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삽재골 자생화(自生花) 농장 주인 김성남씨
58. 삽재골 자생화(自生花) 농장 주인 김성남씨
  • 마스터
  • 승인 2010.11.05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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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파는 것이 아니라 정(情)을 주는 것입니다”


택시기사, 소 사육 등 실패한 뒤 삽재골에 정착
운동 삼아 야산 돌아다니며 자생화 채집 시작
1990년 사업자 등록 첫해 매출액은 고작 4만원
4년이 지

‘삽재골’은 대덕면 성곡리 뒷산 야트막한 골짜기의 이름이다. 인근의 노인네 중에도 왜 삽재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그걸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세인들의 주목을 끌지도 못하면서 오랜 세월 그냥 하나의 골짜기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랬던 공간이 김씨가 자생화 농장을 일구면서 새롭게 거듭나게 되었다.


“처음부터 꽃을 잘 키워온 사람은 나중에 병해가 오면 전멸시키고 맙니다. 그러나 처음에 몇 차례 꽃을 죽여 본 사람은 다량으로 키울 때도 실패하지 않습니다. 죽여 봐야 살리는 법을 알게 됩니다. 인생에서도 실패 없이 살아온 사람은 한 번 넘어지면 못 일어납니다.”
김씨는 신안군 지도 태생이다. 학교 졸업 후 건축설계사무소에 근무했다. 그러나 얼마 후 건축설계사의 꿈을 접었다.


“현역으로 군대를 다녀오면 설계사 시험에서 가산점을 받아 유리한 조건이 되는데 그럴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어렸을때 사고로 손가락에 장애가 생겨 방위복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현역으로 간 동기들과의 경쟁에서 밀릴 수 밖에 없어서 6년 동안 다니던 설계사무소를 그만 두고 고향으로 들어갔습니다.”
소를 키워 부농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송아지 두 마리를 샀다. 농사 등 날품 일을 하면서 돈이 모아지면 소를 샀다. 소가 열두 마리로 늘었다.


“어느새 서른여섯 마리로 늘었습니다. 그런데 80년대 초에 소파동이 일어났습니다. 외국에서 이른바 도입송아지가 들어오면서 오륙십만원 하던 송아지 값이 팔만원까지 떨어졌습니다. 결국 축산을 때려치우고 말았습니다. 2년만 버텼더라면 부자가 되었을 겁니다. 바닥을 치던 소값이 2년 후에 폭등을 했으니까요. 그렇다고 계속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실패는 좋은 경험이니까요. 아버지께서 결혼과 동시에 대처로 나가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고향에서 쫓겨난 겁니다.”


김씨는 결혼과 동시에 광주로 나와 골목 슈퍼마켓을 시작했다. 이 일은 1년 만에 그만 두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한 일이 영업용 택시기사 일이었다.
“택시 일을 6년 했습니다. 그런데 기관지가 안 좋아져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택시 일도 2년만 더 했더라면 개인택시를 받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소를 6년에서 2년만 더 키웠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택시 일도 그 햇수가 똑 같습니다.”

기관지로 고생을 하면서도 택시 일을 하던 어느 날, 김씨는 우연히 대덕면 문학리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어느 겨울날 곡성에 승객을 태워다 주고 돌아오다가 유난히도 양지바른 한 마을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빈 집 한 채를 샀습니다. 그 마을이 바로 문학리입니다. 1년 후 특별한 계획도 없이 이사를 했습니다. 가정경제와 건강 때문에 이사를 한 겁니다.”


김씨는 머릿속에 청사진을 그렸다. 식용 개를 기르기로 했다. 식용(食用) 개, 즉 ‘구(狗)’였다. 고래로부터 개는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 사육했다. 하나는 식용인 ‘구(狗)’이고, 또 하나는 애완이나 특수 목적을 띤 ‘견(犬)’이다.
“개 한 마리가 한번 분만할 때 평균 다섯 마리 이상의 새끼를 낳습니다. 어미 개는 1년에 두 차례 분만할 수 있으니까, 수치상으로 한 마리가 스물다섯 마리가 됩니다. 얼핏 계산해 보니까 연 소득을 1억원은 올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씨는 당장 함평장으로 가서 마리 당 팔만원을 주고 강아지 50마리를 샀다. 그런데 1주일만에 모두 폐사되고 말았다. 다시 곡성장에 가서 12마리를 샀다. 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았다. 마리 수가 점점 늘어나자 소음과 냄새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불만을 토로했다. 근처의 밭을 빌려 축사를 지어 길렀다. 그래도 마리 수가 많아지니까 문제가 생겨, 산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빈 축사를 임대해 길렀다.


“소득이 꽤 높았습니다. 옥과 과학대학의 구내식당에서 나오는 잔반을 가져다 먹였습니다. 개가 폐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장염입니다. 그래서 잔반을 끓여서 먹이는데 황토를 섞어 먹이면 장염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반 수의사(獸醫師))사가 되었습니다.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잔반을 가져다 먹이면 오전 아홉시 이전에 모든 일이 끝나고 하루 종일 여유롭게 보낼 수 있습니다.”

김씨 부부는 운동 삼아 인근의 야산을 돌아다니며 자생화를 채집해 기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많고 할 일이 없으니까 그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잡다한 용기에다 꽃을 심어놓으니까 볼품이 없어 꽃에 어울리는 화분을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도예공방을 찾아다니며 도자기 화분 만드는 법을 익혔습니다. 배운 대로 손수 가마도 만들었는데 지금까지 일곱 개의 가마를 만들었습니다.”


김씨는 여전히 개를 사육하면서 취미로 자생화 채집과 도자기 화분 만들기를 했다. 그 사이 화분이 많아져 비닐하우스 한 동을 지었다. 김씨의 자생화 비닐하우스는 소문이 나고 애호가들의 방문도 잦아졌다.


“가족단위로 오는 사람들에게는 무료로 도자기 만들기와 꽃 키우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일을 어느 신문사 기자가 알고 찾아와 취재를 했습니다.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도 찾아왔습니다. 전국 각처에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광주 뿐만아니라 경상도나 충청도 등 먼 곳에서도 단체로 왔습니다. 사업으로 추진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6년동안 해오던 개 사육을 접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곳 삽재골에 자생화 농장을 만들었습니다.”

1990년 초, 사업자 등록을 했다. 그런데 사업자 등록을 한 첫해 매출액은 4만원이었다.
“다소의 실망은 했지만 크게 낙심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실패할 때마다 늘 실패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농장 운영이 힘들었지만 가족단위 무료체험은 계속했습니다. 열명 중 한 명만 내 뜻을 알아주면 대박이 터지는 겁니다. 그 한 사람이 우리 삽재골 자생화의 열성적인 홍보요원이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 사업자 등록 후 4년 동안은 정말 어려운 상황에서 농장을 꾸려나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매출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껑충 뛰었습니다. 하루 평균 매출이 100만원이었고, 하루 400만원이 넘는 날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꽃을 키워 파는 일보다 이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일에 매진할 때가 되었습니다. 소품종 대량 재배보다는 다품종 소량 재배에 주력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해서 대덕면 성곡리 삽재골에 대한민국 최대의 자생화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앞으로 꿈입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김씨는 예전에 비해 꽃 선물에 인색해졌다.
“꽃은 자기가 좋아하는 꽃을 가져다 키워야 합니다. 아무 꽃이나 선물하면 감사해 하지도 않고, 그렇기 때문에 오래 못가 죽여 버립니다. 꽃은 파는 것이 아니라 정(情)을 주는 것입니다.”

/설재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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