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15호 참빗장 고행주씨
57.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15호 참빗장 고행주씨
  • 마스터
  • 승인 2010.10.27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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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알기 때문에 다른 생각은 안했습니다”

참빗 하나 만들어지기까지 100차례 손길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손자, 증손자까지
참빗 만드는 일이 6대에 걸친 가업
열두살때 아버지 거들었으니 어언 65

참빗[眞梳]의 모양은 우리네 옛 여인들의 단아한 쪽머리와 같다. 참빗의 중심을 잡고 있는 대가 가르마라면 그것과 수직을 이루며 좌우로 늘어선 빗살은 곱게 빗어 내린 머리카락이다. 대나무를 재료로 한 참빗은 빗살이 아주 가늘고 촘촘한 빗이고, 나무를 재료로 한 얼레빗은 빗살이 굵고 성긴 빗인데 월소(月梳)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참빗은 빗살이 아주 가늘고 촘촘한 대빗을 말하는데, 대나무를 재료로 한 모든 빗이 참빗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나무골 담양에서 만들어진 참빗이 진짜 참빗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고행주씨는 1986년,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15호 참빗장 인증을 받았다.

참빗은 빗살이 가늘고 촘촘한 머리빗으로 크기에 따라 대소(大梳), 중소(中梳), 어중소(於中梳), 진양소, 화각소(畵角소梳), 만갑소, 써울치 등이 있다. 우리나라 빗의 역사는 아주 길다. 낙랑고분에서 빗이 출토된 바 있는데 적어도 기원전 1세기경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공조(工曹)에 죽소장(竹梳匠)을 두었다. 참빗은 예로부터 담양, 영암, 나주, 남원 등에서 만들어졌는데 이 가운데서 담양과 영암의 참빗을 최고로 쳤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참빗을 만들고 있는 사람은 고행주씨 한 명 뿐이다. 몇 년 전까지는 고 씨와 함께 무형문화재 인증을 받았던 영암의 이식우씨도 참빗을 만들었었다. 그런데 이 씨가 작고하고 나서는 고씨 한 사람만 남게 된 것이다.

고씨의 할아버지 고학진(1876-1936)은 담양 참빗조합의 진소계원으로 활동했다. 할아버지 는 참빗으로 꽤나 많은 재산을 모았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정참사공덕비’에는 고학진의 공적과 담양 참빗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 고제업(1901-1979)도 참빗 만드는 일로 일생을 보냈다. 이어서 고행주씨가 가업을 잇고 있다. 고 씨의 큰아들 광록씨 내외와 셋째딸 윤희씨도 기술을 전수 받아 대를 잇고 있다. 고 씨의 부인 이양례씨도 함께 참빗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이처럼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 증손자로 이어지고 있는데, 비석 등 여러 가지 기록을 더듬어 봤을 때 적어도 6대에 걸친 가업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씨는 열두 살 때부터 아버지의 참빗 만드는 일을 거들었으니 어언 65년이나 된다. 고씨는 체계적으로 기술을 전수받지 않고 참빗 일 심부름을 하면서 ‘어깨 너머로 그럭저럭 배웠다’고 말한다. 그 후 스무 살이 되어서야 참빗 하나를 완성했다. 그걸 본 부친은 ‘아따 이놈 잘 만들었다’고 칭찬했다. 그렇지만 고 씨는 아들 광록에게 칭찬보다 ‘적당히 만들지 말라’는 것과 ‘만족스럽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말라’는 당부를 한다.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생계수단으로 참빗을 만들었지만 저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참빗의 맥을 이어나가야 할 입장이기 때문에 적당히 만들면 직무유기가 됩니다.”

고씨는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34년에 태어났으니까 그 시절에 고등학교를 나왔다면 고학력이고 지식층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사회 지도층으로 살아왔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고씨는 그런 생활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아버지 밑에서 오로지 참빗만 만들었다.

“참빗 만드는 일이 재미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뚜렷이 할 일이 없으니까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간혹 그 시절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면서도 왜 관직 같은데에 몸담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합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내가 나를 잘 아는데 언감생심 무슨 또 다른 꿈을 꾸어 보겠습니까? 다른 재주가 없으니까 참빗이나 열심히 만들자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참빗이 생활필수품이었던 당시, 참빗 벌이는 꽤 높은 소득이었다. 한창 호황이던 때 생기(향교리 1구), 서운에 또는 취영마을(향교리 2구), 완동(만성리), 운교리 등의 300여 호가 참빗을 만들었다. 담양장날 하루 매출량은 15,000개를 웃돌았다. 그러나 요즘 고씨는 한달 평균 500여개를 판매하고 있다. 아들 광록씨는 인터넷 판매도 하기 때문에 아버지보다는 더 많다고 한다.

“참빗 소모가 급격히 줄어 든 것은 여인네들의 머리 모양새가 바뀐 것이 큰 이유가 되겠지요. 여인네들이 댕기머리나 쪽머리를 할 때는 참빗은 여성의 필수품이었습니다. 그런데 파마머리가 등장하면서 참빗은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화학섬유가 나온 것도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무명옷을 입을 때는 이[虱]가 번성했는데 화학섬유로 된 옷을 입기 시작하면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이는 속옷에만 사는 것이 아니라 머리카락에도 붙어 살았습니다. 머리카락에다 서캐(이의 알)를 붙여서 낳았는데 좀처럼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때 참빗으로 빗으면 말끔히 제거가 됩니다.”

참빗은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물건이지만 완성되기까지 손이 아주 많이 간다. 대나무 제품 중에서도 비교적 정교한 솜씨를 필요로 하는 것이 참빗이다.

참빗의 주재료인 대나무는 왕대, 분죽, 오죽 등이다. 자란 햇수가 짧은 대나무로 만들면 목질이 물러 변형될 염려가 있기 때문에 5-6년 정도 된 것을 사용한다. 참빗은 대나무의 줄기 부분을 사용하기 때문에 줄기라는 말 대신에 끄렁대, 미죽, 중미죽, 중통, 중끝죽, 하끝죽, 등대감 같은 말로 부른다. 하나의 참빗이 만들어지기까지 손길이 100여 차례나 간다.

주위 사람들은 고 씨를 ‘만능재주꾼’이라고 평가한다. 필자는 문득 고 씨의 전시 안내 책자에서 시 한편을 발견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시 쓰는 솜씨도 범상치 않다는 생각을 했다.

<찾아온 나그네 -고행주 시>

백진강 굽이굽이 관방제를 이루니/사백년 노거수 그늘 밑에/출렁이는 저 물결이/나그네 오라 손짓하네.

죽녹원 가는 저 나그네/아, 사공은 잠들었나 보다/종아리 걷고 뚜벅뚜벅/찾아온 길손아/징검다리 뚜벅뚜벅/더디 간들 뉘라서 탓하랴.

해 저문 죽녹원에 달빛은 산산이 부서지고/사위에 어둠이 가랑비처럼 내리니/대허리 안고 더듬은 허공의 별빛이.

가는 세월 바라보는 저 나그네의 발길에/눈물인지 빗물인지 하염없이 흐르니/발자국마다 고인 눈물이/나그네 가는 길을 더디게 하네.

고 씨의 집은 죽녹원과 추녀가 맞닿아 있다. 죽녹원에서 이는 바람이 고 씨의 안마당에 가득하다. 참빗장, 아니 일흔을 훌쩍 넘긴 시인은 그의 아내와 함께 만든 참빗으로, 오늘도 백여섯 살이 된 노모의 백발을 곱게 빗기고 있다.

/설재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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