리는 일에 회의가 느껴졌습니다. 무엇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가? 내 작업이 자기만족 외에 어떤 가치와 의미가 있는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런 갈등 갖게 되면서 내 그림에 대한 주제와 표현기법에 대해 고민도 하게 되었습니다. 4학년 때 지도교수님께서 미술사(美術史) 공부를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조언을 해 주셨습니다.”

조 씨는 대학 4학년 때 붓을 놓았다. 그리고 대학졸업 후 홍익대학 대학에 진학하여 미술사 공부를 했다. 대학원 졸업논문의 제목은 ‘1950년대 한국 서양화’이다.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는데 여러가지 어려움이 따랐지만 행복했습니다. 그림에 몰두해 있던 대학생활이 나만의 세계에 갇혀 살던 고독한 시기였다면 대학원 생활은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소통의 시기였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한 후 조 씨는 호남대학교, 전북대학교, 조선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재단법인 광주비엔날레’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6년이다. 그 때 특별전 팀장을 맡았다. 그 뒤 기획홍보팀장, 전시팀장을 맡아 일했고, 현재는 전시부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일하고 있다.

“전시를 앞두고는 늘 두려움과 설렘을 갖곤 합니다. 광주비엔날레 미술형식을 통한 생생한 문화현장이면서 시대의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광주비엔날레가 갖고 있는 중요한 의미는 광주비엔날레가 광주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화브랜드로 자리잡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향후 해를 거듭하면서 역사도 쌓이고 전통도 깊어지다 보면 광주비엔날레는 광주를 대표하는 문화브랜드가 아니라 대학민국의 문화브랜드로 발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설재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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