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나무 성형 마디 쌓기’ 도예가 최중열씨
60.‘대나무 성형 마디 쌓기’ 도예가 최중열씨
  • 마스터
  • 승인 2010.11.27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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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찰 때까지 쉬지 않고 만들 겁니다”

흙으로 10㎝ 정도의 대나무 마디 3천개로 만든
‘대나무 성형 마디 쌓기’ 기법 도예계 신선한 반향
도예가인 늦깍이 대학생이 지금은 대학원 박사과정
제1회

도예가 최중열씨는 서른여덟 살에 대학에 진학해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최씨는 그동안 대한민국 현대 도예전(2004년) 대상 수상을 비롯하여 여러 공모전에서 수상했다. 담양읍 오계리가 고향인 부인 장연자씨도 도예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최씨의 작품은 일반인들이 흔히 보았던 도자기와는 다른 데가 있다. 그의 도예 기법은 이제까지 그 어떤 도예가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최씨는 그 기법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대나무 성형 마디 쌓기 기법’이라고 말한다.
“마디 쌓기를 하는 것은 마음속에 늘 고향 담양을 그리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나는 스스로를 담양 홍보대사라고 생각하며 작업에 임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를 마친 최씨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공부보다 기술을 배워야 먹고 살아갈 수 있다는 아버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형인 삼열씨의 밑에서 간판기술을 배웠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우등상을 받을 정도의 실력은 되었습니다. 졸업을 앞두고 담임선생님께서 아버지를 찾아와 통사정을 했지만 아버지의 고집을 꺾지 못했습니다. 청소년 시절에 교복을 입은 내 학생들을 보면 눈물부터 나왔습니다. 입고 다니지도 못할 교복을 맞춰 방에 걸어놓고 지낸 적도 있습니다.”


최씨는 형 밑에서 간판 기술을 배우면서 야간중학교(야학)에 다녔다. 그리고 1년 뒤 광주로 나갔다. 본격적으로 투시도, 조감도 등 상업미술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3년동안 공부를 통해 어느 정도 실력이 쌓이자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서울의 ‘원디자인’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유명회사였습니다. 보수도 괜찮았습니다. 상황이 나아지자 내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던 향학열이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최씨는 회사가 끝나면 독학으로 공부를 했다. 그렇게 해서 열아홉 살에 고입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스무살에 대입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그런데 몸을 너무 혹사하는 바람에 폐결핵에 걸려 요양차 담양으로 내려왔다. 대학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때 형 삼열씨는 ‘개미사’라는 상호로 간판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6개월동안 요양하면서 형의 일도 거들었다.

이 무렵 형 삼열 씨는 담양청년회의소(JC)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담양JC 상징탑 건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래서 최씨가 이 조형물의 디자인을 맡게 된 것이다. 담양공고 앞에 세워져 있는 JC 상징탑이 바로 최씨가 디자인한 것이다.

몸이 우선해지자 최씨는 서울로 올라와 원디자인에 복귀했다. 그런데 이때부터 최씨는 예술가를 상징하는 이른바 ‘빵떡모자’를 쓰고 다녔다.


“그 모자를 쓰고 다닌 것은 언젠가는 예술가로서의 꿈을 이루겠다는 다짐이기도 했습니다. 얼마 후 원디자인을 그만 두고 독자적으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돈도 걱정하지 않고 살 만큼은 모았습니다. 그러자 더욱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습니다. 회사에 다니면서 대입 준비를 했습니다.”


1997년, 최씨는 경희대 예술디자인학부 도예전공에 응시했는데 낙방을 했다. 그리고 재수를 해 1998년에 합격했다. 대학에 합격하자 사업을 그만 두었다. 대학 4년간 내내 수석을 했다. 이어서 곧바로 경희대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러고 나서도 공부를 그만 두지 않았다. 마흔다섯 살이 되던 해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

이렇듯 최씨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인 장연자씨의 내조가 크다. 부인 장씨는 사업을 그만 두고 공부를 하겠다는 남편의 뜻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리고 내조를 하면서 자신도 도예가가 되었다. 최씨 부부는 합동으로 다섯 차례의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최씨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부터 도예가로서 인정을 받고 있었다. 2004년에 첫 선을 보인 ‘대나무 성형 마디 쌓기’ 기법은 도예계에 신선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004년은 최씨의 해라고 할 정도로 그는 여러 공모전을 휩쓸었다. 최씨는 제1회 대한민국 현대 도예전에서 대상을 비롯해, 서울신문 현대 도예전, 행주 미술대전, 신사임당 미술대전, 경기 미술대전, 익산 한국공예대전 등에서 수상을 했다.


“‘대나무 성형 마디 쌓기’는 흙으로 10cm 정도의 대나무 마디를 만들어 이것들을 ‘흙물(슬립)’로 붙여 올리는 기법인데, 한 작품에 3,000개 정도의 대나무 마디가 들어갑니다. 기존의 도자기나 항아리 같은 것은 하나의 덩어리 형태인데, 대나무 성형 마디 쌓기는 여러 개의 조각이 모여 하나의 형태를 이루는 것입니다.”

최씨는 경기도 광주의 ‘광주왕실도예촌’ 안에 있는데 공방과 강원도 홍천의 ‘도예마당 토원’을 오가며 끊임없이 ‘대나무 성형 마디 쌓기’를 하고 있다. 마디 쌓기로 만들어진 작품은 200개가 넘는다.


최씨의 좌우명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은 학맥이나 인맥이 변변치 않은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싸워 이기는 길밖에 없다고 말한다.
최씨는 이른바 ‘상업미술’로 나름의 성공을 했다. 그랬는데 어느날 갑자기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예술가의 길을 선택했다. 그런데 속된 말로 왜 ‘배고픈 예술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그의 작업노트에 쓰여 있는 한 대목에 대답이 들어 있다.


《흔히들 작가는 배고프다고, 어려운 상황에 빠져야 작품이 나온다고 말한다. 나는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나와 싸우기 위해 작업을 한다. 그런데 대개는 금방 지치고 만다. 자신의 능력을 한탄하기도 하고, 자괴감으로 스스로를 망가뜨리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사회적 지위나 돈과 타협하기도 한다. 일류 대학을 나와 좋은 인맥에 편승하여 손쉬운 성공을 얻으려는 사람도 있다. 진정한 예술가는 관념을 해체해야 한다. 나는 우리 사회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송두리째 깨부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최 씨는 장인(匠人)보다는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장인들이 들으면 비난을 할지 모르지만 장인과 예술가는 분명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한 분야에서 20년, 30년 외길을 걷다 보면 장인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술가는 스스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만의 색채를 지닌 창조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대나무 성형 마디 쌓기를 하고 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기법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그런데 기법은 달라지더라도 주제는 대나무입니다. 담양은 내 고향이니까요.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대나무 마디 쌓기 작품은 기회가 닿는다면 내 고향 담양에 기증할 겁니다.”

/설재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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